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75화 (75/412)

"난 루드라 왕국의 사절로 온 것이다! 감히 네 놈이 사절의 수행원을 죽여?!"

그윌로는 상상 이상의 강적이었다. 지금 이 꼴이 났는데도 아직도 진심으로 분노하고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솔직히 좀 웃길 정도다. 비록 15년 간 지내면서 권력층이라 할만한 사람들을 만난 건 손에 꼽는다고는 하지만, 하필 해외까지 나와서 제 3국의 귀족이라는 형태로 저런 상병신을 만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지.

근데 쟤가 라그니스처럼 제국의 초청으로 오게 된거라면 뭐라도 잘난 게 있으니까 온 거 아닌가? 왜 저렇게 병신같지?

"당장 죽여 없애버려주마!"

"도, 도련님! 참으셔야합니다! 라그를 일격에 죽인 이상 평범한 실력은 아닙니다!"

아니 미친놈들아. 이미 용사를 대련으로 이겨먹은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해야하는 거 아니냐?

이 즈음되니 얘들 뭔가 기본 상식부터 남다른 저능아들이 아닐까 진심으로 의심가기 시작한다.

"닥쳐라!"

그윌로가 일갈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무례를 죽음으로 사죄할 기회를 줬음에도 오히려 내 수행원을 죽이다니! 이딴 불명예가 존재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내 손으로 죽여 없애주마!"

정말 거짓말 안 하고 이 순간만큼은 이 새끼가 용사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논리로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게 이런건가?

저딴 게...루드라의 귀족?

"불꽃이여!"

뽑힌 검과 놈이 끼고 있던 반지가 공명하듯이 빛나며 슬금슬금 마력을 마나로 치환하기 시작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빛난다? 어쩌면 내 감각이 그렇게 받아들일 뿐이고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마력을 빨아들이는 반지인 걸 보아하니 일단 방금 외친 건 시동어고, 반지와 검이 상호작용해서 발동하는 형태의 마법이었다.

놈이 루드라라는 나라의 귀족 평균인지 평균 이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장 날 죽이겠다는 발언만큼은 가능성 여부를 떠나 진심이었나보다. 그래도 저렇게 자신만만하다는 건 최소한 방금 수행원보다는 강하다는건가? 아니면 저 장비만을 믿고 안하무인의 자세로 일단 돌진하고 보는걸까?

"강체强體!"

또 하나의 반지가 반짝이며 이번엔 녀석의 육체에 작용하는 것을 멀뚱히 바라보면서 고민해봐도 모르겠다.

처음엔 각 나라 인사들을 라그니스와 같은 핑계로 각 국의 젊은 실력자들을 모아 용사파티를 꾸리는게 목적인가 싶기도 했는데, 저렇게 인성을 고려하지 않은 놈이 한 방에 등장하는 걸 보고 나니 그 가설은 가능성이 희박하게 느껴진다.

"근력 강화! 지구력 강화! 안력 강화!"

그런 고민이나 하는 사이 녀석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열심히 외치며 반지들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 사이에 일곱 번 정도는 죽일 수 있었지만 명색에 귀족 놈 하나 하늘로 올려 보내는데 최대한 알차게 써 먹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 최대한 쇼맨쉽을 발휘한 뒤 죽여버려야 딴 소리도 안 나오지.

난 오히려 이번 생에서 처음 보는 병신같은 전투 준비에 소소한 재미까지 느끼는 중이었다. 결투는 이미 검을 뽑자마자 시작된 터라 내가 당장 달려가서 베어죽여도 찍소리도 못하는건데, 놈은 마치 이 모든 준비를 내가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조바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하긴 그런 발상이나 하고 있으니 이딴 만행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날 윽박지르는 거겠지.

"마법 방벽! 물리 방벽!"

씨발 그렇지만 재미와 별개로 너무 오래 걸린다. 결투 선언만 안 했어도 하나 발동 시킬 때마다 비아냥 한 번 던져주며 심심풀이라도 했을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로군.

놈은 그 외에도 장비 강화에 마력강화까지 건 뒤에야 자신만만하게 결투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미개한 천것아. 네 분수를 깨달으며 타 죽어라."

-파앗!

놈은 미소짓지 않는다. 정말 진심으로 화만 내고 있다. 이 순간까지도 정말 자신이 모욕을 당했다는 저 태도인 게 터무니없이 신선한 첫 번째 충격으로 다가왔다.

두 번째 충격은 저렇게 열심히 강화를 걸었는데도 하품이 나오도록 느리다는 점 정도?

"하아앗!"

불 붙은 검을 휘두르는 놈과 드잡이질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나는 기합 넣을 힘으로 호흡이나 조절하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꾹 참아가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놈의 검을 옆으로 끊어 쳐냈다.

-카앙!

숲속에서 파바에리인가 하는 놈의 부하놈 검을 세로로 쪼갰을 때의 감각으로 후려쳤는데도 놈의 검은 날카로운 소리만 울리고는 멀쩡히 튕겨나갔다. 뭐, 사실 자세가 휘둘릴 정도로 튕겨나가서 놈의 균형이 무너졌으니 멀쩡하다고 말하기엔 좀 어폐가 있지만 최소한 검은 멀쩡했다.

일단은 바로 빈틈을 자랑하는 놈의 명치를 향해 있는 힘껏 발차기를 날려줬다.

-뻐억!

"끄헉?!"

오. 아예 심장이 터져 죽어도 괜찮다는 느낌으로 걷어찼는데 갈비뼈만 좀 상한 느낌이다. 저게 강체라는 마법의 효과인가? 굉장하잖아.

"끄어어...헉."

심지어 부러지는 느낌도 없었으니 그대로 자세를 바로 잡을 법도 했는데, 놈은 그대로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의 명치를 부여잡기 바빴다. 덕분에 불꽃이 일렁이는 검이 몸에 닿아서 그대로 볼썽사납게 타 죽어버리지 않으려나 내심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건 마법이라기 보단 정령의 권능을 빌리는 거에 가까운 거 같군. 아무리 장비 빨이라지만 나 빼고 전부 정령의 도움을 받으며 잘만 싸우는 거 같다.

"가, 감히...천것이 나를 흙발로 걷어차...!"

이번엔 정말 검조차 내려놓고 기립박수를 치고 싶었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걸로 화가 난다고? 저 새끼는 진짜다 진짜.

너무나도 진짜라서 바로 머리통을 따주고 싶을 정도지만 난 열심히 참았다.

그리고 그 끈기는 놈이 겨우겨우 숨을 다 고를 때 즈음 보상 받을 수 있었다.

"멈추십시오! 당장 멈추십시오!"

이미 한 놈 죽었지만 그래도 꽤나 빠르게 학원 관계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팔방 흩어지던 학생들 중 누군가가 성공적으로 할 일을 마쳤다는 의미겠지.

이틀 사이 8개나 되는 수업들을 들었음에도 처음 보는 남자였다. 겉으로 은은하게 오러가 느껴지는 것을 보아하니 나름 실력자다.

하지만 이미 나한테 걷어차여 눈이 돌아간 그윌로는 남자를 향해서도 분노를 표출했다.

"넌 누구냐! 감히 네가 뭔데 나를 막으려 드는 것이냐!"

이 새끼 분명 남작 자식이라고 하지 않았나? 누가 보면 후작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진짜. 혹시 루드라 왕국은 계급이 거꾸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그래도 내 힘으로 명치를 까였으니 숨쉬는 것도 힘들텐데 소리는 바락바락 잘도 지른다.

"전투학과 총괄 교수 웨이드 팔마혼이오. 그쪽이야 말로 대체 누구길래...세상에 이미 피까지 봐버렸군."

자신을 웨이드라 밝힌 교수는 내 뒤에 널부러진 라그라던 놈의 시체를 보고 곤란하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엔 어떠한 질책도, 당혹감도 없었다.

그저 번거로운 일을 처리해야하는 게 귀찮을 뿐인 사회인의 얼굴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드미아 에가. 이미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이 파다해서 한 번 뵙고자 했으나, 이런 형태로 얼굴을 비추게 될 줄은 몰랐군요."

대답대신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보였으나 상황을 들은 것인지 웨이드는 나의 입을 열기 위해 질문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윌로를 향해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상황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그 쪽이 누구인지 모르나, 오히려 그렇기에 제국의 손님 중 한 분이라는 걸 알겠군요. 당장 무례를 사과하고 결투를 중단하십시오."

"이...! 이 나보고 사과를 하라고?! 내 수행원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흙발로 걷어차며 모욕한 저 놈에게?!"

"애당초 그 쪽이 이티스엘의 변경백께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학생들이 똑같은 소리를 하며 뛰쳐왔습니다. 당신이 제국의 손님이듯 이 분 역시 제국의 손님이자 한 왕국의 변경백입니다. 루드라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저 역시 그런 무례를 당했다면 검을 뽑아 들었을겁니다."

그를 찾아간 학생이 한 두명이 아니었던건지 벌써 사건의 발단을 알고 있는 웨이드였다. 그는 이 되도 않는 상황 속에서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 침착함을 선보이며 날 감탄하게 만들었지만, 그윌로는 다시 한 번 상상을 초월하는 병신같은 발언으로 나를 더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닥쳐라! 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 천것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일은 없다! 타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저리 비켜!"

"당신은 지금 결투 중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까?! 엘드미아 에가는 이티스엘의 신들께 결투를 바쳤습니다!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입니다!"

"저 놈이 목숨을 걸었으니 내 직접 취해줄 것이다!"

흠. 우리 친구 그윌로는 결투에서의 발언은 맹약만큼 무겁다는 걸 모르고 살았을 것 같다. 그래도 죽으면서 알게 된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군.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과하지 않는다고 선언까지 한 마당에 더 볼 것도 없지. 난 뭐라 말을 꺼내며 우리 사이를 막으려드는 웨이드를 피해 순식간에 그윌로와의 거리를 좁히고는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조금은 기대했지만, 놈은 역시 반응하지 못했다.

"아..."

웨이드의 탄식인지, 주변에서 구경하던 학생들의 탄식 모를 것을 마지막으로 결투는 그렇게 끝났다.

일부러 목을 베는 순간 검을 꺾은 탓에 하늘 높이 치솟은 그윌로의 머리통이 한참 후에야 땅에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형편없군."

정말 온갖 쌍욕을 다 박아버리고 싶었지만 동화 속 기사님을 연기해야하니 한 마디로 끝내고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검을 닦았다.

손수건 아까워서 놈의 시체에 대고 닦고 싶지만 그것도 꾸역꾸역 참기로 했다.

"제가 따로 취해야 하는 행동이 있습니까 웨이드 교수님?"

그렇게 피기름을 닦아낸 뒤 검을 집어넣으며 웨이드를 바라보자 그는 긴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리가요. 제국 안에서 이루어진 합법적이고 신성한 결투였습니다. 루드라 왕국이 항의하면 황제 폐하의 분노를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방금전까지 정신나간 그윌로의 헛소리를 듣다가 상식적인 지성인의 말을 들으니 온도 차가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었기에 난 그에게 가볍게 예를 취하고는 가만히 서서 팔짱을 낀 채 이 모든 걸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라그니스에게 다가갔다.

사뭇 진지하고 무표정해보이는 그녀의 얼굴 한 켠에 만족스러움이 드러나있는 것은 아마 나만 눈치 챘을 것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