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음에도 인생에서 잊혀지지 않는 인물. 나에게는 그런 인물이 바로 델트였다.
라그니스를 납치하기 위해 무려 비룡 두 마리에 비룡 조종사, 그리고 준 기사에 다다르는 인물 넷을 동원하여 변방의 촌동네에서조차 완벽을 기리던 인물.
비록 놈 때문에 낙하산 없는 스카이 다이빙을 해야하기도 했지만...날 죽음 언저리에서 발버둥치게 만들었다고 놈에 대한 내 놀라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원래 고통없이 끝내주려고 사람의 목을 베는 것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 게 그 놈이니까.
절대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일격을 받아들이는 델트의 눈동자는 지금도 되새겨 보면 알 수 없는 오싹함이 있다.
1초도 안되는 시간 사이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결국 체념이 아니라 납득하며 받아 들이는 그 눈은, 적임에도 불구하고 존경할 수 밖에 없게끔 만드는 힘이 있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라그니스의 반대쪽에서 활동했을까 많은 궁금증이 뒤 따라왔지만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묵혀뒀을 뿐이다.
그 사건은 나로 하여금 기습의 우위를 맹신하게 만드는 계기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방심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계기였다.
갑자기 왜 기억을 되새김질 하고 있냐고?
혼자서 궁상맞게 카페에 앉아 이것저것 회상하다보니 갑자기 튀어나오더라. 그러다보니 아침부터 칼부림을 나게 만들었던 그윌브와 라그인가 하는 놈들과 연관되어 대체 이 세계의 강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건지 고찰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마력을 다루게 된 뒤로는 큰 문제 없이 지내고 있다. 물론 며칠 전에 마족놈들이랑 싸우면서 간만에 아슬아슬했지만...그건 다행히도 상정 내의 싸움이었다. 한 번 검 휘두를 때마다 죽음의 위기가 오고가는 위협적인 상황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결국 내가 진정으로 상정 외의 상황을 맞닥드렸던 것은 델트 놈이 준비했던 이중 함정 때 말고는 없다.
지금이야 굉장히 스무스하게 지낸다고 하지만 결국 마족령에 쳐들어가든 뭘하든 내 고향 파괴범을 죽이기 위한 모험의 날은 다가온다. 그 때도 지금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보니 솔직히 나보다 압도적인 강자를 최대한 안전한 상황에서 만나보고 현재 내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근데 그게 제일 해결하기 어려운 듯.
에카프 경이나 라드넬반데스하고 겨뤄볼 기회라도 있다면 좀 도움이 될 같은데, 다들 바쁘기 그지없는 몸이라서 감히 내가 어떻게 비벼볼 수가 없다. 심지어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좀 날고 긴다 하는 기사들도 일 대 일 대련을 해줄 정도로 여유롭진 못하다보니 내 욕구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내 팔자야..."
창 밖을 슬쩍 바라보니 내가 카페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열성종자들이 기웃거리는 게 훤히 보였다.
아니, 쟤들은 수업도 없나? 학생의 본분은 수업이지 아이돌을 스토킹하는 게 아닌데.
라그니스가 마법 수업을 추가적으로 들으면서 홀로 남겨진 나는 처음 아카데미에 왔을 때 추천 받았던 카페에 와서 커피와 디저트를 먹는 중이었다.
딱히 이게 먹고 싶어서 그런건 아니었다. 그저 제국에서는 이렇게 혼자서 차를 마실 때 그 흔한 책이나 신문조차 읽지 않으면 무언가 상념에 잠길 일이 있다고 여겨서 가만히 내버려두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지크 놈에게 주워들을 수 있었고, 나는 마침 나의 광기어린 추종자들에게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던 것 뿐이다.
그 때, 가게의 문을 열고 정체불명의 백발 소녀가 너무나도 당당한 걸음걸이로 즉각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걸음 걸이만 봐도 귀족이라는 걸 모를 수는 없었는데 어차피 여긴 아카데미니까 귀족은 흔하다.
백색증에 걸린 것처럼 새하얗다못해 투명하게 느껴지는 백발이나 새하얀 피부도 딱히 놀랄 건 없었다. 황금빛 눈동자라는 건 무슨 중2병 넘치는 분위기인가 싶지만서도... 이세계엔 더 특이한 것도 많다. 전생에서도 호박색 정도의 눈은 색소에 따라 얼마든지 존재했으니 여기라고 놀랄 것은 없지. 저렇게 예쁘게 빛을 띄는 게 조금 신기한 정도다.
그리고 그 모든게 합쳐져서 정말 작은 인형마냥 귀여운 외형을 이루고 있는 것도 흔하진 않지만, 이 역시 놀랄 건 없다. 난 무려 엘프와 5년 넘게 동거한 남자다. 어지간한 미모로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문제는 저 시선이었다. 처음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날 발견하고 마주한 시선을 보자마자 본능이라는 놈이 작게나마 경종을 울렸다.
사람을 뼛속까지 분석하는 지극히 계산적인 눈. 겉보기엔 12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저건 결코 애가 가질 수 있는 눈이 아니다. 못해도 성장이 좀 더딜뿐이지 외형보다는 나이가 들었을 것이고, 사람을 다루는 위치에 있는 게 분명하다.
거기까지 판단을 마친 나는 여전히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다가오는 소녀에게 덤덤히 물었다.
"케이크 좀 드시겠습니까?"
"으, 으응?"
"저에게 뭔가 말할 게 있으셔서 다가오신 거 같은데, 혼자서 먹고 마시는 것도 좀 그래서요. 아니면 음료라도 드시겠습니까?"
"그, 그런가? 그...렇다면 음료와 케이크를..."
뭐지? 우물쭈물 거리는 모습에서 방금전까지의 시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착각한건가? 그냥 소녀에 불과한건가?
조금 종잡을 수 없는 상태였으나 일단 평범한 소녀일 경우 내게 위압감을 느낄 수도 있는 만큼,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배웠던 집사의 경력을 이용해 에스코트 해주었다.
신장 차이만 무려 50에 육박한다. 정말 애라면 자기보다 단순히 큰 상대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런 해외까지 와서 어린 귀족 소녀를 울린 쌍놈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최대한 사근사근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빼내어 앉을 수 있게 도와주고, 메뉴에 대해 고민하기 전에 추천 메뉴를 알려주고, 거기에 어울리는 차까지 골라 주문을 마친 뒤 자리에 돌아오자 매우 의외라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녀가 있었다.
"뭐, 뭔가 매우 능숙하구나."
자연스러운 하대. 독특한 말투. 다른 건 몰라도 상당한 고위 귀족이겠지. 그럼에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몸가짐을 유지한다는 건...그윌브마냥 정신나간 귀족부심에 찌든 게 아니라 진짜 지위가 높을 가능성을 암시했다.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만 배웠습니다."
"...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아뇨. 죄송하지만 처음 뵐 뿐더러 사교계에도 밝지 않은 터라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나 할 법한 말투가 자연스럽게 입에 붙어있는 게 좀 심각하게 귀엽다는 건 알겠다. 할아버지 말투가 저런건가? 전생의 기억으로는 소설 속 왕족이라던가 드래곤 같은 존재가 여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지칭했던거 같은데, 제국 한 가운데에 드래곤이 활보하고 있을 리는 없고...왕족인 에셀루아가 금발이었으니 왕족도 아닐텐데 말이지.
뭐, 조금 높은 귀족일지 몰라도 황족과 드래곤만 아니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 그런가. 여가 누구인지 모름에도 이렇게 대우해주는 것인가."
"귀족 태생은 아니지만 기본 예절이라는 걸 못 배운 놈도 아닌지라."
"음. 태생은 중요하지 않느니라. 당장 제국만 하더라도 귀족의 탈을 쓴 백정만도 못한 이들이 지천에 널려있으니. 사람의 됨됨이란 그런 것에 묶이는 게 아니지."
쪼그마한게 맞는 말을 혀 한번 안 씹고 말하니까 너무 귀엽다! 이거 생각보다 제국의 미래가 밝은데? 지크 놈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너무 기특해서 조금 입 발린 칭찬을 곁들어주기로 했다.
"혜안이십니다. 과연 평민과 귀족 모두를 아우르는 아카데미가 존재하는 제국의 귀족이시군요."
"음...? 어떻게 알았느냐? 여를 모른다 하지 않았던가?"
"그야 교복을 입지도 않으셨으니 학생은 아니고, 용사를 만나기 위해 온 사절일 경우 수행원이 이 안까지 함께 했을테니까요. 무엇보다...밖에서 제 눈치를 보고 있던 학생들이 아가씨가 보이자마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던 소녀는 너무나도 귀엽게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창 밖과 나를 두어번 번갈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학생들이 거의 식겁하며 도망치듯이 사라진 상태인지라 대체 얘가 누구인지 나조차 조금 쫄리기 시작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런! 거기까진 생각 못했느니라. 그나저나 아카데미에 온지 겨우 3일 째라고 들었는데 벌써부터 추종자가 생긴게냐?"
"남을 가르치는 능력은 충분하지 못함에도 조금 과한 평가를 해주는 분들이 몇몇 생겨났을 뿐입니다."
"하핫. '남을 가르치는 능력은'이라! 과연. 용사를 이기고 루드라의 젊은 사자를 죽인 실력에 대해서는 겸손을 떨 생각이 없는 것이로구나!"
조금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내 말에서 의도를 캐치해내는 소녀를 보며 난 옅은 미소와 함께 확신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여간내기가 아니다.
벌벌 떨며 케이크와 차를 내온 종업원의 반응을 보아하니 상당한 권력이 있는 집안의 영애이리라. 이제 슬슬 누구인지 대놓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케이크를 보자마자 눈동자가 반짝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당장은 그냥 귀여운 동생 보는 기분으로 그 모습을 감상하기로 했다.
"혹시 알고 있느냐? 단 음식은 머리를 쓸 때 매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화를 삭히는 것 뿐만 아니라 생각을 맑게 해주는데도 꽤나 도움이 되는 편이라고 하더구나."
포도당이 뇌의 연료와도 같다고 했던가? 전생에서 분명 한 번 정도 주워들었던 지식이었지만 여기서 말할 수는 없으니 작게 웃으며 적당히 대답했다.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도 머리 쓸 일이 많을 때 항상 단 것이 먹고 싶어지는 것을 보면 사실일 것 같군요."
"실로 그렇느니라. 여도 업무를 처리하다보면 한 시간이 멀다하고 케이크를 찾아서 큰일이지."
오늘은 아직 먹지 않았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좋구나! 라며 호기롭게 케이크를 먹는 소녀의 입맛에 케이크가 맞을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아하니 그리 심각하게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는 아닌 듯 했다.
솔직히 햄스터처럼 오물거리며 한가득 먹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소녀는 고풍스럽기까지 한 식사 예절을 지키며 조금씩 케이크를 잘라 먹었다.
아쉽다...너무 아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