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뮈에. 이것도 드셔보시지 않겠습니까? 초콜릿과 과일을 같이 곁들인 덕에 단맛이 뒤 끝까지 늘러붙지 않고 상큼하다며 평가가 좋은 케이크 중 하나 입니다."
"그, 그럴까? 근데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닌지..."
"에스뮈에."
"으응?"
메뉴판을 두고 지진을 일으키는 에스뮈에를 확신과 힘있는 목소리로 부른 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설득했다.
"가끔씩은 이런 날도 있어야 업무로 날카로워진 몸과 마음도 휴식을 취하고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구마저도 하루도 빠짐없이 혹사시키면 망가지기 마련인데 사람의 몸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 그렇겠지? 엘드미아 그대는 말을 참 설득력있게 잘하는구나. 심지어 실로 타당하기 그지없어."
내 이름은 엘드미아 에가.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고 마는 남자.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목적을 달성했지.
자신을 에스뮈에라고만 밝힌 소녀의 가드는 상당히 단단했지만, 난 기어이 그 가드를 분쇄하고 햄스터마냥 케이크를 먹는 귀여운 생물로 재창조해냈다.
와. 세상에. 힐링물이 따로 없네. 부모들이 자식에게 음식을 먹이는 마음이 이런건가? 어쩜 저렇게 오물오물 잘 먹지? 지금까지 저렇게 먹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격식을 차려가며 식사를 해왔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지구에서 얘 데리고 먹방 컨텐츠 찍었으면 백만명은 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혹여라도 쌓여있는 케이크 접시를 보면 정신을 차릴까봐 그때 그때 치운 접시만 벌써 10개가 넘어갔다. 그 사이 알게 모르게 편하게 말을 하게 된 에스뮈에가 여전히 처음 케이크를 먹는 아이처럼 다음 케이크를 기다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즐겁기 그지없구나! 이렇게나 말이 잘 통할 줄이야. 루드라의 젊은 사자를 명예를 위해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참 아찔했는데 말이지. 솔직히 행동만 놓고 보면 기사의 귀감이라 해도 되지만, 그런 사람들은 꼭 어딘가 하나 씩 꽉 막혀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그렇게 처음 봤을 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일까. 난 그녀를 향해 경종을 울렸던 본능을 쥐어팬 뒤 구석에 짱박아두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죽음 없이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에 매긴 값어치가 터무니없이 높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실로 그러하다. 제 아무리 루드라의 차기 마법기사단장의 재목으로 인정받는다 한들 타인의 명예를 무시하고 짓밟을 수는 없는 법. 그러한 행동은 필히 상대가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 여기고 자신의 안위에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다는 허튼 확신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지.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능이요, 죽음으로 끝날 걸 예상했다한들 거기에 자신의 죽음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고의적인 모욕을 던진것이니 루드라의 입이 열 개가 있다 한들 그대를 책망할 수는 없을 것이니라!"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할까. 진짜 어디 길 가다가 만났으면 너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고 볼따구를 쪼물딱 거려주고 싶어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아직 에스뮈에의 나이를 듣지 못했으니 너무 심취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다잡았다.
"솔직히 그윌브의 심성만 놓고 봤을 때는 여러모로 걱정됐는데 에스뮈에가 그렇게 말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음. 여도 처음 보고 받았을 땐 두 눈을 의심할 정도였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느니라. 여러모로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인물임에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는 게 충격적이었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코를 찡그리는 모습까지도 앙증맞기 그지없는 에스뮈에는 내 예상을 훨씬 웃도는 속도로 빠르게 온 종업원이 내려놓은 케이크를 보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고보니 물어보는 게 많이 늦어버렸지만, 이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게냐? 수업 중인 레비엥 변경백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더냐?"
"제국에서는 혼자 차를 마시고 있으면 나름의 사색을 하고 있다고 여겨 다가가지 않는 분위기더군요. 저를 따라다니는 분들을 피해 숨 좀 돌리고 있었습니다."
"으으음...아카데미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만든 맹점이로군. 허나 제국이 추구하는 바의 일환이기도 한 탓에 뭐라 제재를 가할수도 없는 점을 이해해주었으면 하는구나."
마치 자신의 잘못이라는 듯이 말하네. 혹시 아카데미 이사장 같은 사람의 직계인걸까? 그래도 케이크는 잘 먹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에스뮈에가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앗! 그러고보니 이게 목적이었는데!"
"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당초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말았도다!"
당초의 목적...?
에스뮈에에게 케이크를 햄스터처럼 먹게 만드는 게 목적이지 않았...아, 이건 내 목적이었군.
"그대에게 사과와 더불어 확답을 하기 위해 온 것이었네! 그런데 케이크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니, 말도 안되는 실책이로고!"
어지간히도 부끄러운건지 에스뮈에는 그대로 우왕좌왕하며 호들갑을 떨다가 남아있는 케이크를 호다닥 먹어버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자세를 바로 잡았다. 방금 나온 케이크인데도 맛을 음미할 틈도 없이 갑자기 먹어버린 것으로 미루어볼 때 정말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그래도 덕분에 정말 햄스터처럼 입안의 케이크를 오물거리는 에스뮈에를 보게 되었으니 난 지극히 만족스럽다.
그렇게 한참을 씹어 겨우 케이크를 다 먹은 뒤의 에스뮈에는 분명 처음 봤을 때처럼 냉철해보였지만, 이미 부끄러움 때문에 빨개진 얼굴은 어쩔 수 없어보인다. 본인 스스로도 그걸 인지하고 있는지 숨을 조금 고르면서도 우물쭈물거린 에스뮈에는 한참 뜸을 들인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제국은 사절로 방문한 레비엥 변경백과 그대를 모욕한 루드라의 젊은 사자의 행동에 매우 유감을 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식 문서로 전달되어 외교관을 통해 직접 루드라에 전달된 상태이니라. 당장은 구체적인 보상을 약조할 수 없으나 결코 가벼이 넘기지 않을 것이니 부디 여를 믿고 기다려줬으면 하는군. 이번 사태에 대해 제국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으며, 결코 이를 가벼이 넘기지 않을 것이야. 그 점은 여의 이름을 걸 수 있느니라."
"아...예...알겠습니다. 그보다 좀 급하게 드신 거 같던데 차라도 한 잔 더 마시시겠습니까 에스뮈에?"
"여, 여의 이름을 걸고 약조까지 하겠다는데도 굉장한 반응이구나 엘드미아여."
정말 엄청나게 신기한 생물을 본다는 듯 벙찐 표정을 짓는 에스뮈에를 보아하니 이건 짚고 넘어가줘야만 할 거 같다.
"음...에스뮈에? 제가 우리의 짧은 만남을 통해 당신한테 아무런 악 감정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으, 으응?"
"친애의 의미로 하는 말이니 결코 곡해하거나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시길 바라는 마음에 미리 운을 좀 띄우는 겁니다. 사실 사람의 말이라는 게 받아들이기 나름이라지만..."
"무, 물론이니라! 이미 그대와 이리 대화를 나눈 마당에 오해라니, 당치도 않지. 무슨 말을 하려는겐가?"
"에스뮈에. 처음에도 말했지만 전 당신이 누구인지, 직위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으응?"
"비록 당신에게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지시겠지만, 타인이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방금 전의 약조같은 것을 들었을 때 느끼는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더없이 진중하고 진지하게 웃음기를 싹 뺀 상태로 확실하게 말해주었다.
아무리 사상적으로 바람직하고 생각이 깨어있다하더라도 저런 자세는 좋지 않다. 자칫 잘못해서 삐뚤어지면 그윌브같은 천하의 몹쓸 놈으로 커버린다. 그랬다간 착하고 바르게 자랄 줄 알았던 딸이 반항아가 되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끔찍한 결과가 나와버린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다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먼저 제대로 소개하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확실히 해둬야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반응이 나오더라도 침착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비록 그녀의 양친 중 누군가가 아카데미의 이사장을 맡고 있든 다른 무언가가 뭐가 되었든 간에 그건 변하지 않는다.
"여, 여가 그대에게 제대로 된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았었...구...나..."
그제서야 자신의 실책을 확실하게 인지한 에스뮈에의 얼굴이 정말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난 웃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고 바로잡으려하는 아이를 보고 웃는 건 교육에 좋지 않으니까. 오히려 칭찬해줘야 마땅하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비록 스스럼없이 다과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하려 한다면, 그 부분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게 맞겠지요."
"시, 실로 타당하도다. 그야말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로구나. 한 평생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거늘..."
그야 몇년 되지 않았을테니까요 라고 말하며 웃어버릴 뻔 했다. 요 쪼그마한게 말투는 정말 애늙은이가 따로 없다. 어쩌면 아실리에가 날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기분이 이런 걸까? 전생에서도 애가 귀엽다고 느껴본 적은 없는데 너무 귀엽네.
"제, 제대로 다시 소개하겠느니라!"
"좋습니다! 비록 앞의 실수로 인해 쑥스러우시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입니다! 그걸 딛고 일어날 줄 알아야 진정한 성장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그러하...지만. 으으. 한 두번 해 보는 것도 아닌데 정말 말도 안되게 부끄럽구나."
다시 후하 후하 거리며 심호흡을 마친 에스뮈에가 우물쭈물하며 주저하는 동안 난 조금도 독촉하지 않고 그저 옅게 웃으며 기다려주었다. 마치 아이의 학예회 발표를 보는 기분으로. 한없이 여유와 자애가 넘치는 자세로 그녀가 준비될 때까지 난 똑바로 마주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어 자기소개를 시작했을 때.
"여는 제국을 다스리는 위대한 13대 황제 판 크라시 비스팀 텔 누아의 첫 번째 자식이자 그 분의 곁에서 그분의 뜻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는 제국의 하얀 별, 에스뮈에 비스팀 텔 누아이니라."
난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로 등 뒤에 폭포처럼 흐르기 시작하는 식은 땀을 느껴야만 했다.
좆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