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하고도 하나의 엘드미아가 대뇌의 전두엽 속에서 역사에 없을 초유의 대회의를 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씨발 쓸모 없는 것들이 좆됐다만 외치면서 사방팔방 뛰어다니기 바쁘다는 점이다!
"여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업적과 명예를 걸고, 이번에 이행된 명예로운 결투에 대해 루드라 왕국은 그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못하게 만들겠느니라."
그러는 와중에도 에스뮈에는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아니 진짜? 농담이 아니라...아니지! 이건 현실도피다! 그 어느 정신나간 인간이 제국의 수도에서 황녀를 사칭해!
"그러니 엘드미아여, 우리가 비록 이 짧은 만남을 통해 제대로 된 신뢰를 쌓지 못했다고는 하나 부디 여가 아닌 제국의 이름을..."
순간. 1초를 수백번 쪼갠 듯한 정말 찰나의 순간. 머릿속에서 단 한 명의 초천재 엘드미아가 외쳤다.
-안 된다! 황녀가 침착함을 유지하게 만들면 안돼! 처형 당한다! 화형 당한다!
-황녀를 햄스터로 만들려고 했다는 걸 들키면 오체를 분시 당할거야!
-공격이다! 답은 공격이다! 정신없이 휘몰아쳐서 이 상황을 모면해야만 타이밍을 놓친 황녀가 죄를 묻지 못할 것이다!
초천재 엘드미아의 주장은 모든 엘드미아들에게 전염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곧 나지.
으아아! 존나 맞는 말인 거 같아서 몸이 반응한다!
"아뇨. 에스뮈에."
"믿...어?"
"전 제국을 믿지 않겠습니다."
"제, 제국을 믿지 않는다고?"
나를...그렇게 바라보지마... 그 얼굴로...자신의 집을 부수는 사육사를 바라보는 비버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마! 난 그런 잔학무도한 악인이 아니라고!
"저에게 제국은 오히려 에스뮈에보다 낯설고 생소한 곳입니다. 전 한 평생 이티스엘의 변경에서 살다가 최근에야 수도에 왔으니까요."
"그, 그렇느냐? 그건 또 몰랐던 사실이로구나."
"그러니까 저에겐 제국보다 에스뮈에 한 명에게 더 신뢰가 갑니다."
"믓?!"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정신 못차리는 건 맞는 거 같다!
"전 에스뮈에를 믿겠습니다."
"...자, 잠깐. 시, 심장이..."
입을 살짝 벌린 채 잠시 멍 때리던 에스뮈에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는 모습에 그녀의 심장이 어떤지는 몰라도 난 오장육부가 죄다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에? 무...지병이라도 있으신겁니까?"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뭐요? 가 튀어나올 뻔 했네. 안그래도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난폭해질 것만 같은 상황에 자꾸 변수를 끼얹지 좀 말아주십시오 신이시여!
진짜 어디 아픈 건가? 아니, 이대로 에스뮈에가 쓰러지면 진짜 단두대 확정인데? 황급히 일어나서 다가가려고 하자 작은 두 손이 허공에 휘적여지며 다급한 에스뮈에의 외침이 이어졌다.
"후! 후아! 여, 여의 심장은 아주 건강하다! 그저 자, 잠깐만 기다려주었으면 하느니라!"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에스뮈에. 아프신 게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이제는 저 맨들맨들한 이마부터 귀끝까지 시뻘개져서 정말 괜찮은 게 맞나 손발이 덜덜 떨리는 기분이었지만 난 초월적인 인내심으로 미소를 유지한 채 태연한 것마냥 찻잔을 들어 차를 들이켰다.
무슨 맛인지 느낌도 안 온다. 전투만 스펙타클한 거로 충분하지 않나? 어떻게 일상까지 이렇게 스펙타클해져야만 하는거지? 혹시나 나를 황족 능멸 같은 죄목으로 신고할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열심히 눈동자를 굴려보았지만 카페엔 우리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종업원과 주인마저도 아까부터 우리가 주문을 하기 위해 기척을 낼 때가 아니면 대체 어디에 숨어있는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은 어딘가에 틀어 박혀있는 상태다.
그 반응을 보고 조금 더 빨리 눈치 챘어야했는데...! 지크 놈이랑 그 일행이 왔을 때조차 개뿔 신경도 쓰지 않던 이들이었다. 그렇게까지 경기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왜 감을 잡지 못했을까!
"......그대는 심장에 안 좋은 인물이니라."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그래. 제국이 아니라...그저 여를 믿는다는 이야기렷다..."
일천 하고도 하나의 작은 엘드미아들아! 살았다!
에스뮈에의 입꼬리가 씰룩이며 귀로 다가가려는 것을 보아하니 저 사탕발림에 불과한 멘트가 제대로 먹힌 게 분명하다! 심지어 딱히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어떻게든 잘 무마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1 황녀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의외로 칭찬에 약하네!
"꽤, 꽤나 능글맞은 화법이 아니냐? 괘씸한지고. 대체 얼마나 여자들을 홀리고 다니는 게냐?"
"그저 평범한 사실만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검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평민의 삶에 대수로울 게 어디있겠습니까."
"...그, 신분은 아까도 말했지만 아무것도 아니니라. 당장 용사만하더라도 평민이지만 얼마든지 작위를 받을 수 있고, 제국에도 그런 경우는 심심치 않느니라."
조금 열기가 가라앉는 것 같던 에스뮈에의 얼굴이 다시금 서서히 가열되는 듯하며 그녀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그, 드물지만 전시에 공을 세워 공작위까지 올라가 왕실과 여, 연을 맺은 자도 역사에 있느니라.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만을 단순히 영위하는 것보다는 그런 이들이 훨씬 빛나는 가치를 지닌다고 여는 생각하느리라."
"실로 혜안이십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이제보니 제국 귀족에 어울리는 생각인 것을 넘어서 황녀로서의 품격이었던거군요."
"그, 그만하거라! 새삼스럽게도 부끄럽기 그지없구나!"
그러면서도 입꼬리는 꾸준하게 올라가는 에스뮈에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난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
엘드미아와 그 뒤로도 수 십분을 더 담소를 나눈 에스뮈에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뮈에."
자신이 제국의 황녀, 그것도 사실상 차기 황제의 자리에 있는 1 황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엘드미아의 행동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에스뮈에를 이름으로 불렀고, 여전히 케이크와 차를 권했으며,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모든 경험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아서 에스뮈에는 아직도 심장이 미친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심장이 터져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근거리는 터라 숨 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사실 좀 더 있고 싶었음에도 먼저 일어난 이유 역시 거기에 있었다. 계속 있다간 한 번 쓰러질 거 같았다.
마치 몇 날 며칠을 이야기한 기분이었지만 정작 흘러간 시간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지루한 업무를 처리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에 새로워하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에게로, 마부석에서 내린 올렌드가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에셀루아는 어디있는지 아느냐?"
"레비엥 변경백이 현재 수강 중인 수업을 같이 듣고 있습니다. 십 여분 정도 남았습니다."
"에셀루아의 숙소로 가겠노라. 언질을 넣어두도록."
허리를 숙이며 마차의 문을 열어 에스코트하는 것으로 능숙하게 대답을 마치는 올렌드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른 에스뮈에는 마차 문이 닫히고 나서야 긴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조용히 굴러가는 마차 바퀴의 규칙적인 소리를 들으며 안색도, 얼굴도 침착함을 찾기 시작한 그녀였지만 심장만큼은 여전히 평범하지는 않은 속도로 뛰는 중이었다.
'다음에 언제 만날지 약속을 잡아놨어야 했는데!'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에 에스뮈에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 놓여있던 쿠션에 주먹질을 했다. 하지만 주먹질을 하는 와중에도 연신 귀에 걸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 하는 그녀였다.
온 세상이 꽃밭으로 보이고 말도 안되는 행복감이 퍼져왔다. 대체 이렇게 즐겁고 편안한 대화가 몇 년만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형제 자매들과는 서로가 바쁠 뿐더러 대외적으로 가장하고 있는 관계도 있다보니 제대로 만나려면 이런저런 핑계가 있어야 한 번 볼까 말까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지금 에셀루아를 찾아갈 수 있는 이유도 용사와 엘드미아의 대련과 그들의 첫 만남이 썩 유쾌한 형태는 아니었다는 것을 빌미 삼아 가능한 일이었다.
그 외엔 모두 정적이거나 수하들이었다. 황제의 위치란 그런거라고 수긍하고 지내온 나날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타고 난 스스로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살아왔을 뿐이었다.
오늘의 만남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다시금 엘드미아와의 대화를 하나하나 되새기며 헤실헤실 웃는 와중에 마부석과 연결된 창이 열리며 올렌드가 질문했다.
"정보원의 처우는 결정하셨습니까?"
"응?"
그러보니 그런 게 있었지. 처음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 담긴 문서였으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루드라 왕실과 귀족원 내에서 정보 통제가 심하게 이뤄진 게 화근이니라.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이니 뭐라 할 수는 없지. 평민들에게서 정보를 얻도록 개선하라고만 전달하도록."
"...그의 성격상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여는 개선하라 하였느니라. 그걸 이해 못 할 정도로 무능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룰 뿐."
"...확실히 전달해두겠습니다."
나무로 된 창을 닫는 짧은 사이, 다시금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씰룩이는 에스뮈에의 모습을 살짝 확인한 올렌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페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주인은 더 할 나위 기분이 좋아 보였고, 그렇다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흐트러짐이 생기지도 않았으니 그에겐 그저 모든 게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