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주변이 생각보다 조용하네? 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눈치를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수업을 마치고 카페로 온 라그니스가 올려묶었던 포니테일을 풀며 간단하게 음료를 주문한 뒤 건넨 첫 마디였다.
확실히 에스뮈에가 다녀간 뒤로 인근에 결계가 펼쳐진 것마냥 발길이 뚝 끊긴 건 사실이지.
"아까 황녀가 다녀갔거든. 그래서일지도."
"황녀...? 에셀루아라면 나랑 같은 수업을 들었는데."
"말고. 1 황녀 에스뮈에가 방문했어."
"1 황녀?!"
그건 내가 지금까지 라그니스를 봐오면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오이를 보고 놀란 고양이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마치 자신이 앉으려던 의자에 에스뮈에가 앉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 뛰어오르는 그녀의 반응에 난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쟤 저렇게도 움직일 수 있었구나?
"대, 대체 무슨 이유로 철혈 황녀가...아니지. 루드라의 개새끼가 그 난장판을 벌여놨으니 직접 나선 게 이상하진 않나?"
"잠깐. 철 뭐? 철혈?"
얘가 지금 남의 햄스터한테 무슨 해괴망측한 괴명을 붙이는거지? 내가 아는 철혈말고 다른 귀여운 무언가를 지칭하는 동음이의어가 있었나? 말투가 좀 특이한 거 빼고는 그 어디에서도 철혈이라 불릴만한 껀덕지가 없었는데?
그런 내 의문과는 달리 마치 모르는 게 당연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다시 자리에 앉은 라그니스가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모습은 마치 주변에 누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기라고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겨우 18세임에도 제국 내에서 황위 계승의 기반을 거의 다 다져버린 괴물 중의 괴물이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익히지 못한 검술을 제외한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일 뿐더러, 당시에 늙은 뱀이라 불리며 오랜 시간 권력을 유지해왔던 제국의 고위 귀족들마저도 숙청을 통해 씹어 먹으며 기틀을 다졌거든."
에...?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표면으로 알려진 게 4년이었나? 실제로 어땠는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지만 실상 황제의 자녀들이 한 두명이 아니고 사이조차 안 좋은데도 2 황자를 제외한 누구도 그녀의 계승에 토를 달지 못하는 게 현황이야. 그렇게 되기까지 꽤나 폭군적인 성향을 보여줘서 붙은 별칭이 철혈. 실상 그녀가 15살이 되던 해부터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으니...이제와서는 모습만 드러내도 귀족들이 알아서 숙일 정도야."
라그니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내용들이었다. 숙청? 폭군?
조금만 실수해도 부끄러워서 벌개지고 버벅이고 심장 졸여하면서도 칭찬에는 사족을 못 쓰는 작은 케이크 몬스터 햄찌가...?
"우, 우리 햄찌가 그럴 리 없어..."
"햄찌는 또 뭔...잠깐? 너 뭐라 그랬어? '우리'?"
갑자기 또 눈에 불을 켜는 라그니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몸을 좀 뒤로 빼며 그녀가 수업을 듣는 사이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래봤자 케이크를 도륙하며 즐거운 담소를 나눈 뒤 그윌브 건에 대해 약조를 받은 것에 불과한 간단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라그니스의 표정이 전혀 단순하고 간단하지 못하다.
"철혈 황녀에게...어느 미친 놈이 작업을 걸어...!"
"아니 세상에. 남들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시네요. 작업이라뇨. 저희는 즐거운 다과회를 가졌을 뿐입니다만?"
물론 그녀의 나이가 나보다 한 두살 많은 게 아니라 무려 3살이나 많다는 건 적잖은 충격이었지만, 그래봤자 결국은 애에 불과하다.
비록 그녀가 겉보기와 달리 귀족계의 숙청 생활을 향유해 온 네츄럴 본 음모의 여황제이긴 하지만...아무튼 귀여운 꼬마애다.
"좀 평범하게 지내면 안 되니 엘드미아? 어떻게 가는 길마다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아?"
"아니...이게 또 마냥 제 탓이냐고 하면..."
"그럼 내 탓이리?"
"아니...생각해보니 정말 제 탓이 맞긴 한데..."
생각해보니 진짜 그렇네.
어찌보면 용사에게 이기라고 말한 라그니스가 사건의 발단이었다고 우길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거 없었어도 당시의 지크 놈 싸가지를 봐서 난 기를 쓰고 이기려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긴 탓에 루드라의 똥개가 달라 붙었고, 그 놈 역시 개과천선한 평행세계의 똥개가 아닌 이상 내 손에 죽었겠지.
"하다못해 상대방이 황녀인 걸 몰랐을 땐 그렇다고 쳐. 그래도 본인인 줄 알았으면 달리 반응이라도 했어야지!"
"아뇨. 선생님 그건 아닙니다. 전 제 개쩌는 선택으로 인해 살아남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거든요."
다른 선택지였으면 그간 내가 날려왔던 적들의 목마냥 내 목이 단두대에서 잘려나갔을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양보 못했다.
"하아아....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실리에 씨는 대체 어떻게 널 6년이나 키운거지?"
"사랑과 애정으로...?"
괜히 말했다가 정강이만 걷어차였다. 진실을 말하면 고통받는 세상이라니. 전생과 다를 바 없군.
"...후우. 정말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철혈 황녀가 너한테 아무런 악감정도 가지지 않고 떠난 건 사실이라는거네."
"정신 연령 30세를 초월한 엘드미아 에가의 기가 막힌 처세술로 오히려 호의를 쌓고 갔지."
"......엘프면 몰라도 차기 황제라니 너무 심각한데 진짜..."
"응? 뭐라고?"
"나, 남의 혼잣말을 왜 듣고 그래!"
"아악! 지, 지가 좀 크게 말해놓고서 걷어차는 게 어딨어!"
"시끄러워!"
뭔진 몰라도 분위기 상 괘씸죄로 정강이를 걷어차인 나는 결국 폭력에 굴하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크윽...원통하다.
"그래. 아직...아직은 모르는 일이지."
자꾸 혼자 되내이며 정말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되새김질하는 듯한 그 모습에 대체 뭘 저리 고민하나 궁금했지만 느낌상 괜히 정강이만 까일 거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자, 드디어 생각을 마친 것인지 라그니스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방금전에도 말했지만 일단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니까. 그 발언은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아무리 너에게만 말했다한들 그녀가 그렇게 가벼운 인물도 아니고. 이번 루드라의 문제는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매우 예상치 못한 수확이 될 거 같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그니스는 다른 고민이 있는 것처럼 그다지 밝은 표정을 짓지는 못했다.
뭐냐고 정말.
◈
제국에서의 셋째 날은 에스뮈에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은 탓인지 그 후로는 별 탈 없이 흘러갔다. 심지어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는 소문이 퍼진 것만으로도 나는 매우 편한 하교를 만끽할 수 있었다.
"푸하하하핫! 동생! 형은 동생만 믿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요 새끼 요거!"
"제국에 온 뒤로는 하루도 평범한 아침을 맞이하질 못 하는군요. 왜 아침부터 지랄이 재발하셨습니까."
넷째 날은 귀신같이 달려와서 내 등을 치며 함박웃음을 짓는 지크 놈 때문에 어김없이 폭풍전야의 조짐을 느끼며 맞이했지만 말이다.
"너 어제 그 마빡귀신 만났다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에스뮈에의 새하얗고 맨들맨들한 이마가 떠올랐지만 놈의 노림수가 뻔했기에 난 짐짓 모른 척 대꾸했다. 이마빡이라는 단어를 쓰긴 써도 그걸 마빡으로 줄여 부르는 건 순전히 이놈이 전생자라서 그런 것인지라 반응하면 큰일난다.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빡은 또 뭔데요?"
"아! 이마 말한 거야 이마. 에스뮈에 황녀랑 만났다며."
"지금 에스뮈에 황녀를 그...마빡귀신이라고 부른겁니까?"
와 이놈 진짜 노빠꾸네. 얘는 실제로 황제조차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 아닐까? 근데 내 반응에 오히려 놈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는 듯이 끌끌 거리며 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흐흐. 평소라면 나도 그렇게 못 부르지. 근데 스스로 아카데미의 규율 안에 기어들어온 이상 녀석은 마빡귀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예?"
이건 또 뭔 소리야? 제국인은 아카데미에 방문한 것만으로도 평등 원칙의 규율이 적용되나?
"아무튼 형은 동생만 믿어! 겨우 나흘 밖에 안 남았다는 게 너무 슬플 정도야! 너 진짜 그냥 제국에서 나랑 같이 살지 않을래?"
"제발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제가 왜 사내 새끼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겁니까."
진짜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씨발.
"하. 아깝다 아까워. 뭔가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별 수 있겠냐. 형은 오늘을 즐길 줄 아는 남자니까. 아쉬움을 미뤄두고 남은 나흘을 즐겨야지."
"대체 무슨 소리를..."
"바로 저 소리지!"
키도 나보다 작으면서 거침없이 어깨 동무를 걸치는 지크 놈의 손이 방금 내가 지나 온 아카데미의 정문을 가리켰다. 놈의 손가락을 따라 바라본 정문에는 딱 봐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학생들과 더불어 굉장히 비싸보이는 마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제, 제1 황녀님의 마차야!"
"황녀님이 아카데미에...?"
"누, 누가 죄를 지은게 분명해!"
마지막 반응은 대체 뭐냐? 진짜 그런 이미지라고? 햄찌가?
그렇게 천천히 들어와서 멈춘 마차를 바라보며 지크 놈은 정말 꿀밤을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즐겁게 웃었다.
"크흐흐흐 망할 마빡이같으니. 너 어제 루드라의 또라이를 명예살인 했다며?"
"제발 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주시죠. 또라이는 또 뭡니까? 명예를 위한 결투를 하긴 했지만 명예 살인이라니. 대체 어디서 그런 해괴한 어휘가 튀어나오는 겁니까?"
진짜 이 놈하고 대화하면 쓸데없이 정겨우면서도 일일이 반응해야하는 게 너무 귀찮다. 하지만 이젠 별로 개의치도 않아하며 지크 놈은 이어서 말할 뿐이었다.
"뭔 소린지 이해만 하면 된거야. 형하고 대화하면 이런 경우가 자주 있을테니 그냥 그러려니 해. 아무튼 그 또라이가 초유의 사태를 유발한 덕에 저 마빡귀신이 머리 끝까지 화가 났거든. 이야. 진짜 어제 네가 그 모습을 한 번 봤어야 하는데. 콩알만한 게 무슨 금방이라도 머리카락을 거꾸로 곤두세울 것처럼 화가 나가지고. 루드라의 사절을 그 자리에서 즉결처형 할 기세였다니까?"
멈춰선 마차의 문을 마부석에서 내린 근엄한 얼굴의 노집사가 열자, 매우 앙증맞은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내 너무 화려하지도 않지만 누가 봐도 격이 다른 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검보라색 염료로 짜여진 심플한 드레스에 금으로 된 치장품으로 포인트를 준 차림의 에스뮈에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앞으로 며칠 동안 계속 사절들이 올텐데 그딴 일이 두 번 일어나는 걸 방관할 바에야 자신이 직접 너와 동행하겠다더라. 저 마빡이가 하는 일이 엄청 많아서 그렇게 되면 주변 놈들 꽤나 힘들텐데도 찍소리조차 못하더라고."
"저랑 다닌다구요?"
"어. 너랑 다닌대. 깔깔깔. 쟤 성질머리가 어떤지 내가 잘 아는데, 아주 피똥 싸는 기분일거다 진짜."
이 놈 진짜 즐거워 미친 것마냥 웃네. 그게 그렇게 웃기나? 그보다 어제는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공식적일 때는 또 다르려나?
집사에게 가볍게 무언가를 지시한 그녀는 주변의 학생들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야할지 아니면 평범하게 등교를 해야할지 갈팡질팡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으로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무릎을 꿇지 않아도 불경함을 지적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학생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등교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옅게 미소 짓다가, 옆에 붙어있는 지크 놈을 바라보고 미간을 찡그리는 듯 하면서도 다시금 웃어보이는 그 모습을 보아하니 내가 취해야할 행동은 뻔했다.
"다시 뵙는군요 에스뮈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만남이네요."
"엥?"
웃다말고 넋을 놓을 것 같은 지크 놈의 어깨동무를 자연스럽게 풀며 내가 건넨 인사를 가볍게 받으며 에스뮈에가 대답했다.
"그렇게 되었느니라 엘드미아여. 말했듯이, 여의 이름을 걸었으니까 말이지."
"...엥?"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지크 놈만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이해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