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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81화 (81/412)

엘드미아가 아직 사흘 째 아카데미 생활 속에서 라그니스에게 정강이를 걷어 차이고 있을 때.

에스뮈에는 에셀루아와 일생 일대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언니. 무조건 같이 다녀야 해요."

"가, 같이?!"

처음 에스뮈에가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는 대수로울 게 없던 에셀루아였다. 애당초 에스뮈에에게 모든 사건을 보고하는 게 에셀루아였으니까. 그냥 으레 그렇듯이 즉위식을 하기 전에는 모든 형제자매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는 게 차라리 편하다는 계산 하에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니, 일을 핑계 삼아서 간만에 얼굴이나 직접 보려는 목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방에 들어서서 반가움의 포옹을 하기도 전에 세상 더할나위 없이 심각한 에스뮈에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굳어버리기도 했었다.

"에셀루아."

"예, 예. 에스뮈에 언니."

하지만 그녀가 심각한 얼굴을 붉히며 화두를 던졌을 때, 세상 더할나위 없이 심각한 건 에스뮈에가 아니라 자신이 되어버렸다.

"....나, 남자한테 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

"언니잠깐앉아서자세하게이야기해보시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역대급 사건에 대해 형제자매들과 장시간에 걸친 회의를 해도 모자른 상황이었지만, 무려 에스뮈에가 말하는 상대는 엘드미아 에가였다.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 에셀루아는 에스뮈에가 지니는 위치의 특성상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결코 접점을 만들기 쉽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 의미에서 화두를 던진 것인데 듣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고 있다니 눈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네. 언니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뭐겠어요?"

"시간...이지."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총명한 그녀였다.

"맞습니다. 시간. 오늘은 사후처리까지 하셔야할테니 실상 내일부터라 쳐도 나흘 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엘드미아 경은 아카데미가 끝나고 나면 벤데 후작이 마련해준 저택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것도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이 엮인 탓에 피로해서겠죠. 언니는 아카데미 내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남은 여가 시간까지도 사용해서 최대한 그와 친밀해지셔야 합니다."

근본없는 평민? 외국인? 그딴 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상대는 대련이었다고는 하나 용사인 지크마저 이겨 먹은 인물이고 에스뮈에는 역사에서나 대등한 존재를 찾아볼만큼 천재다.

그녀가 스스로 정한 반려를 두고 평가질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제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그래도 너무 갑자기 밀어 붙이면 쉬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비록 거기에 검술과 더불어 연애도 포함되지 않은 것 같지만...분명 첫 단추만 잘 꿰면 천재인 그녀의 언니는 모든 것을 알아서 잘 해결해나갈 것이다. 에셀루아는 이마를 탁 치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에요. 레비엥 변경백도 그를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은데, 그의 귀걸이. 그거 하이엘프의 수호부라면서요?"

"으, 으응. 그렇느니라."

"레비엥 변경백께 이야기를 살짝 들어보니 엘드미아 경은 어릴 때 마족들의 침공으로 사라진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합니다. 그런 그를 지금까지 먹여 살린 게 바로 그 엘프라네요."

장생종은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존재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인지 몰라도, 그들은 자신이 키운 애가 다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한들 계속 애로 보는 종족이 아니었다.

"엔티레가 보고 기겁을 하길래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알게 된건데, 보통은 연인에게나 해주는 거랍니다. 본인은 전혀 모르는 거 같지만 지금 학원에 있는 엘프들이 그에게 접근조차 안 하고 오히려 피해다니는 이유가 순전히 그거 때문이에요."

푸른 넝쿨 일족은 엘프 중에서도 유독 호전적인 부류라서 자칫 잘못하면 치정 싸움으로 목이 날아간다는 게 엔티레의 설명이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엘프들에게서나 통할 문제였다.

"즉 지금 언니에게는 잠정적 경쟁자가 벌써부터 둘 씩이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훨씬 긴 시간을 함께 해온 이들이."

"...그렇구나.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닌 게로구나."

"네. 이미 전쟁은 시작된 거에요 언니."

보기 드물게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던 에스뮈에의 두 눈에 투지가 불타올랐다가, 다시 시들해졌다.

"그, 그래도 하루만에 이렇게 달라붙으면 좀 꺼리는 감이 있지 않겠느냐...?"

"언니. 지크가 알려준 이야기 중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에스뮈에의 양 어깨를 강하게 쥐고 똑바로 눈을 마주하며 에셀루아가 말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하루만에 눈이 맞아 5일이라는 시간동안 큰 사건을 겪으며 사랑에 빠지고 결국 가문의 차이로 인한 비극적인 동반자살을 맞이했습니다."

"그, 그거 참 끔찍한 이야기로구나."

"이야기의 요점은! 하루만에 사랑에 빠지는 건 결코 이상할 게 없다는 게 아닐까요!"

에스뮈에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는 것을 확인한 에셀루아는 크게 만족했다.

"일단 루드라부터 시작해야 겠느니라."

"닿는데까지 도와드리겠어요!"

그렇게 엘드미아의 사흘 째 아카데미 생활이 끝나고,

나흘 째가 시작되었다.

에셀루아는 진심으로 지크프리트를 사랑했지만, 가족의 연애사를 공유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랬기에 지크프리트는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주해야만 했으며, 그로인해 세상이 매우 불합리하게만 느껴지는 중이었다.

물론...그가 그리 여길 자격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야이씨. 마빡이. 너 나한테는 그렇게 개차반처럼 굴어 놓고 장난하냐?"

"여는 그대에게 개차반처럼 군 적이 없느리라."

"마빡이 진짜 혼나볼래?"

"제발 좀스럽게 굴지 말고 예의를 좀 차리십시오 용사님. 친구끼리도 지켜야할 선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하물며 친구조차 못 되는 분이 도대체 어쩜 그렇게 뵈는 게 없습니까?"

"그, 그렇느니라! 역시 엘드미아 그대는 옳은 말을 참 잘하는구나!"

어떻게든 귀에 걸리려는 입꼬리를 부여잡으며 키 차이가 40cm 가까이나는 엘드미아에게 에스코트 받겠다고 팔짱을 낀 채 싱글싱글 행복해하는  에스뮈에의 모습에 지크프리트는 그만 뒷목을 붙잡고 말았다.

[이미 정실에 첩까지 두고 있으면서 대체 왜 그렇게 저 둘의 연애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거냐? 심지어 너는 저 소녀에게 아무런 욕정도 느끼지 않잖냐?]

아잇 씻팔 마빡이가 꼴받게 하잖아.

[야. 이건 내가 연애를 하고 못하고의 문제도 아니고 내가 쟬 보고 꼴리네 마네의 문제도 아니야. 마빡이 쟤가 누구랑 사귀든 그게 내 알 바냐? 쟤가 연애를 함으로써 날 갈구는 것만 줄일 수 있으면 내가 그 사람한테 가서 형이라고 절까지 해줄 수 있어.]

그나마 자신이 가진 최소한의 양심으로 주변 모두에게 개차반처럼 굴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쟤 별명이 괜히 철혈 황녀겠는가?

전생 후 아카데미에서 4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 황실에도 자주 들리고 에스뮈에와 대면도 자주 했지만 저 꼬맹이가 저렇게까지 진짜 꼬맹이마냥 좋아 죽으려는 꼴은 처음 봤다. 매번 볼 때마다 폴리모프한 드래곤 새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벌하기 그지없던 타고난 폭군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애다. 물론 정치는 더럽게 잘하니 마냥 폭군이라고 하기에도 미묘했지만.

쪼그만한 게 벌써부터 제국의 안정을 다지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며 히스테릭해지는 것이 안쓰러우면서도, 용사조차 아닌게 천재라고 모든 분야에서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니 괜히 괴롭혀주고 싶은 존재인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캥기는 건 제국이라는 국가 자체인거지 에스뮈에라는 사람은 딱히 하자가 없었으니까.

실제로 이런 저런 파견을 나갈 때마다 에스뮈에가 연루되었는지 확인하고 한번 씩 엿을 맥이긴 했다.

그게 좀 업보 스택이 쌓였기로서니, 겨우 하루 만난 엘드미아와 자신 간의 온도 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조금도 너무한 거 같지 않다만.]

[내가 그래도 임마. 제국을 돕고 황실을 도운 게 있는데! 내가 피만 안 이어졌지 쟤 오빠랑 다를 게 뭐겠냐!]

엘드미아가 귀여운 여동생에게 떡 하나라도 더 주는 타입이라면, 지크프리트는 있는 떡도 뺏어먹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앙칼진 동생 하나 놀려먹는 느낌으로 지냈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대우가 극명하게 다른 걸 느끼게 되니...

뭔가, 뭔가 억울했다.

[...너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좋아하는 이를 친오빠보다는 더 챙기는 게 정상 아닌가? 억울하긴 커녕 그간 네 행동을 돌이켜 봤을 때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씨발.]

정령에게마저 상식으로 패배한 지크프리트였다.

"또 정령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된통 욕을 먹었길래 표정이 썩었습니까?"

"우리 동생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날 어쩜 그리 잘 알까?"

"징그러우니 제발 지랄 좀 그만 하십시오."

"뭐? 지랄? 야 마빡이. 들었어? 네 왕자님이 욕했잖아."

"그대는 욕 좀 먹어도 되느니라. 여도 업무를 보다보면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게 허다한데 그게 뭐 어떻다고 그렇게 지랄이느냐."

짐짓 태연한 척 대답하면서도 왕자님이라는 표현에 반박조차 안하고 얼굴이나 붉히는 걸 보니 그대로 오장육부가 뒤틀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격통 속에서 지크프리트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내가 이 놈들의 공공 욕받이가 되어서 둘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되고 있구나!

"이렇게 된 이상 도주다 씨발. 아디오스다 이것들아!"

"같은 수업 들으러 가는 길에 무슨 헛소리를 또 하시는 겁니까. 아디오스는 또 뭔데요?"

"용사가 가끔 던지는 정체불명의 작별 인사이니라."

결국 지크프리트는 첫 수업부터 자신들의 여자들과 갈라져 수업을 듣는 것도 아쉬운 마당에 엘드미아와 에스뮈에에게 쌍으로 욕까지 먹어야 했다.

"나 용사라고! 용사! 애호해 달라고!"

"못 본 사이 정말 애새끼가 다 된 것 같구나. 에셀루아가 투정을 다 받아줘서 성질을 버려놓은 게 아닌가 우려스럽기 그지없느니라."

"느낌 상 헛소리에 불과한 거 같습니다. 정말로 좋아해달라는 의미는 아닌 거 같네요."

"오? 어떻게 아느냐?"

"소름이 덜 끼치네요."

지크프리트는 생각했다. 이 상황을 종결지을 수 있는 것은 레비엥 변경백 뿐일지도 모른다고.

1교시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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