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놀랍게도 아카데미의 수업은 에스뮈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교수와 학생들이 에스뮈에가 아카데미의 규율을 어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한 뒤로 그녀를 평범한 학생 보듯이 지나가는 광경은, 내게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심지어 귀족들마저도 그녀를 알아볼 때마다 으레 학생끼리 인사하듯 가벼운 인사만 건넨 채 지나갈 정도였다.
"그만큼 제국의 법도를 믿는 것이니라. 여기까지 다다르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짐짓 자랑스러운 감정을 내비치며 에스뮈에가 설명해주었다. 뭐, 그녀의 자부심이 충분히 납득되는 광경이긴 했다.
아무리 아카데미의 규율이라 하더라도 결국 저들은 언젠가 이곳을 벗어나 계급 사회의 일원이 될 인물들이다. 심지어 교수들은 이러니 저러니해도 이미 사회인이다.
이 학원 내에서 지켜지는 모든 일들이 밖에 나갔을 때 아무런 불이익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과 확신이 없으면 교수진부터 시작해서 이런 시스템을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언젠가 올 지 모를 보복을 두려워하며 눈치를 보겠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이렇게까지 확고하게 규율을 신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낸 것인지 감도 안오네요."
"역시 이해가 빠르구나. 허나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진 않았느라. 그저 '원래 그런 거다.'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위한 강경책 몇 번만으로도 사람들은 따르게 되어있고, 그게 십 수년 지난 것만으로도 전통으로 지켜지는 법이니까."
강경책이라는 부분에서 에스뮈에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진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비록 신분의 차이가 있다고 하나, 모든 직위와 권력은 황실에서 나오는 법. 제국의 인재를 발굴해내기 위해 황명으로 세워진 이곳에서 신분의 차이로 인해 차별과 박해를 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황제 폐하를 향한 모독이니라."
등을 꼿꼿히 핀 상태로 기품있는 걸음걸이를 선보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에스뮈에는 풍경이 바뀔 때마다 에스코트 중인 나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 따위는 아랑곳도 하지 않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미 어제부터해서 많은 해외 귀족들이 아카데미를 방문한 상태인 탓에 그녀의 에스코트라는 명목으로 나를 사건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그 마음씨는 고맙기 그지없었지만, 솔직히 다른 의미로 신경쓰일 수 밖에 없다.
나랑 신장의 차이가 크다보니 팔짱을 끼는 것조차 애를 쓰는 게 분명한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일부러 힐이 높은 구두를 신고 왔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와 나의 키는 30cm 이상 차이가 나는 듯 했고, 그녀는 나에게 팔짱을 끼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신의 어깨까지 팔꿈치를 올려야만 했다.
"에스뮈에. 어제 사건을 신경 써서 절 배려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자세가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으응? 괘, 괜찮느니라! 가, 가끔씩은 이런 날도 있어야 어깨 결림이 풀리지 않겠느냐? 여는 책상 업무가 잦아서 이럴 필요가 있느니라!"
아니,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어깨가 결릴 거 같은데요.
상당히 불편할텐데도 해맑게 웃어보이는 걸 보면 역시 황녀답게 표정관리 만큼은 일품일지도 모르겠다.
"그, 오히려 엘드미아 그대가 불편하지는 않는가? 여와 걸음을 맞춰야하는 점이라든가, 레비엥 변경백이라든가..."
"아뇨? 딱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동하는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 좋네요."
라그니스는 왜 물어본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괜찮은 건 괜찮은거다. 아. 어쩌면 그래도 내가 라그니스의 수행원인 입장이니 주인이 아닌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게 업무 태만인 게 아니냐는 질문이었던건가?
차기 황제 후보랑 친하게 지내는 걸 업무 태만이라고 할 정도로 안일한 친구가 아니니 별 문제 없는데...하긴, 아직 만나보지 못했으니 일반적으로 생각한 것이리라.
"그나저나 용사님은 아까부터 왜 그렇게 죽상을 쓰며 조용히 계십니까?"
"말만 하면 너희가 날 갈구잖아."
"아니, 그게 용사님이 단순히 말을 한다고 갈구는 거겠습니까? 되도 않는 말을 하니 갈구는거지."
"동생. 자꾸 그러면 형 섭섭해."
"섭섭하면 대련에서 이겼어야지요."
"아잇 씻팔. 다시 붙어 임마!"
그래. 이러니 저러니해도 지크 놈은 지랄이 도져야 제 맛인가보다. 뚱한 표정으로 찌그러져 있어봤자 두 배로 꼴사나울 뿐이었어.
난 그런 지크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전 하수하고는 두 번 안 싸웁니다. 저도 체면이 있지."
"으아악! 이게 인성질을 시전하네!"
원래 99번 지더라도 마지막 한 번 이기고 정신승리하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법이다. 심지어 난 아예 진 적조차 없으니 말할 것도 없지.
이게 의외로 지크 놈의 발작 버튼 노릇을 하는건지 새삼 억울해하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놀리는 맛이 있으니 남은 시간동안 자주 써먹어야지.
"엘드미아...?"
그렇게 지크 놈을 놀리며 전술 이론 수업이 준비중인 교실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라그니스를 만날 수 있었다.
근데 쟨 왜 또 나라 잃은 표정이야...?
"그대가 라그니스 리엔 다 레비엥 변경백이로군."
자연스럽게 팔짱을 풀어 라그니스에게 다가가는 에스뮈에를 멀뚱히 보고 있자하니 뒤에서 따라오던 지크 놈이 어느 새 자기 여자들과 합류한 채로 나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동생아. 괜찮겠냐? 칼부림 나는 거 아니야?"
"아니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입니까? 변경백과 황녀님 사이에 칼부림이 왜 나요."
미친놈 진짜 큰일 날 소리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해댄다. 당연히 이 정도 헛소리면 옆에서 에셀루아가 면박을 줄법도 했는데...묘하게 이번엔 지크 놈의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뭐여. 뭔데?
하지만 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라그니스와 에스뮈에는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초대를 한 것은 제국이지만, 아무래도 용사의 성과를 보이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여 인사가 늦었느리라."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국의 하얀 별, 에스뮈에 비스팀 텔 누아 황녀."
"음. 여도 지금은 아카데미의 규율 안에 있느니라. 편하게 에스뮈에라 불러도 괜찮느리라."
"...저렇게 웃으면서 사이좋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얼어죽을 칼부림입니까?"
미녀 둘이 웃으며 하하호호 인사하는 게 보기만 좋구만.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지크를 노려보자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는 네 남녀의 시선이 나를 반겼다.
"그렇군요. 그럼...에스뮈에? '제' 수행원이 무슨 결례라도 저지르진 않았나요?"
"음? 아무런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느니라. '엘드미아'하고는 어제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우애를 다졌느니라. 오히려 예의 결투 건으로 인해 제국이 그에게 결례를 저지른 것과 다름 없지."
움찔. 하고, 웃고 있는 라그니스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난 듯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헌데 아카데미엔 어쩐 일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제 좁은 견문으로 듣기에 에스뮈에는 이미 아카데미의 모든 과정은 수료했다고 들었습니다만...갑자기 제 수행원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타나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네요."
뭐, 뭔가 좀 불만인 거 같은데...그래도 웃고 있으니까 기분 탓이겠지?
어째서인지 눈이 전혀 웃고있지 않는 거 같은 라그니스의 질문에 내 쪽에서는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는 에스뮈에가 어깨를 떨며 작은 웃음과 함께 대답해주었다.
"제국의 황녀로서 제국의 실수를 만회해야하지 않겠느냐? 이미 어제부터 많은 외국의 귀족들이 그대와 같은 초대를 받고 입국했으나 루드라의 젊은 사자와 같은 경우가 또 없을거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인 탓에 여가 직접 엘드미아의 곁에 함께하며 아예 빌미를 주지 않고자 했느니라."
"겨, 곁에서 계속 함께한다구요?"
"그렇느니라. 손님을 초대한 마당에 윽박을 지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부디 이번 사건에 대한 사과의 의미라고 받아주었으면 하느니라."
"그, 그렇게 까지 하지 않으셔도 마,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만..."
"하하하.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느니라. 다행히 서로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인 만큼, 그대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거라 내 장담하지."
"...후후후.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 짓는 둘을 보아하니 역시 내 기분탓이었나 보다.
"금세 친해지는 거보니 보기 좋네요. 라그니스가 이래저래 격식을 차리고 싶어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그 모습이 사뭇 만족스러워서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지크 놈을 바라보자, 이젠 아예 표정이 썩어있는 놈이 고개를 내저으며 내 옆구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아니 이새끼가?
"으업! 갑자기 왜 또 지랄입니까!"
"그냥 눈 빼 이 새끼야. 쓸모도 없는 거 뭐하러 달고 다니냐?"
"아니 멀쩡한 두 눈을 갑자기 왜 빼?"
"그게 멀쩡하냐? 그럼 네 뇌가 안 멀쩡한 거 같으니 뇌나 빼 임마!"
이 새끼 이거 뭐라고 하고 싶어도 너무나 확신에 가득 찬 상태로 주먹을 휘둘러서 진짜 뭐 잘못했나 하는 마음에 차마 반박을 못 하겠다.
"엘드미아? 수업 들어야지?"
그렇게 억울하게 얻어맞고 있는 나를 지켜줄 생각따윈 없는 듯한 라그니스가, 웃으며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에스뮈에를 두고 살펴보니... 한 가지 확실해졌다.
암만 봐도 쟤 지금 눈이 웃고 있지 않다.
나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왜 또 저러는거야...
"안 와?"
"아뇨. 가아죠."
순간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저자세가 되어버렸다.
혀를 차는 지크 놈을 뒤로 하고 다가서자마자 자연스럽게 다시 팔짱을 끼는 에스뮈에의 모습을 바라 본 라그니스의 두 눈이 이젠 얼음장마냥 차게 식는다.
뭔가...뭔가 일어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