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83화 (83/412)

햄찌.

아니, 에스뮈에와 동행하자마자 아카데미가 매우 쾌적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철혈 황녀라는 이명은 농담이 아닌지, 학생들이 취할 수 있는 일상적인 행동은 딱 인사까지였다.

아무도 내 주위로 접근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정말 무슨 해충제라도 살포한 것마냥 일정 반경 이내에 접근조차 하지 않는다.

"여가 괜히 그대와 동행을 주장한 게 아니니라."

에스뮈에가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되면서, 지크 놈은 우리와의 동행을 잠시 피하기로 했다. 아무리 아카데미라 하더라도 황녀들의 가족관계는 그다지 좋은 형태가 아니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다보니 필연적으로 용사인 지크 놈을 목적으로 방문한 상태인 라그니스마저 나와 떨어져 지크 놈과 행동하게 되는 기상천외한 분업이 이뤄지고 말았다.

에스뮈에가 그 사실을 알려줬을 때 라그니스는 그야말로 당장 내일 하늘이 무너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은 이를 갈며 용사 일행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김없이 찾아온 점심 시간에 학식으로 식사를 마친 우리는 평범하게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굳이 에스코트가 필요없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에스뮈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팔짱을 껴왔고, 난 그녀의 어깨 근육이 안녕하길 기도하며 별 말 않기로 했다.

"수행원은 1황녀, 변경백 본인은 용사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 아니겠느냐? 다른 사절들이라면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할 절호의 기회인데도 변경백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하구나."

실로 그러했지만...어째 에스뮈에의 말투는 정말 이해가 안된다는 느낌보다는 라그니스를 골탕먹이고 장난을 치는 어조에 가까웠다. 저런 태도 때문에 라그니스도 분해했던건가?

그래도 애가 명색에 귀족인데 겨우 그 정도로 감정 조절을 못하지는 않을텐데 말이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모두에게 좋은 상황이니 꺼릴 것도 없지. 여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지만 꽤나 괜찮구나."

한껏 웃어 보이는 에스뮈에였지만 난 아무래도 생각을 좀 달리 할 수 밖에 없었다.

겨우 18살. 천재이기 때문에 아카데미마저 월반하고 정계에 입문하여 황권을 다지기 위해 싸운 것만 4년이다. 그것을 위한 기반은 훨씬 오래전부터 다져야했을 거라고 하니 풍족함 속에서도 치열하게 싸우고 긴장한 채 지내왔을 것이 분명했다.

천재라서 모든 것을 쉽게 풀었을 거라 하기엔, 이미 단순한 업무에서조차 욕지기가 나온다고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천재일 지언정 감정적인 것이 결여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복수를 위해 쉬지 않고 달리는 것처럼 그녀 역시 황제가 되기 위해 쉬지않고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조차 환생이라는 형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살 수는 없었을테니까.

"업무가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대놓고 황제가 되기 위한 피를 말리는 정치싸움이 힘들지는 않냐고 물어볼 수 없는 탓에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나를 바라본 에스뮈에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것은 없느니라. 능력이 좋다면 좀 덜 힘들 수는 있으나...결국 그 능력에 걸맞는 일이 닥치기도 하는 법이지."

"에스뮈에의 능력이라면 힘든 일을 피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내 질문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일까. 난 천재가 아니라서 알 수 없다. 그저 어차피 함께 하는 시간에 나누는 가벼운 잡담처럼 질문 해 보고 대답을 기다릴 뿐이다.

"차기 황제는 피하지 않느니라. 오직 헤쳐나갈 뿐."

"아뇨. 그건 차기 황제이잖습니까. 에스뮈에가 어떤지는 말해주셔야죠."

'감히 여가 차기 황제의 그릇이 안된다는 게냐! 단두대를 가져오너라!'라고 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끼고 있는 팔짱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래봤자 에스뮈에의 작은 몸에서 나오는 힘인지라 그다지 느낌도 없다.

"글쎄. 지금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느니라. 여는 황녀고, 차기 황제가 되기에 부족함 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실제로 다른 형제 자매들보다 월등히 황제에 부합하는 능력을 지닌 천재이지 않느냐."

모르고 봤으면 건방진 꼬맹이라서 꿀밤이 마려웠을텐데, 이미 한 마리 햄찌로 자리 잡은 탓에 저런 말도 귀엽기 그지없다.

정작 그 말을 입에 담는 에스뮈에는 한없이 진지하고 그게 또 사실이라는 부분이 킬링 포인트다.

"앞으로도 그럴거라 여겼지만...그, 아주 조, 조금은 고민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느니라."

그런 고민을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인지 몸을 배배꼬며 얼굴을 붉히는 에스뮈에였다.

결국 얘도 아직은 애다. 저런 고민이 당연한건데 그런게 당연하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에 불과하다.

난 전생에서 그래도 평범하게 삶을 영위하는 시늉이라도 해봤으니 버티는거고. 년단위로 끝없이 싸우고 단련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닌 건 어딜가나 똑같은 것이다.

"에스뮈에."

"왜, 왜 부르느냐?"

결론이 내려지자 행동은 빨랐다.

"에스뮈에는 결국 아카데미의 규율 아래 학생의 신분으로서 있는 것이고, 저 역시 참관이라는 형태와 비슷하게 이 곳에 있지만 결국은 임시 학생의 신분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뭔가 아리송하다는 듯이 수긍하는 그녀에게 확답을 듣기위해 난 허리를 살짝 숙여 똑바로 눈을 마주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즉. 제가 이티스엘로 돌아가는 그날까지는 에스뮈에도, 저도 같은 학생이라는 말이죠?"

"그, 그, 그, 그렇느니라."

메모...소동물과...햄찌...겁이 많아서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을 견디지 못함...

"그럼 당연히 이 순간 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해봐야 제대로 학생의 신분을 만끽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대, 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여의 동의를 유도하며 뜸을 들이는 것이냐? 지, 지금 밖에 할, 할 수 없는 일이라니...!"

대체 뭔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곧 터질 것 마냥 빨개지는건지 알 수 없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난 그대로 에스뮈에를 번쩍 들어 어깨 위에 앉혔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에스뮈에는 내 어깨 위에 앉아 수 초 정도 멍 때린 뒤에야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흐햣?! 뭐, 뭘 하는게냐!"

제대로 균형을 잡고 있을 뿐더러, 혹시 몰라 손도 잡고 있는 상태였음에도 겁에 질린 것 마냥 내 머리를 끌어앉는 에스뮈에를 진정시키기 위해 난 주저없이 대답했다.

"무단 결석입니다!"

"....무...?"

무단 결석. 자체 휴강. 땡땡이.

오직 학생밖에 할 수 없는 행동.

그렇기에 가장 학생다운 행동 아니겠는가?

"놀러가죠!"

"그게 무...흐햑! 뛰, 뛰지 말거라! 뛰지 마!"

어림도 없지. 이대로 저택까지 간다.

"대, 대체 무슨 짓을 한겁니까 에가 경?"

마력까지 두르고 열심히 뛰어온 저택에서 나를 반겨준 것은 그야말로 턱이 빠져라 경악하고 있는 레니사였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내 어깨 위에 올라타 아직도 내 머리를 껴안고 있는 에스뮈에를 향해 있었다.

음. 역시 기사라서 그런가 제국 황녀 얼굴 정도는 기본적으로 외우고 있나보다.

"지금 화, 화, 황녀님을 납, 납..!"

"업무의 일환에 불과합니다 레니사. 그런고로 시녀들을 불러서 황녀님이 입을 만한 수수한 옷가지를 좀 골라주시지요."

"업무로군요. 알겠습니다."

뭐야, 저 누나 무서워.

겨우 말 한 마디에 금방이라도 경악하며 납치를 입에 담으려던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극히 평온하고 사무적인 기사 레니사만이 남았다.

그리고 에스뮈에는 마치 나랑 정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레니사를 따라 사라졌다. 흠. 솔직히 막 당황하고 설명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나라는 남자가 안겨주는 신뢰도란 사실 어마무시한 게 아닐까?

내가 여기로 뛰어온 이유는 단순했다. 에스뮈에가 걸치고 있는 검보라색 드레스는 더럽게 비싼 거라 눈에 안띌 수가 없거든.

이 세계에서 검보라색이라는 건 진짜 존나 존나 구하기 어려운 염료라서 검보라색으로 염색된 손수건 하나만 있어도 사교계에서 슈퍼 인싸가 될 수 있을 정도다.

근데 그거로 드레스를 만들어 입었다? 이티스엘의 왕녀조차 그랬다가는 과도하게 사치를 부렸다고 정치적으로 몰매를 맞는다. 이미 저건 그야말로 황실의 후손이기에 입을 수 있는 권력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 걸 입고 어떻게 나들이를 가.

당연히 내 지금의 복장은 레니사와 같은 레비엥 가문의 기사복이었고, 나 역시도 처음에 받고 제대로 입을 일도 없었던 일상복을 꺼내 입은 뒤 지갑과 롱소드만 허리에 차고 나왔다. 그리고 마주치는 사용인들에게 물어가며 그들이 3일 간 즐겨온 제국 관광 투어 썰을 주워들으며 구체적으로 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에, 엘드미아여. 준비 되었느니라."

비록 미모와 하얀 머리카락이 눈에 띌 수 밖에 없지만, 복장만큼은 한없이 수수해진 에스뮈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 사회였다면 겨우 옷 좀 평범하게 입었다고 월드 클래스의 미소녀가 동네 아낙네가 되냐며 일차원적인 발상이라고 욕을 먹을 법한 수준이었지만, 여기서는 충분하다.

무엇보다 특출나게 왜소한 에스뮈에가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어려보이지 않으면서 잘 어울리는 의상을 재주좋게 코디한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저 정도 센스면 옷가게를 차려도 되지 않을까?

난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가가 다시 에스뮈에를 들어 어깨에 앉혔다.

이번엔 그렇게 빨리 들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저항없이 내 손길을 받아들인 에스뮈에가 어깨 위에 앉은 채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꼬, 꼭 이렇게 가야만 하느냐?"

"아무리 무단 결석 후 도시로 놀러가는 거라 한들 황녀님을 걷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 이게 오히려 황녀의 위엄에 문제가 있어보인다만.."

"그게 좋은 거죠. 누가 감히 황녀에게 평복을 입히고 어깨 위에 앉힌 채 거리를 활보할거라 감히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황녀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관심이 덜 하지. 난 당당하게 저택의 문을 나서면서 대답했다.

"자. 이제부터 나는 이티스엘 왕국의 모험가 엘드미아 에가야. 에스뮈에 너는 그런 나와 사이가 좋아진 동네 소녀고. 난 의뢰를 마치고 생긴 목돈으로 너랑 놀러 나온거지."

"에, 엘드미아여? 지, 지금 너라고...?"

"본격 서민 체험을 하면서 휴식할 준비는 되었어 에쉬?"

어깨 위의 에스뮈에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어보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한참을 멍 때리다가 이내 우물쭈물하며 꼼지락 거리던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되, 되었느니라."

역시 이해가 빠른 황녀님이었다.

이거 라그니스랑 오그웬 투어를 했던 때가 떠오르는구만.

슬슬 즐거워지기 시작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