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 눈치 없는 돌대가리 엘드미아.
여긴 어...에이씨.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아 그 뒤로 한동안 거실에 앉아있었음에도 라그니스는 날 부르지 않았고, 갑자기 몰려오는 피로도 있고 해서 난 일단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드러누워버렸다.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눈치가 더럽게 없었다는 걸. 지크놈과 그 일행들의 말이 맞았다.
그래도 에스뮈에가 라그니스와 대화한 후 그런 돌발 행동을 취했다는 점과 주변을 돌아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동시에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몰랐던 거냐, 아니면 언제 죽을지도 모를 놈이라는 핑계로 도망치고 있었던 거냐."
배게에 대가리를 파 묻고 던진 질문에, 정작 대답해야 하는 엘드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전자면 병신이고 후자는 비겁한 새끼다. 복수를 마치고 잘 살아서 돌아오면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했던건가? 어장관리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지.
근데 병신이 아니라 비겁한 새끼였던 거 같아서 비참해지려 한다.
"씨바아아알. 무단 결석 따위가 문제인 게 아니었잖아아아."
결국 이불킥을 하는 심정으로 얼굴을 부여잡은 채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밀려오는 수치심에서 눈을 돌리고자 발버둥쳤다.
그래. 마을이 불타기 전 어릴 때는 그런 상상도 해봤을 수는 있다. 난 판타지는 책으로만 접하던 현대 지구인이고 여기는 판타지 세계 그 자체였으니까.
다시 방문하겠다던 마법사와 재회해서 마법을 배울 수 있다면, 기껏 이세계에 왔으니 모험도 하고 여자도 만나고 하면서 안정된 삶을 위해 노력했다가 죽어버린 전생과 달리 하고 싶은 것을 위해 힘쓰며 좀 즐기는 삶을 가져보고자 하긴 했었다.
그게 마왕군 습격이라는 형태로 날아간 뒤로 좀 뒤틀린 심성의 소유자가 된 것도 사실이지. 맨날 죽을지 모른다 모른다 하면서도 죽을 짓 비슷한 걸 골라서 하는 것도 그렇고.
"하...지금 고민이 중요한 게 아니지."
엎지른 물은 주워담을 수 없지만, 최소한 아직도 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컵 정도는 다시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제대로 될 지 안 될지 알 수 없을 지언정 시도는 해봐야지.
떠나고 싶지 않은 침대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긴 나는 라그니스의 방 문을 두드렸다.
도망쳐서 도망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가츠 형님이 그랬어.
"라그니스. 잠깐 괜찮을까?"
"...들어와."
하지만 존나 도망치고 싶다 진짜.
그래도 꾸역꾸역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에스뮈에와 이야기 한 뒤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라그니스가 있었다. 심지어 쥐고 있는 찻잔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것인지 얇은 테까지 생겨있는 상태다.
"황녀가 뭔가 말하고 갔나보네?"
"으응. 그렇지."
"그러고도 왔다는 건 모른 척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고?"
목소리도, 기운도 착 가라앉은 라그니스가 예리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그...내가...눈치가 많이..."
"없었지. 일단 앉아."
마실 생각이 없는 것인지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두는 그녀의 맞은 편에 엉거주춤 걸어가 앉았다. 이미 내가 찾아온 이유마저도 알고 있는 눈치라서 괜히 더 말을 꺼내기 힘들다.
하지만 침묵을 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일단 겨우겨우 운을 떼어보았다.
"그...언제부터..."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해?"
"......미안."
운을 떼자마자 격파당했다. 아니 저건 가불기 아니냐고. 심지어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뭐가 미안한데?'가 연계기로 튀어나올까봐 조마조마하다.
"처음 구해졌을 때부터야."
길다...! 무겁다...!
차라리 연계기가 낫지. 굳이 한 번 면박을 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뭘 그렇게 안절부절을 못해. 거절하려고?"
"아니, 그게. 마음은 정말 기쁜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우리 마을 작살 낸 마족 죽이기 전까지는 발 뻗고 편히 잘 수가 없는 몸이잖아? 그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너 언제 죽는지 상관없으면 받아줄거야?"
그야 그런 질문이 돌아오겠죠. 당연히 그렇겠죠. 수년 간 버텨오셨는데 겨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 한마디에 휙 돌아설 리가 없죠.
정말 입안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기분이다. 바람 핀 것도 아니고 내가 죄를 지은것도 아니지만 이거 진짜 미안해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다.
"이게 정말 변명 같이 들릴 거라는 건 나도 아는데..."
"주변 여자들에게 한 번도 연애 감정이 안 들어서 잘 모르겠다고?"
"변명은 적어도 내 입으로 말하고 싶어..."
제발...! 제발 나를 위해서라도 내가 내 주둥이로 말하게 해줘...! 왜 다 알고 있는건데...!
하지만 라그니스는 가차없이 몰아붙일 뿐이다.
"그럼 지금까지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오늘 일을 계기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거네?"
"...그렇죠."
"내가 싫은 건 아니고."
"싫은 사람을 굳이 돕거나 구해주지는 않죠..."
가만히 앉아있던 라그니스가 벌떡 일어나 내게로 다가오더니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그대로 내 무릎 위에 앉으며 날 바라보았다.
분명 종종 했던 스킨쉽이지만서도! 자각하고나니 더럽게 부끄럽다.
"풉."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린 라그니스가 조용히 날 껴안으며 말했다.
"너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달라붙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잖아."
"그게 또 자각을 하고나니 굉장히 부끄럽다고할까 반응을 안 할 수가 없다고 할까..."
그냥 꼬맹이로 볼 때면 모를까, 다 큰 미소녀가 아이컨텍을 한다는 걸 자각하고나니 진짜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냐.
"그거면 됐어."
"응?"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네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날 바라보거나 씁쓸하게 바라보는 게 제일 무서운거였다고."
그 말을 듣고나서야 그녀의 몸에 떨림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 등을 토닥여주는 것조차 지금의 의기소침 눈치제로 엘드미아에겐 힘든 일이다.
"황녀가 그러더라. 절대 널 놓치지 않을거라고."
"아...어....음."
차마 그래서 나가기 전에 키스까지 하고 갔나라는 눈치없는 말을 지껄일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얘네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하냐. 돌아버리겠네. 정말
"내가 왜 마법을 열심히 배우는 지 알아?"
"어...재능이 있으니까...? 이전부터 라드넬반데스 경의 제자이기도 했고?"
쌩뚱맞은 질문이라고 여기면서도 당장 떠오르는 이유를 입에 담았다.
"말은 안했는데, 난 마법 별로 안 좋아했어. 아버지처럼 검을 들고 나가 싸우고 싶어했지."
나 못지 않게 바짝 긴장하고 있던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진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본인은 좀 여유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난 여전히 심장에 안 좋은 상황인데 딱히 떨어질 생각도 없어보인다.
"열심히 한 건 수도로 돌아온 뒤야. 물론 그런 일을 겪고 나서도 있는 재능을 내다버리는 건 멍청한거지만, 다른 이유가 컸지."
"그거 왠지 그다지 유쾌한 이유는 아닐 거 같은데..."
"네 복수. 나도 도울거야."
뭐라 말하려하자마자 내 목에 둘러진 그녀의 팔에 꾸욱 힘이 들어갔기에 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딴 말하지마. 결정한거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거야. 죽을 거면 차라리 같이 죽어."
"그건 너무 무섭잖아요."
"말이 그렇다는거지. 나도 죽을 생각 없거든."
그렇게 온 힘을 다해 포옹을 마친 라그니스가 몸을 떼며 시선을 마주했다.
낯설다. 그 잠깐 사이에 붉은 머리칼과 주근깨가 익숙하던 꼬맹이가 전혀 다른 느낌의 여성이 되어버렸다. 그것만으로 압도되어, 그녀가 내린 판단에 더이상 내가 뭐라고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황녀가 뭐랬는지 알아? 이미 자기가 정실인것처럼 말하고 나갔어. 난 어차피 이길거긴한데 넌 그대로 시무룩하게 있을거냐는 듯이 말했다고."
"...진짜?"
"...사실은 좀 격려 비슷한 느낌이긴 했지. 왜 그런 이상한 격려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말하고도 찔렸는지 바로 진실을 고한 라그니스는 드디어 나와 떨어져 주었다.
"짜증은 나지만 맞는 말이었으니까. 받아들여야지."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알 수 있을까?"
"아니. 없어. 이제 가서 잠이나 주무시죠. 나도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자고 싶으니까."
라그니스는 내 손을 잡아 일으키고는 방 밖으로 나를 내쫓았다. 물론 그 손길은 부드럽기 그지없어서 내쫓았다는 표현이 안 어울리긴 하지만, 아무튼 난 강제로 방을 나와야했다.
"내일은 나랑 떨어질 생각하지마. 황녀를 달고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놓을 생각 없으니까."
"어...어."
"그럼 잘자."
마치 조금도 화나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는 것처럼 미소와 함께 조용히 닫힌 방문을 뒤로 하며, 나도 더 이상 뭘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피곤해서 그대로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
차라리 영원히 아침이 안 왔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아침이 왔다.
그렇다. 난 한숨도 제대로 못 잔 것이다. 정신도 패배하고 육체도 패배하고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어째 눈이 퀭하네?"
"못 잤어..."
그런 나와 달리 라그니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정도가 아니라 뭔가 후련한 듯 했다. 그래도 고백 비슷한 걸 했으니 자신의 의사는 밝혔다는 건가? 하긴 손톱을 물어 뜯거나 나라 잃을 표정 짓는 것보다는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봐주지는 않을거야."
"그렇겠죠..."
결국 적당히 아침을 떼우고 마차에 올라타 맞은 편에 앉으려 했으나, 라그니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어딜 가. 이 쪽에 앉아."
"에..."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 없이 계속 자리를 두드리는 라그니스의 분위기에 압박되어 자리를 옮기자 그녀의 손이 내 머리를 끌어내려 자신의 허벅지에 눕혔다.
"저항 안 하는 건 마음에 드네. 싫진 않다는거지?"
"아니, 어제도 말했지만 싫었으면 구했겠냐고..."
"조용히 하고 잠깐 자기나 해. 도착할 때 즈음 깨워줄테니."
그리 말하며 천천히 가라는 말을 마부에게 전한 라그니스는 창문의 커튼을 친 뒤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천천히 가면 대충 20분은 걸리려나. 물론 잠들면 쪽잠 정도는 잘 수 있는 시간이지만,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 상태로 편하게 잠드는 게 가능한 일인가?
놀랍게도 가능했다. 난 1분도 안 되서 졸도하다시피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