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까지는 예상대로 딱 20분이 걸렸다.
놀랍도록 손쉽게 잠든 나는 그 짧은 사이 잠에 취해 마차에서 내릴 때 조금 비틀거릴 정도였고, 그 모습을 보며 웃는 라그니스와 함께 아카데미에 들어섰다. 어째 어제까지와는 다르게 정문에서부터 전체적으로 부산한 분위기인 게 뭔 일이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일단 걸음을 옮기자 라그니스가 말을 걸어왔다.
"내가 어제했던 말 기억하지?"
"기억은 하는데, 어차피 마법 수업이 되면 또 갈라져야 하잖아."
"...엘드미아? 지들리가 나눠줬던 편성표는 어디에 뒀어?"
"그런 게 있었나...?"
곰곰히 떠올려보니 뭔가 읽어보라고 받았던 거 같긴 한데?
아카데미 홍보 팜플렛 같은 건 줄 알고 적당히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거 같기도 하고...
"주머니에 있지 않...을...있네."
반 망토 안에 편지 정도만 넣을 수 있게 제작된 작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한 번도 안 봤다는 거잖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네. 뭐 어때! 수업 안 빠지고 잘 들었으면 된 거 아닐까?"
"어제 빠졌잖아..."
"아니, 그건 알았어도 빠졌을 테니까 논외죠."
사실 땡땡이를 친 것부터가 잘못이니 라그니스는 당연히 기가 차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어물쩍 넘기기 위해 나흘 동안 묵혀두었던 종이 쪼가리를 펼쳐보았는데...응?
"던전 답사...단체전...친선전? 이건 수업이 아니라 시험 아닌가?"
오늘부터 적혀 있는 내용들이라는 게 죄다 그 모양이다. 이게 뭔가 싶은 심정 그대로 라그니스를 바라보았지만 오히려 라그니스가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이젠 자동으로 용사 일행들의 싸늘한 눈빛이 생각나서 진짜 또 내가 무슨 눈치 없는 소리를 지껄인 거 같아 불안해진다고...
"당연히 시험이지. 용사의 성과를 알아보는 게 대련 한 번 하고 수업 좀 같이 듣는 거로 끝날 리가 없잖아?"
"...우리는?"
"아...거기서부터인 건가. 매번 특혜라고 말했는데도 와닿질 않았나 보네."
뭔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해주는 라그니스의 말을 들어보니, 용사 홍보 페스티벌이라 불러도 되는 이번 행사는 오늘부터 3일간 진행되는 게 정상적인 일정이라고 한다.
그마저도 다른 국가의 방문자들은 수개월 전부터 자신들이 직접 알아서 묵을 숙소를 찾고 일정을 조절하고 방문하는 과정을 거쳤어야 했던 것이며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위해 신분 증명서까지 발급받아야 했다.
루드라의 똥개 놈이 더더욱 놀라운 미친놈이었다는게 밝혀지는 대목이었다.
뜬금없이 왜 걔가 나오냐고? 걘 그날 아카데미 방문 자격도 없는 거였거든! 어쩐지 그때 그 교수도 대체 누군데 그 난리냐며 서두를 뗀 게 좀 요상하다 싶었는데 정말 상상도 못 한 이유가 있었다.
보고 안 된 외부인이니 귀족임에도 누구인지 모를 수밖에!
"와 그놈 괜히 죽였네. 살려 뒀으면 두고두고 골 때리는 사건 사고를 터트렸을 텐데."
"말도 하지 마.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이가 갈리니까."
하긴 라그니스는 면전에서 가문을 통째로 모욕 당했으니까. 귀족의 감성을 온전히 납득하진 못 하지만 그래도 보고 자란 게 있어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래도...세상에. 이세계에서 만난 또라이 중에서도 손 꼽히는 진성 귀족 또라이였네.
내 주변엔 착하고 좋은 귀족들만 있는 거 같아서 정말 다행이다. 오그웬의 영주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급격히 발전을 하며 치안이 엉망인 와중에도 그 정도면 좋은 영주였을 거 같은데 말이지.
"그래서 너랑 라드넬반데스 경이 내가 예상한 거 이상으로 경계했던 거구나?"
"그랬지. 덕분에 왕실에 꾸준하게 보고서를 보내야 해서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야."
다른 나라는 국가 단위의 사절이었지만 라그니스는 단순히 이티스엘의 변경백으로 초청되었다. 그로 인해 사절을 파견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왕국에서 딴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매일 매일 꽤 장문의 편지를 보내야 한다는 것 같다.
생각하고 나니 엄청 대단한 거 아닌가...?
"그보다, 에스코트를 한다고는 해도 조금 너무 밀착 한 게 아닐까 싶은..."
분명 팔짱을 끼긴 했지만 노골적으로 흉부가 압박된 상태다.
하루 만에 너무 대담해! 너무 거침없어서 내가 부끄럽다!
"어차피 좀 있으면 에스뮈에한테 뺏겨야 해서 안 그래도 불만인데 짜증 나게 할래?"
온종일이라고는 했어도 역시 대외적인 시선을 어기면서까지 옆자리를 우길 생각은 없는 것인지 게슴츠레하게 눈을 흘기는 라그니스였다. 이게, 마치 아예 안 맞을 수 있는 선택지를 잘라 낸 뒤 한대 맞을래 두 대 맞을래를 택하라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좀 오묘하긴 하지만...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본관까지 긴장 가득한 발걸음으로 도착하자, 뜻밖에 지크 놈 일행과 같이 있는 에스뮈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지크 녀석이 가장 먼저 나를 눈치채고 손을 흔들자, 에스뮈에도 이내 시선을 돌리더니 라그니스가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화사한 미소와 함께 손 인사를 건네왔다.
으아아아아아아!! 입술 그만 봐! 엘드미아!!
화사하지만 더할나위 없이 여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이리저리 나를 살펴보는 에스뮈에와 쉽게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 고개를 자꾸 돌리니, 매우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라그니스와 뭔가 이해한 거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지크 놈, 그리고 묘하게 대견하다는 시선으로 에스뮈에를 바라보는 에셀루아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너희 황가 자매들 사이 안 좋다며? 아, 에셀루아는 아예 논외 수준이라 딱히 그렇지도 않은 건가?
"오늘부터 실습 위주의 수업인지라 많이 피곤할 터인데, 어째 잠을 잘못 잔 것 같은 모습이 아니더냐?"
엘드미아 에가의 인생에 말도 안 되는 한 획을 긋는 만행을 저질러 놓고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에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햄찌인 줄 알았던 것이 여우였을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잘 좀 자고 싶었는데 말이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해 보려 하지만 그게 영 쉽지가 않다. 그런 내 반응만으로 어제 에스뮈에가 돌아가는 길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한바탕 해놨다는 걸 눈치챈 라그니스의 시선이 더욱 가늘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려야만 한다는 강한 확신에 따라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용사님과 함께 계실 줄은 몰랐군요. 오늘 수업과 관련 있는 건가요?"
"후후. 그렇느니라. 사실 수업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하나, 결국 그간 용사가 제국에서 배워온 것을 시연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잖느냐. 여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게 가장 빠르지."
임시 형태로 아카데미에 들어왔다한들 아예 업무에서 손을 놓은 것은 아닌가 보다. 에스뮈에가 다가오며 새삼 정중하게 라그니스에게 인사를 건네자 라그니스도 나에게서 자연스럽게 떨어지며 인사했다.
"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에스뮈에."
"물론이니라. '잊을 수 없는' 방문이 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 하도록 하겠느니라."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서 꽂힌다.
이제는 알 수 있다. 말에 형태가 있다면 저 둘의 말은 서슬 퍼런 칼날일 게 분명했다.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는 시선을 겨우 지크 놈에게 고정시키자...난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지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지크 녀석이 무려 나를 동정하는 게 아닌가!
"용사님...?"
"동생. 드디어 옹이구멍을 눈구멍으로 갈아 치웠구나."
어깨를 다독여주는 지크의 손길이 새삼 따뜻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것이...사람의 온정이라는 것인가...!
"힘내. 형도 지나온 길이야. 형은 동생이 잘 헤쳐 나갈 거라고 믿어."
역시 폼으로 여자 셋을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었어!
그야말로 후광이 비치는 용사 그 자체인 지크의 모습에 감탄한 나는 황급하게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용, 아니, 형님. 동생에게 제발 뭐라고 조언해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아침부터 피가 마르는 기분입니다."
"응, 없어. 네 업보야. 형이 해 줄 수 있는 조언이라는 건 네게 귀걸이를 건네준 분한테 말할 때 아주 조심해서 말해야 할 거라는 것 정도밖에 없어."
"...에?"
"이젠 무슨 소린 지 알아들을 거라고 믿어 동생."
아니, 진짜? 정말로?
얼굴로 물어봤지만 지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저 어깨를 한 번 더 다독여 준 뒤 에셀루아와 다른 여자들이 있는 쪽으로 갈 뿐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방팔방 플래그를 세우고 다니는 미친놈 같은 짓을....한 거 같기도 하고!
눈앞이 깜깜해지는 와중에 익숙하게 팔짱을 끼는 손길이 느껴져서 현실로 돌아오자, 태연하기 그지없는 에스뮈에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 라그니스가 있음에도 그녀는 감출 생각조차 없이 애정을 과시하며 말했다.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하느니라."
"...그런 엄청난 일을 해 놓고서 너무 태연한 거 아니냐."
순간 너무나도 괘씸해서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반말이 튀어 나왔으나 에스뮈에는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대신 옅게 웃어 보였다.
"여가 태연해 보이느냐?"
앙증맞은 손이 내 손에 살짝 포개어지자, 확실한 떨림이 전해져온다.
이미 엄청난 일이라는 부분에서 예리한 눈빛으로 나를 살펴보던 라그니스의 두 눈이 크게 떠지며 무언가를 파악한 것처럼 놀라기 시작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면 낯빛 정도는 감출 수 있느니라. 여에게도 특별한 일이었는데 하루아침 만에 평정을 찾을 수는 없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너무 힘들다...! 그저 지금 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지 않길 간절히 기도하는 사이 라그니스가 끼어들었다.
"...나도 할 거야."
표정 변화를 감추기 위해 굉장한 노력 중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난 이 편린적인 대화만으로 그녀가 정확하게 유추해냈을 거라고 믿기 힘들었기에 벙찐 표정으로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뭐?"
"돌아가서 나도 할 거라고."
"아니, 뭔지나 알고 하는 말..."
라그니스는 말 대신 눈으로 대답했고, 난 알아먹었다.
아! 나만 빼고 다들 눈치가 백단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