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닷새 째 아카데미 생활을 위태롭게 맞이했지만, 에스뮈에와 라그니스는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해주었다.
제대로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한 내가 목적지로 가기까지 거의 에스뮈에에게 끌려가다시피하는 동안, 오고 가며 만난 다른 나라의 귀족들이나 사절들과의 통성명을 매끄럽게 이어 나가는 둘을 보고 있자 하니 새삼 그녀들이 황족과 귀족이라는 게 체감되었다.
심지어 그 과정에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일이 있더라도 일말의 신경전 없이 웃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그냥 남은 기간 동안에도 저렇게 지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원인 제공자인 제가 그런 바람을 가져 봤자 아무 의미도 없죠.
"오늘의 예정은 던전 답사뿐이니라. 비록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철저한 관리 아래 운영되는 던전일지언정, 일반적인 적급 모험가들은 파티를 맺어야 수월한 수준이지."
에스뮈에는 내가 오늘의 일정에 대해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는 오고 가는 인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설명해주고 있었다. 첫날 대련장에서의 모습을 못 봤다면 던전의 수준에 꽤 적지 않게 놀랐을 테지만, 직접 겪은 뒤인지라 충분히 납득이 가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아카데미라는 틀 안에서 어느 정도 단합력을 기른 그들은 어중간한 적급 모험가 파티보다 낫다. 이 수업도 위험에 대한 대처 능력을 확인하기보다 상황 파악과 임기 응변 그리고 역할 분담 같은 요소에 더 중점을 둔 것이리라.
"그럼 저나 변경백께서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는 겁니까?"
"그점에 대한 것도 이미 준비된 상태이니라. 레비엥 변경백의 대리인으로 엘드미아, 그대는 용사 지크프리트와 함께 답사에 참여하게 되느니라. 그리고 각 국가의 사절들이 데려온 수행원 혹은 사절 본인이 나머지 인원으로 충원되지."
"제가 알고 있는 왕국만 대륙에 열 개가 넘는데 그들 모두가 참여한 건 아니겠죠?"
그것도 제국에서 초대장을 돌릴 만큼 규모나 명성이 있는 나라가 열 개 씩이나 되는 거다. 그 외 작은 소국들을 합치면 내가 모르는 국가가 적어도 열 개는 더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왜 아니겠느냐? 대륙의 관심사이거늘. 하지만 용사와 직접 파티를 맺어 옆에서 보고 싶어 하는 이들과 던전 답사를 두고 경쟁을 원하는 이들로 구분지었지. 아카데미 생도들로 이어진 파티까지 합해 총 4개의 파티가 동시에 던전 답사를 하게 되느니라."
참고로 파티 구성원은 다섯이니라. 라며 말을 맺는 에스뮈에의 뒷 말이 나로 하여금 강한 불안을 느끼게 만들었다.
"사람 다섯이 모이면 그중 반드시 한 명은 쓰레기가 있는 법이랬는데."
역시 같은 현대 사회의 지성인인 지크가 옆에서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거참 독특하면서도 묘하게 신뢰가는 말이로구나. 누가 그런 말을 한 게냐?"
"있어. 현자 지로보 선생님이라고. 그마저도 인간을 너무 이성적으로 판단하신 분이지."
"호오...처음 듣는 이름이로고. 혹시 다른 가르침도 있느냐?"
"아마 없을걸."
대체 얼마나 저런 발언을 해온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둘러대는 모습이 여간 익숙한 게 아니다. 그의 이야기에 짐짓 아쉽다는 듯이 반응하는 에스뮈에 때문에 웃음이 터질 뻔한 걸 겨우 참아가며 이를 악물고 있자 하니 옆에서 라그니스가 질문을 던졌다.
"네 개의 파티라니 꽤 많은 숫자 아닌가요? 던전의 규모는 제국이니 납득할 수 있지만 그만한 인원을 동시에 답사시키는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아무리 용사의 성취를 보이기 위함이라고는 하나 결국 아카데미는 용사 하나만 키우는 게 아니니 생도들로 구성된 파티 둘에 사절들로 이루어진 파티 하나를 넣으면서 어쩔 수 없이 넷이 나온 것이니라."
제국은 용사에게 모든 것을 걸 생각이 없다는 건 이미 첫날부터 지니고 있던 가설이자 의문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용사의 파티를 외부 인원으로 구성하고 나머지 파티와 경쟁하게 만드는 것부터 꽤 많은 디메리트를 안겨 주는 거라 여길 법도 했지만, 내가 용사와 같은 파티를 맺게 된 탓에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적급 던전이면 지금의 나와 용사만으로도 돌파가 가능할 거다. 아예 척을 진 상태라서 사이가 나빴으면 모를까, 지금은 서로의 의견을 수렴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상태니까.
"에스뮈에. 나랑 지크를 같은 파티로 구성한 건 계획된 거야?"
당장 고민해도 내 머리로는 답이 안 나와서 그냥 대놓고 조용히 물어보자, 지나가는 귀족에게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 에스뮈에가 마찬가지로 조용히 대답해주었다.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와 급조한 것이니라."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충분했다. 이 상황에서 불순한 의도가 포착되어서 용사에게 안전빵 파티원을 하나 안겨 줬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니까.
문제는 그게 암살이냐 아니면 제국 외의 어딘가에서 용사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인데...마족을 경계한다면 굳이 파티를 재구성할 필요가 없으니 결국 국가 간의 알력 다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그건 마왕의 대적자로 신에게 점지된 용사를, 정말 단순히 제국의 군사병기 정도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지.
순식간에 치고 올라오는 짜증과 불쾌감은 내가 제국에 오기 전에 느꼈던 것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볼품없이 일그러질뻔한 얼굴을 다잡아 준 건 팔짱을 끼고 있던 에스뮈에의 손길이었다.
"보는 이가 많다하여 긴장하는 게냐? 그대와 용사의 실력이라면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의외로 소심하구나."
시선을 내려 바라본 에스뮈에의 눈은 그녀가 한 말과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짧은 순간의 긴장만으로도 내 감정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미리 언질을 주다니, 순수한 감탄이 짜증마저 집어삼켰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대외적인 활동은 익숙지 않아 그런가봅니다."
"아무리 긴장해도 손대중은 해야 하느니라. 던전 답사가 끝이 아니니."
설령 용사를 노리는 시도가 있더라도 죽이면 안 된다. 에스뮈에가 하고자하는 말을 이해한 나는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진짜 미소처럼 보였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에스뮈에는 마주 웃어 주었다.
◈
아카데미 인근 숲에 위치해 지하로 이어져 있는 던전의 입구는, 새로 짓고 관리한 것인지 꽤 깔끔하고 현대적인 양식을 뽐내고 있었다. 어쩌면 던전 자체가 인공 던전일지도 모르겠군.
인솔을 위한 교수진들을 비롯해 약식으로 건축한 듯한 목재 관람석과 여러 개의 수정구들 그리고 그 관람석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축제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썩하기 그지없다.
이런 자리에서 용사의 뒤통수를 후릴 놈이 존재할까 싶으면서도, 그럴 가능성이 있으니 미리 대비를 시킨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한숨이 튀어나왔다.
"뭐, 흔한 일이지.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동생."
관람석으로 이동한 일행들을 뒤로한 채 뭐 씹은 표정을 짓고 있던 나에게 지크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걸어오는 게 새삼 어처구니가 없다.
"자기를 향한 암살 시도일지도 모르는 사건을 앞에 두고 너무 태연하신 거 아닙니까?"
아까 에스뮈에의 이야기를 못 들은 것은 아니다. 지크는 바람의 정령을 부릴 수 있으니까. 근처에 있는 이상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는 다 들을 수 있다.
그렇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물어볼 수 있었고, 지크 역시 숨길 생각 따위 없다는 듯 어깨나 으쓱이며 대답할 뿐이었다.
"동생은 마족들과 직접 대면하는 나라 사람이라 잘 몰라서 그래. 내륙 지방의 왕국들은 용사 자체를 제국이 치는 거대한 사기행위라고 여기는 곳도 있거든."
"사기 행위요?"
"사실 마족은 좆도 아닌데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추켜세워 놓고 이득이라는 이득은 다 빨아 먹으려는 책략이라는 거지."
솔직히 용사를 이용해 이득을 볼 생각이라는 것까지는 나도 의심했다. 하지만...마족의 위협 자체를 무시하고 신명을 위조했다는 발상까지는 선 넘었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다른 세계 사람인 나나 지크도 아닌, 평범하게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놈들이 그딴 발상을 한다고?
"내륙 왕국에는 신앙도 없답니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지."
오늘따라 여러모로 지적이고 용사다워 보이는 지크였다. 그래. 지극히 맞는 말이네.
"내가 그래서 이 좆같은 새끼들을 죄다 좆같이 여기는 거야. 현실감각도 없고, 노력도 안했으면서 지들 손해 보는 기분이 들면 사실인 것처럼 들고 일어나서 물어뜯으려 하고, 정작 지들이 강해지거나 능력을 높힐 생각보단 의존할 생각을 더 많이 하는 놈들이거든."
용사로 환생해서 좋은 꼴만 봤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크는 생각보다 더 많은 못 볼 꼴을 봐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감상에 빠져 새삼 녀석이 불쌍해 보이려고 할 때, 지크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래도 이번엔 동생이 있잖아? 동생도 그런 새끼들 마음에 안 들지?"
"아주 마음에 안 들죠."
"그래. 그거면 된 거야. 어차피 지들이 지랄을 떨어 봤자 용사랑 용사를 이긴 놈을 뭔 수로 제끼려고? 이 기회에 잡아다가 개 패듯이 패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기분이 좋은 일이라니까?"
새끼. 다른 건 몰라도 멘탈 하나만큼은 용사가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