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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89화 (89/412)

본격적인 진행이 시작되며 연설을 시작한 건 그윌로 사건 때 얼굴을 비춘 웨이드 팔마혼이었다.

그의 뒤쪽으로 지들리를 비롯한 실전과 연관된 교수들이 줄을 서 있는 것으로 보고 나서야 전투학과 총괄이 의미하던 게 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전과 관련된 아카데미 수업의 관리 및 책임을 지고 있는 전투학과 총괄 교수 웨이드 팔마혼이라고 합니다. 우방국 사절분들께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하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상당히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연설의 서두를 던지며 운을 뗀 웨이드가 말해 준 것은 조 편성을 비롯한 주의사항들이었다.

던전 입구에 들어가면 조 단위로 임의의 위치에 순간 이동하게 된다는 것.

그 어떠한 환상 마법의 개입도 없으니, 위험하다 생각되면 바로 나눠 주는 귀환 스크롤을 이용할 것.

귀환 스크롤은 항상 허리에 차고 있을 것. 이는 참가자들끼리의 싸움이 날 경우 상대방의 스크롤을 찢는 것을 통해 강제로 귀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기 위함이니 이를 위반했을 경우의 불이익을 알아서 감당하라는 것.

용사의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나 보여 주기만을 위한 행사를 할 생각은 없으니 용사를 제치고 우승을 하는 이들에겐 그에 합당한 보상을 약속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수평형 던전 중심부에 있는 표식을 가장 먼저 차지한 조가 승리하는 구조라는 이야기를 매우 장황하게 설명한 웨이드의 지시에 맞춰 움직이는 교수진들을 따라 조 편성이 시작되고 나서야, 개막식 비스무리한 것이 겨우 끝나고 주변을 둘러 볼 여유가 생겼다.

"여어! 왕국기사! 오랜만!"

그리고 그 사이에 첫날부터 정겨움을 주체 못하던 에테네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겨우 닷새 만인데 한 달 만에 보는 기분 아니야?"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수업이 겹치질 않네요."

"하하하. 너랑 변경백님은 아카데미 전체 수업을 참관하는 거니까 말이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정말 기가 막히게 어긋나긴 했어."

길 가다가 한 번 정도는 마주칠 법도 했지만 제국에 온 뒤로는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다른 문제에 엮인 탓에 그러지도 못했다. 저 넘치는 살가움 때문에 꽤 마음에 드는 친구인데 여러모로 아쉽단 말이지.

"답사에 참여하나보군요?"

"이래 봬도 한 실력하거든. 던전에서 만나면 각오하라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은 기분 좋은 장난기가 가득한 터라 나도 가볍게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와 같은 조로 보이는 이들이 하나같이 지들리의 수업 때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던 이들이라는 걸 감안 하면 나와 지크의 대련 때문에 뒷수업이 무마되어 버려서 그렇지, 에테네라의 실력도 그들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래 이야기할 수는 없던 탓에 적당히 헤어지고 다른 이들을 살펴보았지만 다른 아카데미 파티는 전혀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었고, 사절들로 구성된 파티는 어째 하나같이 고운 인상은 아닌 인물들이었다.

심지어 한 명은 여자였음에도 어지간한 사내놈들보다 살벌하게 생긴 눈매를 지니고 있었는데, 사절단 파티는 그녀를 중심으로 벌써 빙 둘러 작전 회의에 들어간 듯싶었다.

결국 딱히 눈에 띄게 의심 가는 행동을 하는 이는 발견 못한 채 우리 조원끼리 모여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는 아침과는 다른 의미로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 속에서 좌절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용사 지크프리트님! 당신의 위용은 저희 산왕국 말드겐에도..."

"여신의 은총이 후광처럼 빛나는 것이 느껴지는군요! 저는 페네슈밀라 왕국에서..."

"위대한 제국과 용사님께 영광이 있기를! 저는..."

파티원 셋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용사를 향해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간신배 모드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빈말이 아니라 겉모습만 보더라도 전투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어 보이고, 마법사 같지도 않은 이들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오직 직접 용사를 대면할 절호의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서로를 향한 예의고 나발이고 몸을 밀치는 수준으로 앞 다투어 이야기하는 그들을 보며 지크가 배를 잡고 웃지 않았다면 계속 떠들어 댔을 것이다.

"껄껄. 이 새끼들 아직 내 소문을 못 들었나 보네."

솔직히 다른 상황 같았으면 말렸을 텐데, 세 명의 폭탄을 안고 가게 된 마당에 나도 어이를 상실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세 놈들은 당연히 벙찐 표정을 지으며 제대로 된 반응하지 못했다.

"예, 예? 지금 무슨..."

"이 자리에서 죄다 다리 몽둥이 분지르기 전에 닥치고 잘 따라다니기나 하세요. 이 자리는 내 성과를 니들 눈깔로 본 뒤 느그 왕국에 가서 보고하라고 만들어 준 자리지, 황가를 피해 꼬리 흔들라고 만들어 준 자리가 아니니까."

"하하, 용사님. 저희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셋 중 삐쩍 마르고 풍성한 곱슬머리를 가진 놈이 능숙한 미소와 함께 얼빠진 놈을 밀치고 나와 입을 털려고 했지만 지크는 손사래를 치며 놈의 말도 끊어냈다.

"씨벌. 던전 답사엔 말이 필요 없어요. 지금 손 흔든 네놈 손바닥에 굳은살 하나 잡혀 있지 않던 거 같은데 마법사세요?"

"예?"

"대답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아니네? 거기 그쪽 둘은?"

턱 짓으로 가리키는 둘 역시 뭔가 당당하게 주장할 건 없는지 우물쭈물 거렸으나, 그나마 덜 주춤거린 마지막 한 놈이 갑자기 정색하며 언성을 높였다.

"너, 너무 무례한 것 아니오?! 우리는 각국의 사절로 이 자리에 참석..."

"아 사절이면 구경이나 하지 왜 실습에 낀다고 지랄해서 사람 귀찮게 하냐고!!"

그야말로 급발진이라 표현하는데 모자람이 없는 모습으로 윽박지르는 지크의 외침에 세 놈이 뒤로 물러났다. 내가 봐도 지당하고 합당한 외침이었다.

유력 국가의 인사들을 모아둔 자리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다.

전투할 줄 알고 실습에 참여한 것과 그렇지 못함에도 참여 의사를 밝히는 건 별개다. 오히려 보는 눈이 많으니 국가의 위신과 연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저들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둥 허언을 내뱉으며 참가한 것이었을 테니 말할 것도 없다. 어차피 용사의 성과를 보기 위한 자리니까 자기들이 굳이 나설 필요도 없이 용사가 알아서 다 처리할 것이고, 거기에 자신들의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는 계산까지 마친 것이리라.

평소 같았으면 나도 같이 쌍욕을 박아줄법한 정신머리였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지금은 양반으로 느껴진다.

쟤들은 최소한 용사라면 그 정도는 할 거라는 믿음이 있는 상태라는 거잖아? 심지어 한 놈은 여신을 운운했으니 최소한 용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의심하는 놈들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최악이 아닌 차악이었다.

진짜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현실이 그러네.

"미리 말해 두는데, 내가 너희가 싸지른 똥까지 다 치우며 나아가 줄거라고 믿지 마라. 괜히 아카데미에서 너희한테 비싸디 비싼 탈출용 귀환서를 하나씩 지급해준 게 아니에요. 전투 불능. 혹은 위험이 예상되면 가차 없이 찢어라. 뒈져도 책임 안지니까."

"다, 당신은 용사가 아닙니까? 어찌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한단 말입니까?"

산왕국인가에서 왔다고 했던 코가 유독 큰 놈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외치는 말에, 지크는 팔짱을 낀 채 덤덤히 대답해주었다.

"용사라고 뭐 칼질 한 번에 왕국 전체의 위협을 썰어 버리냐? 최선을 다 하더라도 못 구하는 사람은 세상에 어딘가에서 계속 나오는 법이지. 난 거기에 얽매여서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까지 같이 죽일 생각은 없다."

"그, 그게 지금 마족에게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해야 할 용사가 할 소리란 말입니까?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워워. 말 조심하시지? 여기 진짜 고통받는 이들이 사는 이티스엘에서 오신 변경백님의 수행원 분이 계시거든?"

이 촌극이 빨리 끝나길 바라며 그냥 조용히 짱박혀 있던 나를 향해 지크가 턱짓하자 세 놈의 표정이 미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진짜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모양새라 더 어이가 없었다.

"고통받는 이들 운운하기 전에 니네들 나라가 이티스엘에 뭘 해줬는지 이 친구한테 말해 보던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 마족과의 전선에 들어간 다른 국가가 생긴 거냐?"

"...이 일은 꼭 정식으로 항의 할 것입니다."

"지랄났네. 지크프리트도 이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새끼들아. 내가 용사지 니들이 용사냐?"

지크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내게 몸을 돌렸다.

"엘드미아. 모험가 일 좀 했다 그랬지? 주로 뭘 담당했냐?"

평소처럼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 주변을 신경 쓰기 때문이겠지. 태도도 평소보다 좀 더 사무적인 느낌이 강했다.

"척후와 전투. 오늘 도움될 만한 건 그 정도겠죠."

"충분해. 저것들 보아하니 아무 도움도 안 될 게 뻔하다. 같이 고생 좀 해보자고."

고생은 용사님이 다 하셔야죠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장단은 맞춰 주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부터 참 유쾌하기 그지없다. 사절단도 여간내기들은 아닌 거 같은데 생도들까지 합쳐서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짐 덩이만 셋이라.

거의 악의적이라고 해도 좋을 밸런스인데...대체 제국과 에스뮈에는 뭘 노리는 건지 점점 궁금해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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