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90화 (90/412)

"상당히 악의적인 조합이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자신의 중얼거림에 웃음기를 지우지 않으며 되물어보는 에스뮈에였으나, 결국 라그니스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저게 최선이겠네요."

무능력한 간신들이지만 최소한 배후를 습격하지는 않는다.

역으로 말하면, 제국은 저들을 제외한 다른 왕국의 사절들을 잠정적인 위협으로 여겼다는 소리다.

"저 사나운 눈매의 여인이 보이느냐? 이것저것 특징적인 외모를 감추긴 했으나 해상왕국 볼타베이의 노래하는 창 세벨라이니라. 다른 이들은 알려진 이들은 아닌 거 같다만...아무런 주저도 없이 그녀를 중심으로 작전을 구상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국이 그간 꽤 밉보였던 게 아닌가 싶느니라."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티스엘 내의 일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바쁘기 그지없던 라그니스였기에 세벨라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에스뮈에의 뉘앙스만으로도 그다지 달가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물론 정작 그런 짐작을 하게 만드는 어조와 달리 에스뮈에는 웃고 있었지만.

하지만 에셀루아가 보인 반응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세이렌 세벨라? 범죄자가 아닙니까!"

"목소리를 낮추거라 에셀루아. 언성을 높힐 사안은 아니니라."

범죄자를 사절의 수행원이라고 내세웠는데 그게 언성을 높힐 사안이 아니라고? 쉬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라그니스만이 아니었는지 에셀루아와 다른 용사의 연인들도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뮈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는 태도로 일관하며 관람석 너머에서 자신을 향해 예를 취하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반응하며 나직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녀가 타국의 함선을 약탈했다는 정황만 있을 뿐 증거가 없는 이상, 그녀의 무죄를 주장하는 볼타베이에게 우리는 불만을 표할 수 없느니라."

"볼타베이에 노래로 강화를 누리며 창을 휘두르는 여성들이 그렇게나 많다던가요?"

"목격자가 없으니 별수 없지 않겠느냐."

멀리서보면 정말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에셀루아에게 고개를 돌린 에스뮈에는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여는 그 진실을 오늘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기대하고 있느니라."

"...그 대가가 용사의 목숨이라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합니다."

"미련한 것. 용사는 명예직이 아니니라. 그리고 이번엔 대련이라 하더라도 용사를 이긴 자까지 함께 있지."

그 미소는 어찌 보면 평범했지만, 달리 보면 짓궂어보이기도 했다.

"과연 그들에게 얼마나 명확한 정보가 들어갔을지 궁금하지 않느냐?"

"...수를 써 놓으셨군요?"

"여는 대부분의 수를 준비해 놓느니라. 너무 멍청하거나, 상식적이지 않은 이를 대할 때를 제외하면 말이지."

느긋하게 준비된 소파에 자리 잡은 에스뮈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준비된 포도를 한 알 씹어먹으며 대화를 멈췄다.

라그니스는 그 태도에 불만을 느꼈지만, 최소한 이번만큼은 그녀가 엘드미아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다행스럽게 여기기로 했다.

그녀가 엘드미아를 사지로 몰아넣는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볼타베이의 노래하는 창 세벨라.

바드의 재능과 창술의 재능을 동시에 겸비한 그녀의 무훈을 칭송하며 볼타베이의 국민들이 붙여 준 이명. 하지만 그녀는 그것보단 그녀의 적들이 붙여 준 이명이 더 마음에 들었다.

노래를 불러 뱃사공을 유혹해 죽이는 마물 세이렌.

그만큼 치명적이고, 공포의 존재로 여겨지는 편이 무술을 익힌 자답다는 느낌이 들어서 훨씬 와 닿았다.

"저들은 정말 용사 하나로 전황이 뒤바뀔 것이라 진심으로 믿는걸까요?"

"흥. 어차피 별거 없는 이종족에 불과한 것을 마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헛바람이 든 것에 불과하죠. 이티스엘조차 수 년을 버티면서 싸워오고 있는데 그런 종족이 어찌 인류를 위협한단 말입니까?"

"무지몽매한 자들이란 그런 법이지요. 거짓말의 규모가 너무 거대하면 오히려 믿어 버린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개탄할 일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편하게만 굴러간다면 어찌 제국이 제국으로 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실로 그러합니다."

그런 그녀의 이명을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은 그녀를 조장으로 내세우는 데 아무런 이의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볼타베이와 알게 모르게 신경전을 벌이는 인근 국가 파즈슨의 수행원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만큼 그녀의 실력은 확실했다. 과거 스무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볼타베이 해룡 기사단의 단장직 하나를 맡은 것은 허명이 아니었으니까. 이들 역시 각자의 나라에서는 한 실력 하는 이들이었지만 세벨라의 명성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한 나라를 대표하여 제국에 방문한 이들 중에서도 이렇게 바른 시야를 지닌 분들만 골라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야말로 진정 신의 뜻이겠지요."

제국 신성회의 선포로 용사가 세상에 알려진 뒤 수 년간 그들이 소속한 왕국은 이티스엘의 지원보다 첩보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 덕분에 이티스엘의 전선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전황은 실시간으로 각 나라 왕실에 전달되다시피 해왔고, 비록 상세한 내용들까지 알 수는 없을지언정 모두 동일한 결론을 내릴 정도는 되었다.

마족은 위협이 아니다.

종종 마법으로 인해 폭발적인 규모의 손실이 날 지언정 모험가 선에서 끝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티스엘이 7년에 다다르는 시간 동안 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번에 이티스엘의 변경백을 직접 초청했다더군요. 그것도 저희와 다르게 나흘이나 빨리. 뭘 하고 싶은 건지 뻔하지 않겠습니까?"

"선대 변경백이 전사해서 아직 어린 영애가 뒤를 이었다고 하는데...아비의 죽음 후에도 시간을 끌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불과하겠지요."

세벨라도 딱히 그들의 의견에 반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잡담에 동조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신경 써야 할 건 조국의 이익이었고, 그걸 위해 할 일은 잡담이 아닌 계획의 수렴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도착하자마자 신경 쓰이는 소문 하나를 들었기에 그것만큼은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변경백의 수행원이 용사를 이겼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더군요."

"저 역시 들었습니다만...아무리 생각해 봐도 띄워주기에 불과한 거 아니겠습니까? 명색에 용사를 자랑하기 위해 만든 자리이면서 용사가 패배했다니. 그야말로 희극이지요."

"역으로 그런 헛소문을 퍼트려 가면서까지 이티스엘을 띄워주려고 하는 의도가 뻔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도착과 동시에 알 수밖에 없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 제국이 그런 치부를 훤히 드러낸 채 자신들을 맞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고민할 가치도 없는 거짓 정보였다.

"마족을 핑계 삼아 어지간히도 주변 왕국들을 눌러놓고 싶었나봅니다. 혹은...1 황녀와 2 황자 간의 알력 싸움이 예상보다 치열하다던데, 그게 연관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말을 꺼낸 것은 파즈슨 왕국의 수행원이었다.

그의 시선이 귀빈석으로 지정된 곳에 앉아 있는 에스뮈에와 라그니스에게로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그들이 보기엔 하나 같이 미모가 출중한 이들이었고, 심지어 사이마저 좋은 것인지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도 명확해보였다.

"1 황녀는 욕심과 지성이 비례하지는 못하나봅니다."

"흠흠. 너무 적나라하군요. 이런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런, 실례를..."

용사를 통해 제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티스엘의 마족 전선을 책임지는 게 분명할 변경백을 통해 왕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며 마족과의 전쟁이 본격화 될 경우 이득을 양분하고 다른 국가들을 누르려는 의도이리라.

딱히 잘못된 발상은 아니지만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인 탓에 속이 너무 뻔히 보이는 수작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나저나...코흘리개 아이들을 상대로 이런 자리는 가지는 것도 좀 우습긴 하군요."

"그만큼 본인들이 자신 있다고 하는데, 저희들이 맞춰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 중에서 생도들과 비슷한 나이의 인물들은 없었다. 가장 젊은 것이 스물 중반인 세벨라였고, 가장 나이 든 이는 서른에 다다르기까지 했다. 실질적인 국가 간의 전면전을 경험한 이들은 없을지언정 영지전을 치르고 명예를 건 결투 정도는 이골이 날 정도로 겪어온 그들이다.

그 상대로 학생들을 내밀다니, 어이가 없다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제국이 괜찮다는데 본인들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애당초 목적을 편히 완수할 수 있는 정당한 기회를 얻었으니 마음껏 실력을 발휘 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한낱 모험가들이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가는 던전따위를 답사하는데 계획이랄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저희의 목적이 같음을 확인했으니 용사와 만나는 것에만 집중하면 되겠죠."

용사의 거짓된 후광을 벗겨내는 것.

그들의 공통점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자다운 모습을 보여 이 기회에 자국의 위용을 떨쳐보지요."

세벨라의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음침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자신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감추기로 동의했다.

그 행동을 마친 뒤에도 그들은 매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오늘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자신감일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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