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에도 능통한 사람답다는 말은 취소다.
"파아워어어어어!!!"
지크 놈이 벽을 부수는데 쓴 건 철저한 물리력이었으니까.
한 껏 뒤로 물러나 마법을 쓰는 시늉을 하던 놈이 고함과 함께 나를 스치며 달려 나가 벽에 어깨빵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고, 그 충격에 벽에 금이가는 아주 찰나의 순간 내가 느낀 것은 묘한 깨달음이었다.
이세계인의 기준에서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의 연속이라 할 수 있는 행동.
얼핏 보면 어차피 아무도 못 알아들으니 상관없다는 듯 떠벌리는 전생의 밈meme이 사실은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한 행동인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자신과 같은 위치의 전생자가 있을 경우 이를 알아보고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속에서 거리낌 없이 선보이는 거라던가.
물론 그런 걸 심도있게 고민할 여유따위 없었던 내 몸은 이미 마력을 두르고 지크의 뒤를 따라 달렸다.
다행히 놈의 물리력은 벽을 박살 내는데에 아무런 부족함도 없었다.
-콰아앙!
오러를 두르고 꼴아박은 지크에게 처참하게 찢긴 벽이 스티로폼마냥 휘날리며 사방으로 비산하는 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어도 확실하게 벽 너머의 인물들을 주저하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게 사람에게 날아가서 피해를 줄 정도는 되지 못했다. 에잉 쯧쯧.
뒤늦게 쏠리는 시선 같은 건 없다. 그렇게 소리지르면서 존재감을 어필했는데 벽이 부서지고 나서야 보는 애들이 얼마나 있겠어?
"지크다!"
"젠장! 일단 지크부터 친다!"
"인류의 기술은 승리한다아앗!"
문제는 하필 싸우고 있던 게 학생들이었던지라 엄청난 결속력을 보이며 칼날을 우리 쪽으로 겨눴다는 점이지. 그나저나 용사를 상대로 인류를 운운하는 놈은 진짜 대체 뭐하는 놈이냐.
"크하하하! 덤벼라 애송이들아! 몇 년 간 못 이기던 게 하루 아침에 바뀌겠냐!"
슬프지만 지크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지크는 마법도 정령술도 쓸 수 있으니까 사실 어지간한 머릿수로는 대등할 수는 있어도 우위를 점하기 힘들다.
정작 나는 내 한 몸으로 싸우는 게 고작인지라 일정 실력 이상의 전사 셋 정도가 손발만 맞춰도 많은 고민을 해야하지.
"어...? 잠깐! 지크가 있으면...!"
그렇기에 나는 기습을 선호한다. 한 명이 줄어들면 두 명을 줄일 기회도 나오고, 그렇게 순차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 수적 우위는 오히려 압박감으로 다가와 의도치 않은 실수를 야기하는 법이니까.
우리의 위치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멀리 있었기에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여유가 있던 학생이 자신이 깨달은 걸 미처 다 입에 담기도 전에 그녀의 허리 춤에 있는 스크롤을 향해 내가 던진 날카로운 돌이 그대로 스크롤을 찢으며 그녀를 강제로 송환시켜 버렸다.
"왕국기사다!"
"에테네라! 우리 팀이 지크를 상대하겠다!"
"포위! 검 지크 대형! 목표는 무력화!"
진짜 말만 들으면 무슨 대對용사 특수 요원인 줄 알겠네. 한 파티의 리더를 에테네라가 맡고 있다는 사실에 소소하게 감탄하면서도, 나는 나를 향해 달려오는 인원들을 확인했다.
남여 검사 둘에 거리를 두며 영창에 들어가는 여 마법사 하나. 무언가를 준비하는 에테네라를 제외하면 나머지 다섯 명이 지크를 노리는 것으로 보아 방금 송환시킨 여학생도 에테네라 파티였나보군.
"배운 기본기가 다릅니다!"
아직은 그래도 동화 속 기사님으로 남아 있으니 꼬박꼬박 존대를 해주며, 나를 향해 좌우로 치고 들어오는 친구들을 마력을 통한 가속으로 지나치며 마법을 준비 중이던 여학생에게 달려들었다.
오가토르프의 기사들한테도 먹히던 이중 가속이다. 아무리 아카데미 학생들의 수준이 높다 한들 이건 반응 못 하지.
"흐햑?!"
"자기 몸은 스스로 지켜야죠."
정 안 되면 시전 중이던 주문을 강제로 터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거리를 둬야하지만 거기까진 생각 못하겠지.
당황하며 뒤로 거리를 벌리려다가 작은 돌뿌리에 발이 엉켜 쓰러지기 직전인 여학생의 허리 춤에 달린 스크롤을 검 끝으로 찢어내며 지나치자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송환이 이뤄졌다.
"응?"
근데 그렇게 여학생이 사라진 자리에 있어야 할 돌뿌리가 안 보인다. 자기 발에 자기가 걸린 거였나? 아닌데? 분명 돌을 봤는...오?
"하아압!"
결국 늦어 버렸음에도 방향을 틀어 나에게 달려오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 하니, 개쩌는 가설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참겠다.
빠르게 몸을 틀어 바닥에 떨어진 돌을 대충 줍는 척을 하자, 뒤로 주춤이며 스크롤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내 손의 움직임을 살피는 남학생과 조금이라도 더 빨리 거리를 좁혀 내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여학생의 움직임으로 인해 두 사람의 간격이 어긋났다.
"으아, 안 되는데!"
눈치 빠른 에테네라의 외침은 당연히 아무런 경고도 되지 못했다.
어차피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휘둘러 얼굴에 뭘 던지는 척을 한 것만으로도 움찔거린 여학생의 검을 위로 쳐 내고는 그대로 겨드랑이 밑에서부터 밀어 올리며 남학생 쪽으로 내던지자, 당황한 남학생이 쓰러지려는 여학생을 황급히 받아내며 같이 나뒹굴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여학생의 검을 받아 그녀의 허리 춤에 있는 스크롤을 찢을 때까지도 둘은 당혹스러움 속에서 바둥거리다가 사이좋게 송환되었다.
"역시 범위형 송환이었네."
남학생의 스크롤을 찢지 않았음에도 같이 사라졌으니 고민할 여지도 없다. 어쩌면 비상 사태를 대비해서 저렇게 만든 것일지도?
그래도 남학생이 차고 있던 스크롤이 자리에 남아있는 건 예상 밖이었다. 같은 마법이 걸려있다고 저러는건가? 워낙 비싼 물건이라 평소에 쓸 일이 없어서 알 수가 없네.
"에이. 쉽게 풀리는 게 없구만!"
입맛을 다시며 나와 눈을 마주친 에테네라가 피식 웃어보였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혹시 뭔가 비장의 수가 있는건지 빠르게 눈을 굴려봤지만...분명 방금전까지 뭔가 준비를 하는 것 같았음에도 이제와서는 그걸 마무리 지었다는 느낌보단 그냥 손을 놨다는 느낌에 가까워보였다.
"너무 순식간에 끝났으니 실력 발휘는 다음 기회에!"
그러고는 아무 주저도 없이 자신의 스크롤을 찢어 포기하는 게 아닌가.
결국 순식간에 송환되며 사라지는 에테네라를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감탄 뿐이었다.
"와. 쟤도 만만치않은 놈일세."
단순히 쾌활한 분위기 메이커인 줄 알았는데 묘하게 상황판단이 빠르다. 하긴,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지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겠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수준이 안 맞긴 하다. 나도 나지만 확실히 동생도 다재다능하네."
그런 에테네라에게 감탄하며 남학생이 남기고 간 스크롤을 혹시 몰라 챙겨서 품에 넣으니, 지크가 검 한 번 휘두르지 않은 사람처럼 태연하게 다가왔다.
아니, 진짜 안 휘두른 거 같은데?
놈의 뒤 편을 슬쩍 보니 여전히 우리가 넘어온 벽 저편에서 눈치나 보고 있는 세 놈 밖에 없는 상태다.
"언제 다 이기신겁니까?"
"바람의 정령이 장식으로 보이니? 에테네라 녀석이었으면 모르겠는데, 딴 놈들은 머리가 좀 굳어 있는 편이거든. 적당히 호응하는 척 하다가 죄다 스크롤을 찢어버렸지."
내가 너무 집중해서 소리를 못 듣고 있었나 싶었더니, 진짜 말 그대로 순살을 시켜버린 뒤 내가 뭐 하나 구경이나 하고 있었나보다.
정령술 진짜 너무하네. 아닌가? 이건 용사 보정이 너무한건가.
"흐음. 허술했던 검술하고는 달리 나머지는 그래도 열심히 하셨나봅니다?"
"그, 내가 형식에 좀 약한 게 있어. 그래도 너한테 진 다음엔 검술 수업 열심히 듣고 있어 임마."
"그런데도 그 무식하게 큰 대검을 계속 쓰는겁니까?"
"좆밥들에겐 이 정도로 충분하지. 딱 기다려라. 형이 나중에 기똥찬 검술 보여준다."
영 못 미더운 반응이지만 그래도 뭐 본인이 깨달은 바가 있어서 수업 태도를 바꿨다는데 내가 뭐라 할 건 없지.
적당히 수긍하며 다시 이동을 하기 위해 고개를 움직여 세 짐덩이들을 부르려고 했을 때였다.
"과연 신이 점지해주시는 용사답군요. 자신만만한 모습이 참으로 영웅답습니다."
이 놈들이 아직도 포기를 못했나 싶으며 바라본 곳에 짐덩이들은 온데간데 없고 던전에 진입하기 전에 잠깐 봤던 사절단 파티만이 있었다.
솔직히 인기척도 못 느끼고 있었던 터라 적지않게 놀라버렸다. 그건 지크도 다를 게 없었는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질문을 던졌다.
"뭐야, 어디서 나타났어?"
그을쎄에. 멀쩡히 있는 길을 내버려둔 채 벽 뚫고 온 건 우리니까, 사실 저들은 그냥 우리가 원래대로 가야했던 길 맞은편에서 오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들려온 대답은 정확히 내 예상과 일치했다.
"맞은 편에서 왔지요. 용사님이 벽에 구멍을 내지 않으셨다면 저희와 먼저 싸우게 되셨을 겁니다."
처음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도 잠깐 봤었던 사나운 인상의 여성이 리더를 맡기로 한 것인지 다른 이들은 별 말이 없었다.
"거기 있던 머저리들은?"
"당연히 송환시켰죠. 적의 수는 줄이는 게 제일 아니겠습니까."
"에이씨.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대충 올 걸. 결국 고블린 한 마리 씩 잡은 거 말고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놈들이었잖아."
그래도 던전 안에서 몬스터와 조우할 경우 셋이서 하나 정도는 발을 잡아야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여겨서 잔뜩 긴장하게 만들고 데려온건데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게 되어버렸다.
사실 큰 웃음을 선사해줬으니 내 입장에서는 제 역할을 한 거 같지만 지크는 아닌가보다.
"어쨌든, 한 번에 털어내는 건 좋군요. 용사님을 이긴 뒤에 학생들을 신경쓰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는데 말이죠."
"뭘 당연히 이길 거라는 듯이 떠들고 있냐?"
"후후. 학생 수준에서 놀기엔 저희가 겪어온 게 너무 많아서 말이죠."
단창을 고쳐쥐며 여성이 웃어보이자 뒤에 있던 이들도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진 마시죠. 그간 용사라는 허명 아래 평민일 때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나날을 보내셨을 거 아닙니까?"
"...야. 쟤 뭐라는건지 넌 혹시 이해가 되냐?"
갑자기 나타나서 별 희안한 소리를 지껄이는데 라는 소감을 얼굴로 말하는 지크에게 난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용사님을 좆으로 본다는 소리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핵심 요약에 방향성은 다를지언정 모두가 감탄했다.
내가 한 줄 요약을 좀 잘하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