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93화 (93/412)

"그쪽은...이티스엘의 수행원이겠군요."

"그쪽은 뉘신지 모르겠지만 불신자라는 건 알겠군요."

나는 전생에서 종교를 믿지 않았다.

신적인 무언가가 존재할 수 있다고는 믿을 지언정 그게 일상생활에 무언가 영향을 끼친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지금은? 환생까지 한 마당에 안 믿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지.

당연히 다신교가 기본인 이티스엘의 취지에 맞게 다양한 신들을 긍정하면서,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나에게 두 번째 삶을 준 존재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짐과 동시에 언제든지 제대로 알게 되면 신앙을 바칠 준비도 되어 있는, 은혜를 아는 남자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국가 간의 알력 다툼 같은 게 있다 한들 엄연히 기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용사의 존재를 저렇게 색안경부터 끼고 무시하려드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어진다.

"불신자라뇨? 저도 신앙이 있습니다만."

"설마 지나가는 개도 안 믿는다는 유일신앙이십니까?"

"지, 지나가는...뭐라구요?"

"지나가는 개도 안 믿는다는 유일신앙이십니까?"

정말로 못 들어서 반문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말해주었다.

제국조차 국교가 제국 신성회일 뿐인 것이지 다른 신들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근데 쟤들은 첫 대면부터 용사를 허명이라 언급했잖아? 그러니 저들의  반응을 보고 자기들이 믿는 신만이 진짜 신이라고 우기는 유일신앙이냐고 물어보는 건 결코 편견도 아니고 부당한 질문도 아니다.

"...후. 신실한 건 좋지만 아직 어리군요. 이티스엘에서 나고 자랐다면서 용사 한 명이 정말 마족을 모조리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올 거라는 신탁을 믿는단 말입니까?"

"이티스엘 근처에도 안 와봤으면서 뭘 안다고 막 지껄이시는 겁니까. 심지어 신탁을 왜곡하는 꼴이 딱 사교도스럽군요."

"무, 무슨 소리를! 당장 정정하십시오!"

그래. 유일신앙까진 그냥 욕 정도로 들을 수 있겠지만 사교도라고 언급되는 건 목숨이 달린 문제라 결코 가볍게 넘기지 못할 거다. 근데 별 수 있나? 진짜 그러고 있는데.

"아닙니까? 그렇다면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신탁은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지요. 정확한 신탁은 '용사가 마왕을 몰아내고 인류에 안정을 찾아오리라.' 입니다."

"대체 그게 뭐가 다르다고...!"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평화'를 가져오지도 않고, '마족'을 물리치지도 않습니다. '마왕'을 '몰아냄'으로써 '안정'을 찾아오는 거죠. 어딜 봐서 그쪽이 주장한 사교도스러운 발언과 같은 의미라는 겁니까?"

놀리려는 목적으로 사교도라고 하긴 했는데 정말 이 둘의 차이점을 못 느낀다고? 진짜 사교도인가 싶어 진짜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하는데...?

"자, 자꾸 사교도 사교도 하지 마시죠! 이 이상은 참을 수 없습니다!"

"기적의 산물인 용사를 의심하는 행위는 곧 제국 신성회가 섬기는 빛의 신을 의심하는 행위 아닙니까? 더 나아가 제국이 신을 기만하고 신탁을 위조했다는 해석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본인이 먼저 모욕을 던져놓고서는 대체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겁니까?"

"크윽...!"

그래도 아예 빡대가리는 아닌 건지 비겁하고 무자비하게 던진 팩트를 맞고 주춤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제야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지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에게 질문했다.

"그러니까 지금 쟤네는 나를 가짜 용사라고 여긴다는 거지?"

"정확합니다."

"...? 그게 문제 될 게 있어?"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어보는 그 모습에 오히려 사절단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용사를 바라봤다. 그래, 그들 눈에는 자신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심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 이상할 수 밖에 없겠지.

용사 의존증을 극도로 혐오하는 지크는 오히려 자신을 불신하고 자립해서 마왕을 물리치겠다는 발상을 열성적으로 옹호하니까. 지금 저들의 의견을 그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용사 의존증 같은 거랑은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라 난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저들은 용사님만 무시하는 게 아니라 마왕의 위협도 무시하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엥? 그건 또 뭔소리야?"

"사실 마왕과 마족따위 별 것도 아닌데 이티스엘이 제국이랑 짜고 인류의 위협인 것처럼 거짓말이나 하며 주변국들을 압박한다고 믿고 저러는 거라는 말입니다."

멍청해 보일 정도로 얼 빠진 표정을 짓던 지크가 순식간에 얼굴을 구겼다.

"에라이 씨발것들아!! 마왕의 위협이 개구라였으면 내가 여신한테 머리끄덩이를 쥐어잡힌 채로 개처럼 고생이나 하고 있겠냐!!"

그야말로 눈이 돌아간 지크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몸을 틀어 사절단 파티를 향해 돌진했다.

음. 이번엔 진짜로 화날만 했어.

용사 지크프리트가 거대한 대검을 들고 달려드는 것을 보면서도 사절들은 침착했다.

물론 그의 접근이 저 거대한 쇳덩이와 다를 바 없는 검을 쥐고 있는 것 치고 빠르긴 했지만, 그들도 오러 사용자였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한 상태였다.

"정령과 마법부터 끊겠습니다!"

왕국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제국에 파견한 게 아니었다.

제국이라면 충분히 용사를 과시하기 위해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 짐작했고, 그랬기에 그간 제국에서 흘러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취합해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며 용사를 상대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준비 자체는 단순했다.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마법과 정령의 재능을 지닌 용사에게서 그 재능들을 떼어놓는 것.

다행히 세상에는 이미 정령과의 교감을 차단하기 위한 봉인석과 마나 억제구가 존재했고, 사용하기 위한 조건도 특별하지 않았으며, 성능조차 확실했다.

그것만으로도 능력 중 2/3가 봉인되는데 자신들의 실력이라면 겨우 검술만 남은 용사를 못 이길 리 없다. 파즈슨 왕국의 수행원은 그런 자신감 속에서 품에 넣어 두었던 두 도구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이제 그의 손끝에서 막 벗어난 두 마도구는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이고 제 성능을 발휘할 것이다.

"어이쿠. 별걸 다 꺼내시네."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고쳐쥐려는 순간.

용사의 뒤에 서 있던 이티스엘의 수행원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어?"

그리고 마도구는 고장 난 것마냥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졌다.

이미 사전 계획을 마치고 그가 던진 마도구가 발동하는 것을 기점으로 행동에 들어가려 했던 사절단 파티의 모두가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차라리 아예 아무것도 안 했는데 발동이 되지 않았으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티스엘의 수행원은 말 한마디 내뱉는 것을 통해 이 상황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탈바꿈 시켜버렸다.

그 탓에 모두의 발이 아주 잠깐이나마 묶이고 용사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크윽!"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거기에 위기감을 느낀 세벨라가 앞으로 튀어 나가며 노래를 불렀다.

"-------!"

바드의 노래는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언어의 형태를 벗고 마법이 되어 구현된다. 그 과정은 일반적인 마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인 덕에 마나 억제구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마법이 봉쇄된 용사를 좀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게 이런 어이없는 형태로 틀어질 줄은 몰랐지만, 그래봤자다. 마법이든 정령이든 무언가 시도하기 전에 치면 그만.

세벨라는 갑자기 강화되는 신체 능력에 능숙하게 적응하며 용사의 왼쪽 허벅지를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육안으로 식별 가능하던 일격이 급가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공격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쓰러졌던가.

이 정도의 지근거리에서는 무조건 당할 수 밖에 없는 일격이라고 세벨라는 자신했다.

"뭘 믿고 그렇게 느려 터졌냐!"

거대한 검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휘둘러지며 풍압과 함께 그녀를 후려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콰앙!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처음엔 빙글빙글 도는 듯한 세상에 두 눈을 의심했고, 그 다음엔 그냥 모든 걸 의심했다.

쇳덩이에 후려맞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충격 속에서 그대로 벽에 날아가 부딪친 세벨라는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짧은 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론은 단순했다.

사람만 한 검이, 무슨 숏소드 휘두르는 것마냥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져서 자신을 벌레 쳐 내듯이 쳐냈다.

그저 그뿐이었다.

'마...법...검...?'

그럴 리 없다. 마법으로 무게를 없앤 무기는 무게에서 오는 위력도 없어진다. 저건 그저 평범한 검에 불과하다. 충격으로 인해 쉬이 정리가 되지않는 머리로도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아무리 오러를 둘렀다 하더라도 저 속도는 이상하지 않나...?

"크흡...!"

삐그덕 거리는 관절에 힘을 줘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 용사를 바라본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 있는 사절단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용사는 마법도, 정령술도 쓰지 않은 채 그저 쇳덩이만 연신 휘둘러서 그들을 패고 있었다.

"일어나 이 새끼들아! 존나 자신만만하더니 애들만도 못하냐!"

"크아악!"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수년 간 검술을 연마하며 살아 온 이들임에도 검술이고 뭐고 없이 휘두르기만 하는 걸 막지 못해 벽으로 튕겨 나간다. 막기는커녕 어떻게 피해야 할지 반응조차 못 하는 모습은 사람과 싸우는 게 아니라 대형 몬스터와 대면한 것 같았다.

"허명이라며 이 자식들아!! 왜 놀고먹기나 하던 용사 새끼를 잘난 기사 씩이나 돼서 이기질 못해! 이러다가 제국이 니네 나라 다 주워 먹겠다! 일어나!!"

쇳덩이와 다를 바 없는 검을 막무가내로 휘두르고 있음에도, 용사는 조금도 지치는 기색 없이 길길이 날뛸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날뛰는 용사에게 대항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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