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낙엽이라고 하던가?
개인적으로는 파리채에 처맞은 벌레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건 너무 심한 평가 같으니 그냥 추풍낙엽이 나을 것이다.
저 거대한 쇠몽둥이에 처맞고 날아가고 바닥을 구르는 모습은 너무 처절했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 하지만, 벌떡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낑낑거리며 움직이는 사이 이미 지크가 한 번 더 휘두른 검에 맞고 반대편으로 구를 뿐이다.
물론 그들의 처절함은 나의 즐거움이지. 재밌어.
그래도 혹시 몰라서 지크에게 조언 한마디만 던져 주기로 했다.
"용사님. 수정구를 통해 관객들이 보고 있다는 거 잊은 거 아니죠?"
"내 알 바냐!"
뭐, 받아들일지 말지는 본인이 판단하는 거지. 어차피 대화는 송출되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팝콘이 없다는 게 너무나도 아쉬워질 무렵에 한 켠에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크흑...어, 어째서 이런..."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며 창을 찔러넣다가 그대로 튕겨 나간 여성이었다. 물론 그게 버프 효과를 지닌 마법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었지만, 처음엔 진짜 정신이 나간건가 싶더라니까.
"누가 들으면 굉장히 억울하고 부당한 결과를 맞이한 줄 알겠군요."
그나마 처음에 튕겨 나와 저들처럼 지속적인 고통에서는 해방된 상태인 사나운 인상의 여성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분하다는 듯이 땅을 치는데,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저건...사술이야...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세상에. 용사님이 지금 다 성장한 것도 아니고 은銀급 모험가만 하더라도 저거보다 몇 배는 더 날아다닐 텐데 대체 무슨 삶을 살아왔던 겁니까?"
누가 보면 얘도 전생한 줄 알겠다. 기본 스펙이 사기인 건 맞지만 높은 급의 모험가들은 물론이요 오가토르프 가문에서조차 쟤보다 강한 기사들이 있을 지경인데?
하지만 어이없게도 여자의 반응은 당당했다.
"저, 저 나이에 저게 가능하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지금 자기보다 어린애가 더 세다고 질질 짜는 겁니까?"
생긴 거랑 다르게 사상이 굉장히 복고풍이시네.
정말 진심으로 궁금해서 되물어본 거였는데 그걸 모욕으로 받아들인건지 여성은 이를 즈려물었다.
"내가...! 이 볼타베이의 세이렌 세벨라가! 해룡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이 내가! 겨우 그딴 이유로 억울해 한다고 하는 것이냐!"
아, 그런 이름과 직위를 지니셨군요. 자기소개도 안 하고 시작하시길래 전혀 몰랐지.
그나저나 첫 대면의 존칭은 어디 가고 이젠 아예 반말이네. 어쩌면 그들의 상상 속에서 지크와 나를 이긴 다음에 이런 태도를 보이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용사조차 제대로 대우 안 해주는 인간이 다른 나라 사람을 제대로 존중할 리가...없지...
어? 생각해 보니까 화나네?
"어어, 그런 반응 별로 안 좋아하는데. 최근에 루드라에서 온 개새끼 하나도 그러다가 죽었는데."
"...뭐?"
"루드라의 개새끼. 그윌브였나? 지금 당신 반응이 그 친구랑 비슷한 거 같아서 충고드리는데, 그냥 누워 계시죠. 아니면 귀환 스크롤 꺼내놓고 덤비시던가."
촉은 온다. 이 여자, 세벨라는 딱히 약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하냐고 하면 그것도 조금 애매하지 않을까 싶지만, 아무튼 진짜 엄청나게 방심했다는 건 사실이다.
상대방이 자기보다 절대적으로 하수일 거라 여기고 어쭙잖게 허벅지따위나 노리며 손대중을 했으니, 그 예상보다는 훨씬 강한 지크한테 수를 빼앗길 수밖에.
근데 그 빼앗긴 한 수가 하필 저 쇳덩이인 탓에 타격이 컸을 뿐이다. 당장 저기서 구르고 있는 기사들도 대체 저딴 무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열심히 맞은 거지, 지크가 골고루 때리다가 놓친 두 명은 그렇게 맞고도 다시 일어나서 각을 제고 있다.
나도 아직은 동화 속 기사님이어야 해서 쓰러진 걸 노리지 않을 뿐이지, 실전이었으면 세벨라한테 진즉에 달려가서 사커킥 한 번은 더 날려 기절부터 시키고 봤을 수준은 된다.
"그 오만함과 실력으로 미루어 볼 때, 저희가 당신들을 이기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스크롤을 강제로 찢어서 송환 시키는 거라 믿은 거겠죠. 그러니까 교수의 지시사항과 달리 스크롤을 숨겨 놓은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일어나서 덤비려면 그거부터 꺼내십시오. 전 용사님과 달라서 덤비는 사람 안 봐줍니다."
"네가...나를 봐준다고...?"
"용사도 이겼는데 댁이라고 못 이길까."
아무리 예상 밖이고 기습적이라고는 해도 결국 반응 못 하고 맞았잖아?
"그딴...허황된 소리에 휘둘려 물러설 거라고 생각하느냐!"
"혹시 머리를 다쳐서 기억이 날아갔습니까? 당신은 방금 용사의 능력이 허명이라고 생각하고 덤볐다가 날아온 건데."
당장 품에 남겨둔 스크롤을 찢어 던지는 것만으로도 강제 송환은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뭐 적당히 편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겠지.
근데 내가 왜 그래야 하나?
호전적인 거랑 별개로 난 전투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싸움을 걸 생각은 없지만,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이유는 티끌만큼도 없는 입장인 것이다.
죽이고 살리냐의 문제는 그 뒤의 문제에 불과하다. 애당초 마족과의 전쟁에 대한 심각성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안일한 판단이나 내리며 상대를 깔보고 들어가는 것들을 배려해야 할 이유 역시 없기도하고.
"---------!"
노랫소리와 함께 방금전까지만 해도 부들거리던 세벨라가 멀쩡해진 것처럼 튕겨 일어나며 창을 휘둘렀다.
보면 볼 수록 참 신기하다. 바드 같은 건가? 마법과는 뭔가 원리가 다른 건지 주변의 마력이 빨려 들어가는 대신, 입가에 있는 마력들이 그대로 분해되어 마나로 치환되는 듯한 형태로 강화가 발동된다. 마족 중에서도 저것과 같은 마법을 쓸 수 있는 놈이 있다면 좀 번거롭겠어. 저건 내 능력으로 어떻게 막을 수가 없다.
물론 그건 기본 스펙이 월등히 높은 마족의 경우인 거고. 이미 만전을 기하고 있던 나에게 닿을 만큼 빠르진 못하다.
눈으로 창끝을 포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니, 그냥 타이밍에 맞춰 옆으로 쳐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와해시킬 수 있었다.
"뭣?!"
의심이 많은 거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서도, 거기에 근거가 없는 이상 병이지 병.
그래도 공식적인 자리인데 냅다 목을 베어 봤자 남는 게 없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그대로 검을 내려놓으며 균형을 잃은 세벨라의 안면에 주먹과 팔꿈치를 꽂아 넣는다.
-빠각!
사람 베는 것보다 패는 게 오히려 심리적으로 편치 않다는 새로운 깨달음과 팔꿈치 강타에 코가 깨졌음을 동시에 느낀 나는 그대로 그녀의 목을 잡고 명치에 무릎을 때려 박으며 뒤로 내동댕이쳤다. 충격으로 인해 눈물과 코피를 동시에 뿜어내는 여자의 모습은 정말 조금도 달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별수 있나.
무기를 든 이상 남녀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끄어어억...!"
갑작스러운 충격에 제대로 반응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는 세벨라의 위로 방금 주웠던 귀환 스크롤을 던져 보았지만 그녀는 일어날 줄 몰랐다. 명치에 제대로 타격이 들어갔으니 한동안은 꼼짝도 못할 게 분명하다. 그래도 저 노래로 거는 버프를 한 번 더 확인했으니 수확이 없진 않았네.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고 정진 하십시오. 언제까지고 이티스엘이 마족을 막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 실력으로는 그냥 죽습니다."
사실 그냥 죽진 않겠지만 이 정도 경각심은 심어 줘야 정신을 차리지.
더 보고 있기도 괴로워서 떨어트린 검을 주워 세벨라의 몸 위에 있는 스크롤을 베어 송환시켰다.
"그래도 기사라고 무기는 끝까지 쥐고 가네."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스크롤을 다시 주우며 돌아본 지크는 두 놈을 기절시키고 나머지 두 놈과 대치 중이었다.
오? 그래도 역시 4명이나 모이면 저기까진 버티나보다. 물론 지크가 검만으로 싸운 탓이긴 하겠지만...
"스크롤 꺼내 이 새끼들아. 더 처맞고 싶지 않으면."
놀랍게도 자존심이 있는 것인지 둘은 스크롤을 꺼내는 대신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비장한 얼굴을 하며 자존심을 지키려는 꼴이 우스워서 지크에게 집중하고 달려드는 사이 측면으로 파고들면서 나도 합류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둘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전투는 그걸로 끝났다. 비록 그걸 위해 나와 지크가 사이좋게 한 명 씩 잡고 기절할 때까지 패야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독한 새끼들. 끝까지 어디에 뒀는지 말을 안 하네. 다 벗길 수도 없고 진짜."
생방송 중에 방송사고를 낼 수도 없어서 빨리 스크롤을 꺼내라고 하는데도 안 꺼내겠다고 우기는데 어쩌겠어.
상황이 종료된 뒤 지크는 여전히 불만인 듯 으르렁 거렸고, 난 그냥 남은 스크롤을 써서 사절들을 귀환시키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어차피 스크롤은 반드시 남는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쓸데없이 계속 힘을 뺄 이유도 없었다. 자발적으로 패배를 인정하라고 베푼 자비조차 받지 않겠다면, 강제로 집행할 뿐이다. 내 여분의 스크롤로 한 명을 송환 시키고, 그 뒤에 남은 스크롤로 또 다음 한 명을 송환하는 형태로 4명을 죄다 돌려보낸 우리는 적이라고는 몬스터 밖에 남지 않은 던전을 산책하듯이 거닐게 되었다.
"솔직히 마빡이가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고 할 땐 어떤 놈들이 나타날까 기대하는 것도 있었는데, 겨우 저런 수준이었다니 맥이 다 빠진다."
"사실 저 없었으면 정말 불온한 움직임 아니었습니까? 그랬다면 용사님도 그 치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상대했을 텐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아예 눈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오히려 바람직한 자세라고 착각해서 적당히 휘둘렀을 게 뻔하다. 그럼 죽자고 덤볐을 놈들에게 상처 정도는 입었을지도.
대화가 송출되지 않은 탓에 던전을 돌파한 뒤에 왕국의 사절들을 개 패듯이 후두려 팬 것에 대한 질타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용사의 위용은 확실히 보여 준 꼴이니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뒤로 아카데미의 표식이 그려진 징표를 찾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징표를 획득하자 출구의 역할을 하는 게이트가 생성되었고, 던전 답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