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95화 (95/412)

"꽤나 깔끔하게 끝내지 않았느냐."

식상하기 그지없는 칭찬, 용사를 향한 시기 혹은 동경의 말과 시선을 피날레 삼아 일정을 마친 우리를 맞이하며 에스뮈에가 말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손쉬웠지."

"솔직히 마법과 정령술을 병행해서 너무 쉽게 끝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느니라. 검만으로 사절들을 이긴 건 정말 좋은 판단이었느니라."

에스뮈에의 대답에 지크는 코웃음을 치며 에셀루아를 비롯한 여성들에게 다가갔지만, 난 그녀의 대답을 쉽게 넘기기 힘들었다.

아무리 앞으로 이틀이 더 남았다고는 해도, 성과를 확실히 보이는 쪽이 더 이득 아닌가? 용사 교육의 허술함부터 시작해서 꾸준하게 보여지는 미묘한 모습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이젠 쉬이 감이 오지 않았다.

처음엔 용사에게 목줄을 걸고 이용하기 위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단순하게 끝날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이로구나."

딱히 표정을 숨기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런 내 의문을 읽은 에스뮈에가 웃으며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예상은 되지만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라.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혹시 우리가 던전에 들어가 있는 사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간 게 있나 싶어 라그니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도 뭔가 명확하게 들은 것은 없는 듯 내 시선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국을 위해 고생해주었는데 같이 식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나에게 에스코트를 위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를 떠나려는 지크에게 넌지시 말하는 에스뮈에였지만, 지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손을 내저었다.

"난 됐어. 에셀루아 불편할 자리를 뭐 하러 따라가냐."

"여는 여의 동생을 불편하게 만든 적이 없다만?"

"그럼 내가 불편한 거로 치자고."

본인이 권유했음에도 에스뮈에는 지크의 거절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불러 세우지 않았고, 결국 라그니스를 포함한 우리 셋만이 그녀를 따라 마차에 오른 뒤 식사를 하기 위해 아카데미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마차가 움직이고, 아카데미의 정문을 벗어나자마자 에스뮈에가 입을 열었다.

"제국이 용사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마치 한 번에 내 의중을 꿰뚫어 본 듯한 질문이었다. 다른 때였으면 대답을 놓고 고민 좀 해봤을 텐데, 상대가 에스뮈에다 보니 그런 고민도 부질없이 느껴지는 감이 있어서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알면서 물어본다는 건...말해주시려는 의도라 여겨도 되겠습니까?"

"우리끼리 있는 자리가 아니더냐. 말을 편히 해도 괜찮느니라."

"그러면 사양 않고."

괜히 존칭을 쓰겠다고 버티다간 이 살얼음판 같은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 넙죽 받아들이기로 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라그니스와 명확하게 좋아하는 에스뮈에를 보니 다행스럽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을 한 것 같다.

"물론 설명을 위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니라. 사실 제국의 이름으로 이티스엘 왕국이 아닌 레비엥 변경백을 직접 초대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느니라. 그대라는 변수가 생겨 버린터라 여러모로 계획대로 되지 않은 건 사실이나,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무방하지. 어차피 내일부터는 그대도 실습에 참여하지 않으니 이제는 말해도 별문제가 없으리라 여겨서 이야기를 꺼냈느니라."

"...내 실습 참여여부가 왜 중요한지도 설명해줄 거지?"

"후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설명해주겠느니라."

그럼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할까, 라고 운을 떼며 짧은 고민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던 에스뮈에가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아예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국은 마족의 위협을 두고 모든 왕국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끔 만드는 게 목표이니라. 그러기 위해 고의로 용사의 성취를 늦추고, 약점을 방치하였느니라."

"...목표랑 행동의 연관성이 정말 조금도 이해가 안 되는데?"

"우선, 엘드미아여. 용사의 모든 성취는 제국 신성회에서 신탁을 받아 용사를 찾은 직후부터 쌓아 올려진 게 아니니라."

살짝 말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말을 전부 입에 담은 에스뮈에는 마치 자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내민 침묵 속에서, 난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지크의 용사 의존증 혐오.

지금에야 에셀루아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형성하며 자리를 잡고 있지만...녀석이 처음부터 그렇게 행동했을까? 처음부터 그녀들이 녀석에게 우호적으로 대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녀석은 이세계로의 전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지크는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제국의 교육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한 거지?

"반년."

내 표정이 그렇게 시시각각 알아보기 쉽게 변한 걸까? 에스뮈에의 입에서 내 의문에 대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용사 지크프리트는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배워서 지금에 이르렀느니라."

농담기 하나 없는 말투와 표정으로 에스뮈에가 단언했지만 나도, 라그니스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만, 처음엔 당혹스러웠느니라. 분명 신탁에 따라 찾아낸 용사인데 정작 용사 본인이 그렇게까지 비협조적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대체 왜 그렇게 비협조적이었던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느니라."

식당에 도착한 뒤 고급스럽기 그지없는 음식들을 먹으면서도 에스뮈에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나야 같은 전생자의 처지에서 지크의 말을 나름대로 해석하다 보니 뭐가 불만인지 이해하지만, 사실 제국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불만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용사의 능력도 충분하고, 무상으로 교육까지 시켜 주며 영광과 보상마저 약속된다. 어차피 용사가 나서지 않더라도 인류 전체가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게 뻔한 마당에 전쟁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까짓거 다 죽어보자라는 마인드로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소년에게 공감할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정신 상태를 의심해봐야 하는 인물인 게 분명하다.

"결국에는 어찌저찌 변화가 생겨서 교육을 따르고 있지만, 거기까지 걸린 시간만 3년이니라. 당연히 우리는 용사만을 믿고 기다릴 수 없었지."

군대를 더 철저하게 육성하고, 아카데미의 교육과정을 전쟁과 실전 위주로 개편하고, 말 안 듣는 용사라도 최대한 유용하게 굴리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회의를 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비협조적인 태도와 달리 백성에게 해를 입히는 몬스터나 도적에 대한 적개감은 확실해서 그런 방면으로 용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에셀루아를 비롯한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도 진척되었다.

그 뒤로 반년간 교육에 성의를 보이기 시작하는 지크에게 만족할 틈도 없이 주변 왕국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제국은 눈치챘다.

"평화가 너무 길었다는 말은 사실 어이없는 소리라 생각하느니라. 평화는 길 수록 좋은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저 자신들의 위기가 아니라 여기며 이기심을 부린 게 원인이지."

제국이 욕심을 부린다. 왜 제국 신성회만 용사를 지목하는가. 다른 신들은 왜 아무 말도 없는가. 사실 신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가 등등.

얼핏 보면 타당할 수도 있지만 껍질을 까보면 지독한 불신과 오만에서 비롯된 소문들이었다. 실제로 이티스엘이 필사적으로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걸 첩보를 통해 들으면서도, 오히려 유지가 되는 걸 보아하니 별거 아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리는 이들이었다.

그 전선 유지를 위해 수 년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고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지는 생각도 못 한 채 말이다.

그래서 에스뮈에는 역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그리 생각하면, 정말 그런 척을 하자고.

이티스엘과 제국이 손을 잡고 마족을 핑계 삼아 주변국을 누르려고 한다. 그 의심을 오히려 증폭시키기로 결단을 내린 그녀는 지크의 교육을 지연시켰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미완성된 용사의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아직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강함을 가지지 못한 용사의 모습은, 당연히 왕국들이 보기에 상대적으로 만만한 존재로 남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 올린 정보를 토대로 왕국들은 결론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이티스엘 혼자서도 버틸 수 있는 마족을 상대하는데 있어, 나름 강하긴 해도 결국 인간의 범주 안에 있는 용사를 내세우는 게 제국이라면.

자신들도 군대를 동원하고 왕국 제일의 전사들을 차출해 이티스엘의 전쟁에 참여해서 그들이 독식하려는 이득을 뺏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결론을.

"결코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라면 그들은 포기할 거라 여겼느니라. 설령 그게 정말로 제국에 엄청난 이득을 안겨 준다한들, 용사가 정녕 산을 가르고 바다를 가를 수 있다면 그들이 어찌 엄두를 내겠느냐? 그래서 여는 반년 동안 용사가 보여 준 성장을 믿고...일종의 도박을 한 것이니라."

그리고 계획에 없던 내가 나타나, 용사를 이기고 루드라의 젊은 사자를 베어 죽였다.

"당연히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고 여겼느니라. 이 부분은 여의 계획이 아니라 순전히 운에 맡기다시피 한 부분이었으니 예상을 할 수 없었지. 하지만...오히려 대성공이라는 걸 그대를 만나고 나서 반나절 만에 알게 되었느니라."

나라는 놈이 제국 안에서 나온 게 아니라 이티스엘에서 나왔기에 졸지에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용사가 강한지 어떤지를 떠나서, 결국 신탁을 받지 않은 인간도 용사를 이길 수 있다. 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까지는 제국이 헛소문을 퍼트린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에스뮈에는 말했다.

"제국이 자신들을 이용하려 했다면 강력한 용사를 빌미로 협박을 하지 왜 약점을 보이겠느냐...라는 형태인 거지."

그렇게 약점을 잡았다고 믿게 만들어 오히려 움직이게 만든다.

일단 전쟁에 참여만 하면 결코 발을 뺄 수 없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한 빌미로 인류의 위협이니 왕국 전체가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을 하며 전력으로 다가올테니까.

나중에 전장을 겪으며 후회하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신탁은 내려졌고, 제국과 황가는 현 상황을 인류의 위협으로 확정 지은 상태였다.

거기에 어떻게든 많은 지원과 군대를 동원해서 살아남는 것만이 목표인 것이다.

"이티스엘에 처음부터 모든 나라가 안정적인 지원을 했었다면 이런 번잡하고 위험한 도박을 할 이유는 없었지. 허나...그에 대한 건 그대들이 더 잘 알지 않느냐."

말뿐인 지원. 혹은 금전뿐인 지원. 인류의 위협이라 칭해진 상황을 앞에 뒀다고 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지원들이었다.

심지어 그 문제를 두고 이티스엘 내부에서조차 국왕파와 귀족파가 갈라져 정치싸움이나 하고 있었고, 라그니스는 직접 그 틈바구니에 끼기까지 했다.

"그래서 레비엥 변경백이었느니라. 이 사실을 공유하고, 더 나은 앞날을 위해 진심으로 전력을 다할 이를 찾고 찾은 결과가. 이티스엘의 왕가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나, 결국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고개를 돌릴 가능성이 있지. 하지만 그대는 결코 마족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는 경험을 하지 않았느냐."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경청하던 라그니스는 그대로 침묵을 고수할 뿐이었다.

나와 달리 지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 하는 그녀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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