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드미아? 괜찮아?"
그런데 의외로 라그니스가 내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왔다.
"아니, 너야말로 괜찮아? 화 안나?"
영지를 잃고 가족을 잃게 된 원인이 지크인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보기에 오그웬에서 머무는 긴 시간 동안 지크가 용사의 임무를 방치하고 있다고 여기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라그니스의 표정은 덤덤하기 그지없다.
혹시 내가 이상한가 싶어서 에스뮈에의 반응을 보고 싶었지만 차마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응? 아니? 내가 왜?"
오히려 정말 자기가 왜 그러겠냐는 듯 당황하며 반문하는 모습에 나도 라그니스도 서로 당황하는 사이, 갑자기 에스뮈에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그렇구나! 이해했느니라! 지크프리트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게로구나 라그니스여!"
에? 뭐요?
이 상황도, 에스뮈에의 갑작스러운 폭소도 당황스럽기 그지없어 둘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어떻게든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하는 나와 달리 에스뮈에의 말을 들은 라그니스는 갑자기 뭔가 깨달은 것마냥 아차하는 표정을 짓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렸다.
용사한테 아무런 기대도 안 한다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아니, 설령 그렇다고는 해도 그게 또 부끄러울 일은 아닐 거 같은데 반응이 좀 색다르다?
"뭘 고민하는 게냐 엘드미아여."
"아니, 용사잖아? 용사한테 아무런 기대도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쯧쯧쯧. 없던 눈치를 억지로 새겨넣었다 한들 응용이 되는 건 또 아닌 게로군. 그대가 그리 만든 것이니라."
"뭐? 내가? 뭘?"
"라그니스가 용사에게 기대를 안 하게 된 이유. 용사의 도움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자신의 힘과 주변의 도움으로 마족에게서 영토를 수복하고 부친의 영광을 되찾겠다 마음먹게 된 이유. 그 이유가 그대라는 이야기이니라."
어찌 저리도 눈치가 없을꼬 라며 한심한 듯, 우스운 듯 바라보는 에스뮈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도무지 이해 되지는 않았다. 그저 라그니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에스뮈에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 나에게는 엘드미아가 용사였으니까."
잔뜩 빨개진 얼굴로 라그니스가 겨우겨우 입에 담은 말을 듣고 나서야 상황이 유추가 되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겨우 16살임에도 그녀는 벌써 삶의 전환점을 다섯 번이나 맞이했다.
첫 번째는 그 천재성을 입증받아 라그넬반데스의 제자가 된 것이고, 두 번째는 마족의 침공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것이고, 세 번째는 오그웬의 뒷골목을 전전할 때 나와 만난 것이며 네 번째는 귀족파에게 납치될 뻔했을 때다.
그리고 제국의 1 황녀에게 동맹과도 같은 제안을 받다시피하고 있는 지금이 바로 마지막 다섯 번째 전환점이지. 그 중 무려 세 번의 전환점에 내가 함께하고 있었다.
나라도 인생에 큰 파도가 그만치 몰아칠 때마다가 옆에서 도와주면 구세주로 여길 법 하다. 아실리에만 하더라도 내 인생에 단 한 번 개입한 것만으로 구세주가 되었으니까.
물론 그 한 번이 매우 길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이야기다.
"용사...지크는, 솔직히 마음에 들진 않아. 하지만 엘드미아가 지금 에스뮈에가 알려 준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의 실마리를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제국에 오기 전, 방에서 나눴던 이야기와 반응만 떠올려 봐도 굉장히 상반된 상황이잖아."
라그니스의 제국행 소식을 들은 첫날에 부정적인 가설을 세우며 화를 못 참았던 일을 이야기한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에스뮈에가 알려 준 사실에 난 화나지 않아. 다른 누구도 아닌 엘드미아가 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그에게 분명 3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제국에게 협조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내 손을 맞잡은 라그니스의 손길과 미소가 너무나도 따듯하기 그지없어서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라그니스가 자신의 삶에서 큰 결단을 내리기 위한 판단의 근거로 내 의견을 수용한다는 이야기니까.
아무리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해준다 한들, 결국 자기가 겪은 일이 가장 힘든 법이니 자신의 감정대로 판단하고 결정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을 텐데 그녀는 나를 믿어 주고 있었다.
"흠. 여는 속이 좁아서 아직 경쟁자인 인물이 그렇게 애틋한 시선으로 여의 낭군을 바라보는 꼴은 보고 싶지 않느니라. 본제로 돌아왔으면 하는구나."
"그 말을 굳이 따를 생각은 없지만, 논제가 논제인 만큼 받아들이도록 하죠. 하지만 낭군이라는 표현은 정정하고 싶네요."
"정정할 이유가 없느니라."
분위기 좋았잖아요 여러분...그러지 마세요 제발...
순간 둘의 시선 사이에서 번개가 치는 기분인지라 갑자기 불안 해졌지만, 다행히 그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러한 이유로 여와 제국은 그대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맺으려는 것이니라. 그리고 그대가 이를 수락할 경우, 서로에게 많은 이익을 안겨줄 수 있겠지."
"...마치 저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듯 말하시지만, 정말 선택권이 존재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사는 데 있어 선택권이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니라. 그 결과가 이득과 손실로 나뉘었다하여, 선택권이 없다고 여기는 이도 존재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지."
방금전까지만 해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이어 나가던 에스뮈에가 잠깐 식기를 내려놓고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라그니스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물질적 이해득실을 떠나, 긍지나 자존심과 같은 정신적인 이해득실이 있기에 고민하는 것 아니겠느냐. 상대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기에 제 뜻을 굽히고 원치 않은 선택을 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느니라."
어찌 보면 이미 대부분의 이들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오만한 발언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와 라그니스의 입장이 거꾸로였다 하더라도 그녀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판단했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 작은 체구와 귀엽기 그지없어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에 압도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찰나,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옅은 미소로 돌아온 에스뮈에가 말을 마무리 지었다.
"뭐, 이번의 이야기는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제안도 아니지. 게다가 여는 이미 그대를 냉정히 내칠 수도 없는 입장이니라."
"...어째서죠?"
"뻔히 알면서 질문을 하는 게 얄밉기 그지없느니라. 그대를 내치면 엘드미아가 퍽이나 마음에 들어하겠구나."
아마 식사 예절만 없었으면 들고 있는 포크나 나이프로 나를 지목했을 법한 시선이었다.
"그렇다 한들 여도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대의를 그르칠 생각 따위 추호도 없느니라. 여의 판단은 곧 제국의 판단. 그 판단 한 번으로 수 천의 사람을 살릴 수도, 수만의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위치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받아들이도록 하죠."
"흐응. 의외로 거침없이 받아들이는구나."
"저 역시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의를 그르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그렇게 거창하게 볼 것도 없이 저에게 아무런 손해도 없는 이야기잖아요?"
"왕가와 원로원 양쪽에게 고립될 수도 있는데도 말이더냐?"
"스승님이 제국에 오자마자 바쁘게 돌아다니시는 것만으로도 얼추 감은 잡았습니다. 이미 왕실과는 이야기가 된 상태잖아요."
새침하게 대답하며 식사를 재개하는 라그니스를 바라보며 에스뮈에가 웃었다.
"영특한 이와 함께하는 건 좋은 일이지. 마음 같아서는 곁에 두고 좀 더 이것저것 알려줘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인재로 키우고 싶구나."
"...사양하도록 하죠."
뚱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 라그니스는 그저 말없이 식사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 뒤로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식사가 이어졌다.
분위기도 좀 부드러워진 거 같아서 살살 눈치를 보며 내가 내일부터 아카데미 행사에 직접적인 참여를 안 하는 것과 이야기를 오늘 하는 게 무슨 관련성이 있는지를 따로 물어보자, 에스뮈에는 조금 미안하다는 듯이 볼을 긁적이며 대답해주었다.
"여가 그대를 사랑한다해도 계획과는 구분을 지어야하기 때문이니라."
꾸준하게 강조해왔던 부분이라 이해 못 할 건 없지만서도 구체적인 이유를 추측하기에는 지능이 부족한 탓에 디테일한 이야기를 부탁했더니, 에스뮈에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이야기를 지금까지 꺼내지 않았던 이유는 라그니스가 여의 계획에 동참할 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니라. 만약 거절의사를 밝힐 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든 여의 계획을 방해하려 할 경우...아직은 그대가 여보다는 라그니스의 의향을 따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느니라.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대가 적극적으로 라그니스를 돕는다면 그로인한 변수는 지금의 지크프리트와 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거라 여겼느니라."
그녀의 대답을 듣고나서 차마 겉으로 표현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마음 속 엘드미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확실히. 오늘 라그니스가 제안을 거절하고 내일부터 반기를 들려 했다하더라도 내가 실습에 참여해서 깽판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인만큼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거나 전무하다시피 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에스뮈에는 이번 용사 페스티벌에서 얻고자 했던 이점들은 대부분 취한 상태로 안정적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감탄한 부분은 단순히 그러한 상황까지 염두해두는 준비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직 너희를 확실히 믿을 수 없었다.' 라는 부분마저도 숨기지 않고 확실하게 말해주는 에스뮈에의 행동에 대한 것이었다.
나라면 '우릴 못 믿었다고? 우리도 널 못 믿겠다.' 같은 소리가 튀어나올까 두려워 차라리 입 다물고 있는 선택을 했을 텐데, 그녀는 그런 반응이 나오더라도 받아들이고 차라리 신임을 얻기 위한 행동을 따로 취하겠다는 자세로 나온거니까.
이렇게까지 이성적이기위해 노력하고 책임감있게 행동하려하다니. 저 귀여운 외모마저도 카리스마 넘치고 멋있게 보일 지경이다.
"말해줘서 고마워 에스뮈에. 나라면 그냥 숨기는 게 낫다고 여기고 말 못 했을 거야."
정말 박수를 쳤다간 지크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낙인찍힐 게 뻔한 수준이라 진심을 담아 대답만 했다.
"이해해주는 것 같아 다행이니라."
다행히 에스뮈에는 내 의도를 완벽히 알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