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뮈에와의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다시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평소였으면 식당의 사용인을 통해 저택에 연락하여 식당으로 마차를 대기 시켰을텐데, 에스뮈에는 아직 일이 남아 아카데미로 돌아가야하는 자신과 달리 우리는 돌아가서 쉰다는 것에 가벼운 심술을 부리며 기어이 우리를 다시 아카데미로 끌고 들어갔다.
그 행동에 담긴 아쉬움을 이해했기에 난 그냥 웃어 넘겼고, 라그니스도 여전히 뚱한 반응을 보였지만 굳이 뭐라 하지는 않았다. 에스뮈에와 간단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우리들은 마치 환승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미 대기하고 있던 마차로 향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이 우리를 마주치는 학생들의 반응이 어제와는 전혀 달랐다는 것 정도?
심지어 라그니스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터라 나만 벙찐 기분 속에서 마차에 올라야했다. 다행히 그런 내 심정을 잘 파악한 라그니스가 설명하기를, 우리의 대우가 임시 학생에서 사절로 바뀐 것에 가까워서 접근하는 학생마저도 없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제부터는 나라의 일이라는 느낌이라던가?
뭐 그렇다면 납득할만하네 라고 여기면서도 학생들이 그렇게 휙휙 태도를 바꾸며 상황에 맞게 적응할 수 있다는 건 상당히 대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걔들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병사로 차출되는 것조차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러한 의식의 전환조차 제국이 유도한 교육의 일환이 아닐까 싶었다.
"내일부터는 에스뮈에를 에스코트할 필요 없어."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하루를 마치고 저택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 안에서 라그니스가 말했다.
"이제는 사절이니까?"
"응. 왜? 아쉬워?"
너무나도 뻔하게 떠보는 반응이라 웃음 밖에 안나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웃을 수조차 없는 것이 내 상황이었기에 난 최대한 표정관리를 해야했다.
"네가 떠보듯이 물어봐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별다른 생각이 없다."
애당초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짓는 엘드미아 에가 서비스는 이미 제국에 온 뒤로 대부분의 상황에서 절찬리 업무 모드였다. 그 사이사이 기습적인 돌발상황이 있었을 뿐이지.
물론 그 돌발사항으로 인해 심경과 눈치에 큰 변화가 있긴 했지만, 아직도 정신이 없는 게 현실이었다.
"싫었던 건 아니라는 거네?"
"나 좋다고 해주는 사람을 대놓고 싫어하긴 힘들지."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근래 들어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루드라의 똥개새끼는 스트레스 축에도 안 들어가는 수준이었고 당장 오늘 있었던 답사조차도 별 거 아니었다. 일주일의 시간동안 라그니스를 돕기 위해 왔다는 느낌보다 뜬금없는 바캉스를 온 기분에 가까운 마당에 나 좋다고 해주는 사람까지 붙었으니 기분이 나쁠 수가 있나.
"...그렇긴 하겠네."
무엇을 이해하고 납득했는지는 몰라도 라그니스는 내 반응에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거 알아? 분명 처음 제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엄청 긴장하고 불안했는데, 겨우 5일 묵은 것만으로도 별다른 불편함을 못 느끼게 되어 버렸어."
대신 다른 화두를 꺼내들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풍족한 제국 수도의 삶 뿐만 아니라,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흘러가는 왕국의 분위기와 달리 벤데 후작을 비롯한 제국의 고위직은 굉장히 협조적으로 움직여줬거든. 이러고 있으니 마족과의 전쟁이라던가 영토 수복같은 모든 게 먼 이야기로만 느껴져."
"그 부분은 나도 공감이 되네."
이세계 하드코어 서바이벌을 해야할 지도 몰랐던 유년기 떄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뜬금없는 아카데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록 며칠 전까지만해도 모험가 협회의 비밀 의뢰를 받아 마족과 사람들의 목을 베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그마저도 멀게 느껴진다. 분명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대로 안주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을 거다.
예를 들면, 내가 이미 복수를 마친 상황이라던가.
"하지만 변한 건 없지."
당연히 그렇지 못했기에 이 일시적인 감정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라그니스도 마찬가지인 듯 싶었다.
"맞아, 엘드미아. 비록...에스뮈에로 인해 조금은 변했지만, 네가 복수를 마치기 전에 쉴 수 없는 것처럼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흔적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쉴 수 없을 것 같아."
비참한 이야기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들 결국 우리 둘 다 복수에 묶여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심지어 아직 15, 17세 밖에 안 된 어린 꼬마애들이 이러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쉴 수 없는 거랑 별개의 문제도 있는 법이지 않겠어?"
"...응? 그건 또 뭔데?"
"아침에 말했잖아. 나도 할 거라고."
아침에 무슨 말을 했던건지 고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라그니스가 맞은 편에서부터 다가와 입을 맞췄다.
입맞춤도 자주하면 익숙해지긴 개뿔 뭐가 익숙해!
같은 사람하고 하면 어떨지 몰라도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여자가 입을 맞추는 건 심장에 안 좋다!
고급 마차와 안정된 도로의 시너지로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다가온 라그니스는 침착하고 확실하게 입을 맞춘 뒤에야 물러났고, 난 또 다시 심장병의 위협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야 했다.
"에스뮈에하고도 했으면서 반응이 귀엽다?"
"그거랑 이게 같냐...!"
명확하게 에스뮈에가 뭘 했는지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할 틈조차 없을 만큼 쑥스럽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놀라우리만치 태연한 라그니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얘가 이렇게나 당당하고 적극적이었나?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사실 오그웬에 있을 때부터 꽤나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거 같다. 성광십자회까지 끌여들여서 고아 구제 활동까지 했었으니까.
성향만 놓고보면 마법사가 아니라 전사에 가까울 정도이긴 해.
"싫진 않은가 보네?"
의도적으로 아까 전과 다를 바 없는 말을 다른 어조로 입에 담는 라그니스였지만, 난 결국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얼굴만 붉혀야 했다.
그 반응이 만족스러운 것인지 라그니스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
공공재마냥 강탈당하는 입술에 대한 부끄러움을 추스를 틈도 없이 다가온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오늘 있을 행사를 위해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게이트로 향했다.
오늘의 행사인 단체전을 위해서는 모의 전술 훈련장으로 이동을 해야하는데, 그게 보안과 안전을 위해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있다더라.
"보면 볼수록 생도들을 교육하는데 진심이야."
자연스럽게 그런 소감이 나올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왕궁의 아카데미도 상당히 실전 위주지만, 시설에 들어가는 비용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제국 클라스가 차원이 다르긴 하나보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나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걷던 라그니스가 물었다.
"내일의 일정마저 끝나고 우리가 돌아가면, 용사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거겠지?"
"그렇겠지. 언제 다시 보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 땐 확실히 강해져 있겠지."
검술은 아직 허술하지만 녀석의 마법만큼은 진짜니까.
다른 건 몰라도 겨우 반 년만에 그 정도에 다다를 수 있었으니 빈틈없이 1년만 빡세게 이것저것 가르치면 제국 군인과 기사들 중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해지지 않을까?
"흐응. 다음에 만나면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마치 도발하는 듯한 미소와 말투였지만, 나는 당연히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반응할 수 있었다.
"지크한테 질 수야 없지. 다음에 만나기 전에 공간을 벨 정도로 강해지면 또 이기지 않을까?"
애초에 녀석은 용사다. 신이 마왕과 싸우라고 점지해줬는데 걔가 나보다 강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진지하게 이야기 할 것도 아니라서 농담조로 대답하자 라그니스는 예상치 못했는지 급하게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풉. 마법도 제대로 못 쓰면서 무슨 공간을 베?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거야?"
"검 쓰는 모험가들이나 전사들 사이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리는 지고의 경지입니다만?"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생각보다 자주 들려오는 이야기다.
물론 죄다 수백 년 전의 검성이네 전설이네 하며 순 뻥으로 가득 차보이는 과거의 이야기지만, 비슷한 언저리의 경지처럼 보이는 자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서 더더욱 자주 도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뭐...내가 거기에 다다를 수 있는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서도, 사실 마왕군 지휘관이라는 녀석에게 복수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면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그렇게 결의를 다 잡는 사이 수 많은 학생들과 인파가 몰린 게이트에 도착한 우리들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반겨준 것은 의외로 에테네라였다.
"여어! 왕국기사!"
그리고 놀랍게도 녀석은 한결같은 태도로 나를 맞이해줬다. 저 살가운 태도는 참 마음에 든다.
"이번엔 하루만에 보는군요 에테네라."
"하하하! 그러게! 듣자하니 이번엔 참가 안 한다며? 아쉽구만! 이번에야 말로 내 실력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라그니스와 팔짱을 끼고 있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내 등을 팡팡 두드릴 정도로 호쾌한 모습으로 날 반겨주는 에테네라는 평소보다도 텐션이 더 올라간 듯 했다.
"애당초 답사에서 파티장을 맡을 정도인데 굳이 안 봐도 에테네라의 실력이 만만치 않을거라는 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거 참 열린 생각을 가지고 대해줘서 몸둘 바를 모르겠구만. 그래도 눈으로 보는 게 최고지. 비록 관객석에서나마 이 몸의 활약을 잘 지켜보라고."
유쾌하게 웃으며 학생들 사이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하니 새삼 지크 놈이 얼마나 날을 세우며 생활한건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다. 저렇게나 친화력 MAX를 찍은 인물에게마저도 탐탁치 않게 여겨질 정도라는 건 진짜 개처럼 굴었다는 소리 아닐까.
마침 눈에 들어왔던 김에 정해진 위치로 가는 사이 라그니스와 에테네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시간을 떼우자, 이내 어제와 비슷하게 식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오늘의 자리는 어제와 달리 용사와 아카데미 생도들만의 성과를 보이는 자리인 만큼, 제국을 다스리는 위대한 13대 황제 판 크라시 비스팀 텔 누아의 첫 번째 자식이자 그 분의 곁에서 폐하의 뜻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는데 힘 쓰시는 제국의 하얀 별. 에스뮈에 비스팀 텔 누아 제 1 황녀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웨이드 교수의 짧은 연설 후 에스뮈에의 연설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음.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여이니라."
그리고 실로 엄청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자기 소개를 시작으로 굉장히 형식적인 듯한 축사가 이어졌다.
솔직히 난 엄청난 미사여구의 범람 속에서 허우적 거리느라 한 반절 정도는 제대로 듣지도 못한 거 같다.
"그럼 게이트를 열겠느니라."
어쨌든 그래도 끝나긴 한 것인지 그녀의 손짓에 맞춰 게이트가 발동되었다. 우리가 제국에 올 때와 비슷한 흐름의 마력이 움직이며 그녀의 뒤편에 있던 게이트가 가동하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움직이는 마력의 양이 달라서 그런건지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몸이 반응해버린다.
"용사를 필두로 단체전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우선 이동하여 준비하는 동안, 에스뮈에 황녀님을 시작으로 관객들의 이동이 있겠습니다."
자연스럽게 황녀로부터 발언권을 이어받은 웨이드 교수의 말에 따라 학생들이 이동하기 시작한다.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임에도 한 명 씩 이동하는 것을 보니 의외로 규모는 작은 게이트인 듯 싶다.
"대체 어디에 숨겨놓았길래 게이트까지 쓰는건지 꽤 궁금해지는데?"
"그러게 말이다. 하늘에라도 띄워놨나?"
마냥 기다리는 것도 지루해서 라그니스와 잡담을 이어가는 사이 학생들의 이동이 끝나고, 웨이드의 짧은 선언에 따라 관객들의 이동이 시작될 때.
가벼운 현기증이 나를 덮쳤다.
"우욱...!"
"엘드미아?"
소름이 돋는 수준이 아니라 전신이 천에 휘감기는 느낌.
형언할 수 없는 극채색이 시야를 뒤덮는 광경.
강제로 온 몸의 마력이 들고 일어나는 감각.
폐던전에서 마족 숭배자로 취급되던 마법사가 열었던, 마족의 게이트를 통과했을 때의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