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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99화 (99/412)

엘드미아의 손에 의해 근위 기사에게 던져지면서 에스뮈에의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은 의문이었다.

어떻게 마족이 이곳에 있는 거지?

대외적인 시선과 달리 제국의 황실은 굳건하다. 그녀를 견제할 수 있는 파벌은 존재치 않았고, 그나마 겉으로 보기에 구색을 갖춘 듯한 남동생의 파벌조차 그녀에게 불만이 있는 자들을 모아두기 위해 일부러 방치하는 것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그를 비롯한 형제자매들은 아무도 황제의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죽은 뒤에 자식들을 제위에 올리고 싶어 할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지금은 아니었다.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하마터면 좀 더 깊어질 뻔한 고민의 늪에서 그녀를 꺼내준 것은 근위 기사였다. 풀려 있던 초점을 바로잡으며 에스뮈에는 명령했다.

"마족은 죽이고 배신자를 살려라."

오롯이 마족의 소행이라 여겼기에 살려 두고 심문을 하려 했던 것이지, 그게 아닌 이상 굳이 마족에게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엘드미아의 일격에 핏줄이 잘렸음에도 그녀를 밀어내 기어이 게이트 너머로 넘기려고 시도한 배신자를 살려 심문하는 것이 훨씬 도움된다.

그렇게 결론지으며 내린 에스뮈에의 명령은 언성을 높이지 않고 나직이 읊조렸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수행되었다.

그리고 그 광경에 마족은 순간 분노를 느꼈다.

자신을 상대하던 다섯 중 무려 세 명이 뒤로 물러나며 에스뮈에에게 달려갔으니까. 누가 보더라도 얕잡아보는 것이 명확한 만큼 그 분노는 타당하다고 할 만했다.

죽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대놓고 개입한 것이었다.

그런 자신을 눈앞에 뒀으면서 인간이 저렇게 말도 안되는 여유를 부린다는 게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 죽이고자 하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 믿는 것...?"

하지만 친위대원들은 달랐다. 그들은 에스뮈에의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 편견과 오만을 섞지 않았다. 오히려 만에 하나 착오가 생길 것을 대비하는 편이었다.

두 명이 남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마족의 손톱과 검이 엮이는 순간 미끄러지듯 파고들어 간 친위대원의 검이 마족의 목을 베어냈다.

핑그르르 하고 도는 풍경에 놀라 미처 말도 잇지 못 하는 마족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자신의 등이었다. 그리고 둔탁한 충격 속에서 그의 마지막 시야를 장식한 것은 남은 두 명의 친위대원 마저도 에스뮈에를 향해 달려가는 광경이었다.

그 모습마저도 당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에스뮈에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고개를 돌려 게이트를 확인한 뒤였다.

"이런 수작질을...놓쳤단 말인가...!"

게이트가 뒤틀리며 무너지고 있었다.

마법적인 공격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누군가 이동하자마자 붕괴한다는 건 일종의 함정처럼 미리 손을 써놨다는 뜻이었다.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게이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분노가 일렁였다.

"살려놓았습니다."

어깨가 떨릴 정도로 분노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근위대에 넘기고 환상공을 불러 심문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최대한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어내라 지시하도록."

그럴 경우 정신이 붕괴되어 숨 쉬는 시체가 될 것임이 분명했지만 에스뮈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녀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아카데미 교수진과 근위대들을 침착하게 둘러본 에스뮈에는 짧게 생각을 정리하고 명령을 내렸다.

"친위대장. 여의 인장과 친서를 준비해라. 웨이드 교수. 행사는 끝이다. 학생들을 데려오고 보호하도록. 근위대. 마법사단을 데려와서 게이트를 조사해라. 의문을 표하거나 방해하는 자는 여의 이름으로 엄벌에 처할 것이라 알리도록."

철혈 황녀라 불리던 에스뮈에는 대답보다 행동을 선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들이었기에 방금 전까지 혼란스러웠음에도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레비엥 변경백은 어디 있느냐."

"오고 계십니다."

어느새 다가와 옆을 지키고 있는 친위대장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는 라그니스가 보였다.

분명 엘드미아가 움직였을 때부터 쫓아왔을 텐데 이제서야 자신에게 다다를 정도로 멀리 있었던 것이다.

엘드미아는 그만큼 먼 거리에서 이상을 감지하고 달려왔다. 어떤 경위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전력으로 자신을 구하고자 했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게 된 에스뮈에였다.

"라그니스여. 엘드미아가 오늘 지닌 마도구가 있었느냐?"

그랬기에 에스뮈에도 전력을 다해 그를 찾을 생각이었다.

마족이 개입했다 하더라도 게이트 자체는 제국의 물건. 느닷없이 다른 나라나 마족령까지 날아갈 수준은 아니다.

위치를 특정지을 수 있는 마도구만 있어도 마법을 통해 찾아낼 수 있다.

"아뇨. 아무것도."

다급하고 절망스러울 게 분명한데도 라그니스는 침착하게 대답한 뒤 고민했다.

그러나 당장에 드는 생각은 진작 뭐라도 하나 사서 선물해둘 걸 후회하는 것뿐인지라 쉽지 않았다.

그때, 선물이라는 부분에서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실리에.

"엘드미아의 귀걸이를 만든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엘드미아의 귀걸이를 만든 이를 만나야 하느니라."

같은 결론을 내린 에스뮈에의 입에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말이 나왔다는 점에서 라그니스는 안도했다.

동시에 절망했다. 아실리에가 있는 곳은 이티스엘의 끝자락 오그웬이었으니까.

"하지만 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라그니스의 불안을 확인한 에스뮈에가 라그니스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그건 여가 해결하겠느니라."

인간이 만든 게이트는 이동 거리에 한계가 있다.

게이트를 통과하며 떠오른 건 제국으로 오기 전에 라그니스가 해줬던 이야기다.

억지로 희망적인 관측을 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건 단순히 마법의 문제가 아니라 게이트를 구성하는 마도구의 문제도 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두 개의 문을 하나로 연결하는 게이트의 특성상 한쪽 게이트 성능이 좋다고 해서 이동 거리가 길어지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즉, 지금 내가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지는 몰라도 제국령을 벗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

마족령만 아니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눈앞에 밝아짐과 동시에 최대한 낮게 바닥을 구른 나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다행히 기습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서 게이트 앞에서 마주친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허리와 허벅지를 벨 수 있었다.

"끄아아악!!"

"황녀가 아니...아악!"

게이트는 만능 공간 이동 마법 따위가 아니다. 터널에 불과하지. 당연히 마족놈들이 뜬금없이 수도에 있는 에스뮈에를 아무 지방 어딘가에 떨궈 놓고 방치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게 아닌 이상 도착 지점에 있는 이들은 일말의 예외도 없이 무조건 적이다.

상황 파악할 시간에 눈에 보이는 놈 하나라도 더 베어야 안전할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보이는 족족 검을 휘둘렀다.

"제기랄! 대체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계획이 탄로났을 가능성이 있다! 대장이 올 때까지 버텨!"

"용사인 건가?!"

어설프게 달려들었던 세 놈의 목을 베어 넘기고 나서야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 비해 내 실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도 아니고, 제국에서 5일간 강의 좀 들었다고 존나 강해진 것도 아니다. 나아진 거라고는 무기 하나뿐인데다가 방어구는 오히려 퇴화한 상황.

다른 도구들조차 없는 이 상황에 이놈들이 폐던전의 마족 수준만 됐어도 진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수준이었을 게 분명하다.

다행히 아직까지 그 정도로 강한 놈들은 없다.

그리고 순식간에 세 명이 죽고 두 명이 행동 불능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고나자 나머지 놈들도 쉬이 접근하지 않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놈들을 살펴볼 여유가 생겨서 뒤늦게나마 가장 특징적인 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인생 진짜 하루 앞을 예측할 수가 없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인간과 마족이 손발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말이지.

이 정도면 내 이번 생은 마족이랑 엮여도 뭔가 단단히 엮여 있다는 확신이 들 정도다.

어찌 되었든 느긋하게 감상할 때는 아닌지라 놈들이 주춤거리는 틈을 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어?"

"미, 미친! 도망친다! 포위해! 포위하라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몰라도 엄청 당황한 외침이 뒤에서부터 들려온다.

내가 자기들을 다 죽일 때까지 싸울 거라고 믿었나? 하긴, 마치 예측한 것처럼 튀어나오자마자 검을 휘둘렀으니 아예 작정하고 다 죽이려고 들어왔다 여길 법하긴 하네.

아무튼, 그런 어이없는 착각 덕분에 포위망이 만들어지기 전에 뛰쳐나올 수 있었으니 일단 감사히 여기기로 했다.

"잡아!"

울창해서 하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숲속. 바위가 많은 산악 지형. 개울 등등.

점점 멀어지는 놈들의 목소리에 신경 쓰면서 내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정보를 수집한다.

숲이라서 다행이었다. 놈들도 제국의 영토 안에 숨어 있는 마당에 개활지에 자리 잡고 있을 수 없었던 탓이겠지만, 동굴이나 던전에 위치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재수가 좋다 여겨도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곳이 어디인지 알 방법은 없었지만 최소한 나중에 여기가 어디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며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어 본능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아무 소리도 없이 바로 옆에 있던 나무가 잘려 나갔다.

"와? 이걸 피해?"

그러게. 그걸 피하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어디서 공격을 날렸는지조차 몰랐을 텐데. 내가 보기에도 감각적인 부분이 짐승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명백하게 날 우습게 여기는 그 태도에 무한한 감사를 보내며 시선을 돌리자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는 놈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굵직한 뿔이 두 개. 갑옷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어쩐지 군복같은 디자인의 의상. 아카데미를 습격했던 놈 보다는 폐던전에서 만났던 마족들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런데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네. 의외로 강한가? 인간은 잘 안 느껴져서 모르겠단 말이지."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이렇게나 죽자고 뛰었는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튀어나와 공격했다는 점에서 역대급으로 위험한 놈인 게 분명하다.

그게 마법이든, 물리력이든 내 실력을 아득히 웃돌고 있다는 소리니까.

"이상하다. 분명 완전히 기척을 죽였을 텐데 어떻...어라?"

그런데 가만히 날 살펴보던 놈의 눈썹이 요상하게 휘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입이 찢어져라 미소 짓는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걸려도 어째 완전 미친놈한테 걸린 기분이 드는...

"야, 작은 엘드미아. 너지?"

씨이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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