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살다 살다 마법 제대로 못 쓰는 게 이렇게 서러운 건 처음이다.
환상 마법의 일종인가 하고 의심했지만, 이내 그 가능성은 접어두기로 했다.
상황에 따라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환상 마법이지만, 아무리 마족이라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게 사전 준비다. 마법을 위해 미리 도구를 준비하고 무대를 세팅하지 않은 환상 마법은 이 정도 환각을 만들 수 없다. 내가 적진 한가운데 있는 거라면 의심이라도 해 보겠는데, 제국령에서 마족놈들이 숲 전체에 그런 준비를 하는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게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니 생각해 볼 가치도 없다.
저놈이 마족의 용사급이 되어서 사상 초유의 환상 마법사일 가능성도 있다면 있겠는데, 그런 놈이면 여기 없겠지.
"더럽게 화끈하네."
상처 자체는 새끼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고, 관통되지도 않았다. 장기가 다쳤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다쳤으면 아마 못 움직이지 않았을까? 괜찮을거야.
하지만 그 상처가 생기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예상을 벗어난 탓에 뼈아픈 실책으로 다가왔다. 점점 부정적으로 빠지려는 사고를 억지로 다잡으며 한 번 더 의식을 환기시키기로 했다.
그래. 황녀 납치 혹은 암살 이라는 게 쉬운 건 아니지. 좀 쎈 놈들 박아서 시도하는 게 정상일 거다. 분명 강한 놈인 건 맞다.
그래도 말이지. 그걸 혼자서 다 해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놈들은 여전히 전선으로 먼저 보낸다. 전선이 괜히 7년간 유지 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즉, 여기에 잡병들과 함께 대기나 하고 있던 저놈이 아무리 강한다 한들 전선에 있는 장군같은 놈들 만큼 강한 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면...내가 이겨 씨발."
지휘관 목 따야 하는데 전쟁에도 제대로 참여 못 하는 새끼한테 일방적으로 처발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실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어떻게 피했는지나 말해 봐."
의지를 다잡기 위해 작게 중얼거린 걸 쪽팔리게시리 주워 듣고 자빠졌네.
"니 목이 왜 안 떨어졌는지 말해주면 생각은 해 보마."
"이거? 별거 없어. 저주받아서 그래."
당연히 말할 생각 없다는 의미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녀석이 즉답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서 순간 벙쪄 있었더니 놈이 하늘을 본 채 턱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찢겨 죽되 피와 살로 빚어진 모든 것들로는 죽지 못 하리라. 그리하여 너는 정체 속에서 살아갈 것이며 해주解呪의 방법은 오직 죽음 뿐이리라...였나? 장황하지? 근데 진짜더라고."
한 80년 전이었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 관자놀이를 중지로 툭툭 두드리며 말을 마무리짓는 놈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튀어나올 뻔했다.
아니, 대체 어떤 생각 없는 새끼가 저딴 미친 새끼한테 불사의 저주를 걸어? 걸려면 전사한테 걸던가 아니면 씨발 마법조차 못 쓰게 걸던가.
"어떤 저능아가 그딴 저주를 생각 없이..."
기어이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본심을 주워들은 놈은 다시 몸을 꺾어가며 웃어 보인 뒤 말했다.
"흐흐흐흐. 반응이 재밌네. 그런 말하는 놈은 처음 봤어. 사실은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고 비웃었지만 말이야. 근데 이게 의외로 저주더라고."
인간의 세 배는 넘게 사는 종족인 놈이 겨우 80년 지난 거로 식상하게 불멸자의 비애같은 걸 지껄일 생각인 건가 하는 생각 반, 놈이 주절 주절 떠드는 동안 대책을 강구하고 힘을 비축하려는 의도 반을 담아 입 다물고 경청했더니 녀석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던 것과 달리 점점 광증이 도지기 시작했다.
"그 지랄 맞은 년이 건 저주의 핵심은 '정체'였던 거야...80년...씨발 80년!! 자그마치 80년이 지났는데도 내 마법과 마력이!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고!! 마법의 총애라 평가받던 내가!! 그깟!! 버러지 년 하나 때문에!! 아예 뿔을 뽑아버리고 산 채로 불태워 죽여 버려도 시원찮았을 년 때문에 내 삶이 망가졌다고!! 이게? 이게 마법이야? 내가 저주에만 걸리지 않았어도 이딴 편법은 마법으로 취급조차 안 했어!"
뭐? 편법?
다른 건 다 미친놈의 넋두리라 치더라도 이건 무시할 수 없었다.
"마력과 분리된 채 고립되다니...이런...개 같은......후. 또 화가 사라졌군."
제발 좀 더 미쳐있길 바랐던 것과 달리 녀석은 또 다시 갑작스럽게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컨셉이 아니라 진짜 미친거였네.
"정체엔 여러가지가 걸려있었지. 감정도 당시에 느끼고 있던 감정. 기억력도 그 당시와 비슷. 덕분에 돌이키면 미친듯이 화가 나더라도 갑자기 뚝 끊기고 일주일 전에 있던 일은 가물가물한데 80년 전 일은 또렷하고 그렇더라고?"
그렇게 80년을 살다가 저렇게 맛탱이가 가버린 거라는 확신을 가지며 난 놈이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말을 분석했다.
마력과 분리된 채 고립. 편법으로 사용하는 마법. 정체.
내가 그래도 완전히 마법에서 손을 놓았던 건 아니라서 그 정도 정보만으로도 당장 꽤나 타당한 가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설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개 쩔어서 착 가라앉았던 기분이 급상승할 정도였다.
"그랬던 거였어. 너 이 새끼. 마나를 쓰고 있구나?"
역시 이 세상에 신은 계셨다. 내 말에 평온했던 녀석의 얼굴이 다시 뒤틀리기 시작했으니까.
"세상에 씨발...이렇게나 기적이 넘치는데 말이야. 용사를 안 믿는 골 때리는 새끼들이 생겨나다니 말세다 진짜. 안 그러냐 미친놈아?"
"입...닥...쳐어..."
엄청나게 쪽팔린 건지 아니면 인간인 나한테 사실을 간파당한 거에 눈이 돌아간 건지, 놈은 이를 갈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래. 무려 마력을 주무르며 마법을 쓰던 마족이 그딴 짓을 하면 몸이 펑 하고 터져 버리는 인간이나 쓸법한 마나로 마법을 쓰게 되었으니 편법이고 치욕스럽겠지.
몸에 있는 마력을 일으켜서 쓰는 게 아니라 마나로 정제하는 과정을 거쳐서 쓰니 마력이 느껴질 리도 없고, 마법의 발동에서부터 완성까지 모조리 몸에서 나오는 마나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완성된 마법만 마력의 형태가 보이고 그 과정이 보이지 않았던 거다.
물론 제 입으로 당당하게 잘난 과거가 있었다고 떠든 놈답게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고 결국 안정화 시키긴 했겠지. 아마 대입시험 공부하듯이 열과 성의를 다 했을 거다.
근데 정체의 저주에 걸려 있네? 이전까지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편법으로 80년간 연마했다해서 뭐 얼마나 성장할 수 있었겠어?
쓰는 마법이 한정적인 것도, 그런 주제에 위력은 기똥찬 것도, 그만한 잘난 과거가 있었음에도 이곳에 짱박혀 있는 것도 전부 다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 깨달음의 즐거움을 공유하기 위해, 난 내가 이해한 모든 것을 뛰어난 요약 실력을 사용해서 간단명료하게 다듬은 뒤, 놈에게 말해주었다.
"이거 완전 하자있는 퇴물 새끼였잖아?"
"죽여 버리겠어어어!!"
갑자기 아드레날린이라도 치솟는 건지 이젠 옆구리의 상처따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다.
놈이 눈을 뒤집으며 준비하는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거리를 벌렸다. 마음 껏 쏴보라지. 어차피 눈에 보이는 이상 화살과 비슷한 수준이니, 붙어 있다가 사각을 찔리지 않는 이상 저런 물리적인 절삭과 관통에 치중된 공격은 어렵지 않게 피할 자신이 있다.
문제는 저놈의 분노가 급발진과 급제동을 오고 간다는 점. 그리고 내가 녀석의 한계를 알아낸 것과 별개로 정작 놈을 공격할 수단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피와 살로 빚어졌다는 부분은 생명체를 말하는 거겠지. 그럼에도 검이 먹히지 않은 건 이게 찢는 게 아니라 베는 것이기 때문일 거다.
"돌아가면 꼭 저주학에 관한 것도 공부하고 만다."
얼추는 들은 기억이 있다. 해주가 불가능한 저주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그저 해주법을 복잡하게 혹은 극단적으로 꼬아놓아 최종적으로는 대상자의 자멸과 함께 해주가 되도록 만드는 게 핵심이라는 이야기를.
그리고 강력한 저주일수록 해주법은 술자 한정으로 매우 손 쉬운 것이라는 이야기도 같이 들었었지. 그렇게 안하면 오히려 술자가 피해를 입는다 했던가?
저 미친놈이 뿔을 뽑네 뭐하네 했었으니 저주를 건 것은 마족 혹은 그 외에 뿔이 있는 어떤 종족이었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대륙에서 저주를 걸 수 있고 뿔도 달린 종족은 용족과 마족 뿐이다. 그리고 용은 진짜 말그대로 용이라서 아무리 마족이라 할지라도 감히 깝치지 못하지.
분명 녀석에게 저주를 건 사람은 놈과 같은 마족이다. 그렇다면 결국 답은 마력에 있는건가? 하지만 마력으로 사람을 어떻게 찢...어?
가능할지도?
"후. 이번엔 화가 좀 오래 갔네. 어차피 네가 날 죽일 방법은 없잖아? 네가 내 마법을 어떻게 피하고 있는지만 알려주면 고통없이..."
"뭐라는거냐 마나나 쓰는 퇴물 새끼가. 마나는 나도 안 써 임마. 곧 죽여줄테니까 좀 닥치고 있어봐."
"죽여 버리겠어어어!!"
물론 난 마나를 못 쓰는 거지만 열등감 폭발 시키는데 이만한 게 없지.
원체 자존감이 높은 건지 한 마디 던진 것만으로도 다시 분노조절장애에 걸려버린 놈이 쏘아대는 마법이 점점 관통형 마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일말의 이성이 마력을 보존하기 위해 힘쓰는걸까? 다른 건 몰라도 나에게는 좋은 현상이다. 저건 내 몸에 구멍은 좀 낼 지언정 관통은 못하더라.
일단 나는 최대한 주변의 나무와 지형들을 이용해 놈의 공격을 피하면서 뽑았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분산되는 신경을 어떻게든 집중시키며 하나의 감각에 집중했다.
떠올린 것은 게이트를 막 통과했을 때 느꼈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온 실들이 엮여 거대한 천이 되며 휩쓸리는 듯한 감각.
그건 분명 마력이다.
그리고 그에 맞춰 확장되던 감각으로 짐작컨데, 사람의 몸 뿐만 아니라 물건에도 마력은 깃든다. 그래서 인간이 정제한 오러가 검에 깃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정제라는 과정을 거쳐 변형된 오러는 마력과는 아예 다른 게 되어버리고, 사람은 몰라도 물건은 거기에 맞춰 적응하지 못할테니까.
인챈트나 마법검의 제작이 가능한 건, 그게 마나를 연료삼아 궁극적으로는 마력을 발현 시켜 마법을 발동시키는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검에 마력을 씌우는 게 가능했던거지. 결국 같은 마력이니까.
그렇다면, 결국 마력이라는 건 그게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든 물건에 있는 것이든 혹은 타인의 마력이든 어느 정도 동기화같은 게 가능하다는 의미 아닐까?
그리고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마력으로 검과 검집을 이어서, 놈의 몸통과 머리통에 동기화 시킨 뒤 그대로 마력을 움직여 검을 뽑을 경우...
검과 함께 놈의 머리통도 뽑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했지만 정말 사탄도 기립박수를 칠 만큼 개 쩌는 생각인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