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게 상상해봤지만 결국 방법은 단순하다.
내 마력으로 꼭두각시 인형의 실처럼 검의 마력에 연결하고, 그렇게 연결해서 움직일 수 있게 된 검의 마력을 다시 한번 놈에게 연결한다. 그것만으로 놈의 머리가 당첨 걸린 해적 룰렛마냥 하늘로 솟구치게 될지는 미지수지만...당장 뾰족한 수도 없는 마당에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말로 단순한 일들은 언제나 실전에서 단순하지 않은 법이지.
"너도 그 년처럼 산 채로 찢어버려주마!!"
"오? 완전히 돌아버린 건가? 이번엔 장작이 좀 오래 타네?"
체감상 거의 3분에서 5분 간격으로 평정심을 되찾던 녀석의 두 눈에 핏발이 선 뒤로 벌써 10여분이 지났는데도 놈은 여전히 분노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관통형 마법을 고수하고 있긴 하지만, 저 마법에는 이미 익숙할 만큼 익숙해져서 마력을 온존하며 피할 여유마저 생겼다.
"대체!! 왜!! 안 맞는 거야!!"
그런데도 녀석은 마법을 변형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게 놈의 한계라는 걸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긁으면 게거품을 물지 않을까 싶은 모습에 힘을 얻으며 다시 한번 검에 집중한다.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뒤로 검과의 동기화까지는 할 만했다.
이렇게 사방팔방 뛰어다니면서도 연결이 가능할 정도니까. 오른손을 검집에. 왼손을 검에 연결한 뒤로 왼손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검집에서 검이 알아서 뽑히려는 게 느껴진다. 덕분에 내 예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는 확신이 생겼다.
와.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게 익숙해지면 어검술 아닌가? 상황과는 별개로 처음 마력으로 신체 강화가 가능했던 날만큼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다.
동시에 내가 이걸 할 수 있다는 건 다른 마족놈들 중에서도 이게 가능한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떨쳐 냈다.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하면 된다. 이 자리에 있는 놈만 신경 써도 정신없는데 그딴 걱정을 왜 지금 해.
"문제는 저놈이랑 이걸 연결하는 건데..."
검에 마력을 연결하며 느낀 가장 심각한 위험 요소가 바로 이거다.
검은 내가 들고 뛰는 거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놈과 내가 다 움직이면 죽었다 깨어나도 연결 못할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못해도 둘 중 하나는 정말 꼼짝 않고 가만히 있어야 연결될 가능성이 생긴다.
당연히 저놈이 내 뜻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줄 리 없으니 가만히 서 있는 건 무조건 내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벌떡 튀어 나가서 갑자기 지를 노려보며 가만히 요상한 똥폼이나 잡는 걸 보고도 저놈이 멀뚱히 구경만 해 줄까? 신나게 내 몸에 바람구멍이나 내겠지.
그 전에 빠르게 연결해서 죽여야만 한다.
아예 안 맞는 건 지금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것이니 최대한 급소를 보호하고, 주변의 나무 같은 곳에 깃든 마력을 피할 수 있도록 탁 트인 개활지에서 온전히 놈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상태로 시도한다.
그리고 놈이 방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겠지.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윤곽이 잡혀서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야! 니 말이 맞는 거 같다!"
"뭐...?"
"도망치는 게 나을 거 같아! 저주 때문에 죽이지도 못 하는 건 둘째치더라도 너 같은 퇴물 새끼한테 잡힐 리가 없으니까! 잘 있어라! "
마지막 도발을 신호 삼아 다시금 달려 나갔다.
"아아아아악! 죽인다! 의문이고 나발이고 죽여 없애버린다아아아!"
마나를 쓰는 걸 알았으니 처음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염려할 필요따위 전혀 없다. 진짜 그냥 평범한 인간 마법사처럼 비행 마법으로 날아오면서 날 추적하다가 툭 떨어진 것일테니까.
"쥐 새끼처럼 도망쳐봤자 아까랑 다를 게 없다는 걸 알려주마!"
아니나 다를까, 놈은 바로 공중에 떠오르며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달리는 날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녀석의 추적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이어졌지만 그게 딱히 나의 달리기가 느린 탓은 아니었다.
솔직히 울창한 숲속에서 이 정도까지 달리면 엘프들도 인간치고는 잘한다고 칭찬할걸? 그냥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유유히 날아오는 놈이 매우 유리한 거뿐이지. 그러면서 제 딴에는 열심히 공격을 날리고 있지만 공중에 떠 있는 탓에 나무들에 가려지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평범하게 쏠 때보다 더욱 처참한 명중률을 선보이고 있는 상황인지라 도망 자체는 게이트에서 처음 나왔을 때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수월했다.
혹시라도 추적을 포기할까싶어 중간중간 도발을 일삼으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목표로 했던 개활지 비스무리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씨발."
거기가 예상과는 달리 뒤가 없는 벼랑 끝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지. 상황봐서 아니다 싶으면 뛰어내릴 수 있다는 점에 좋아해야 하나?
이미 도착한 이상 다른 선택지도 없었기에, 그대로 몸을 돌려 상공에 있는 녀석을 확인하며 달려오면서 열심히 계획한 대로 마력 동기화를 시도했다.
동시에 제발 놈이 방심하게 해 달라고 신께 기도하며 녀석이 던진 마법 중 하나에 다리를 들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허벅지를 파고드는 마법을 본 탓인지는 몰라도 어째 아까보다 더 아프게 느껴진다!
"씨이이...!"
"하! 결국 여기까지구나!"
그래도 녀석이 비웃음을 터트리며 고도를 낮추는 걸 보아하니 이 악물고 맞은 보람은 있는 것 같다. 검에서 뻗어나간 마력의 실들이 놈에게 닿는 것도 순조롭...
"으어?"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며 나도 모르게 검을 땅에 짚으며 무릎 꿇고 말았다. 방금 맞은 마법에 뭔가 수작을 부린 건가 싶은 찰나, 광기에서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 놈이 말했다.
"흥. 결국 인간의 몸으로 마력을 쓴다는 게 그런 거지. 네 몸도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보구나."
아뇨? 그거랑은 감각이 다른 데요?
그래도 덕분에 지금 상황이 놈의 노림수가 아니라는 건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결국 이건 놈의 마력에 개입하려해서 생긴 탈력감이라는 말인데, 사람 몸무게 하나 얹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뭔 돌덩이가 내리누르는 기분 속에서 녀석에게 이어진 마력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다.
사람 목숨이라는 게 병뚜껑 따는 것처럼 쉽게 따이지는 않는다는 건가? 참 빡세게 구네.
무엇보다 몸에서 마력이 쫘악 빨려 나가는 느낌이라서 혹여 놈에게 내가 생기를 불어 넣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직도 화가 남은 기분이지만...그래도 침착해졌으니 기회를 줄게. 내 마법을 어떻게 피한 거지?"
"어차피 뒈질건데 그걸 뭣 하러 말하냐?"
"고통스럽게 죽던가. 깔끔하게 목이 잘려 죽던가의 차이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말할 사유가 되지 않나?"
내 죽음이 아니라 네 죽음을 말한 거였는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검을 쥐는 나를 보는 녀석의 시선에 의문이 깃들었다.
"그 몸으로 싸우려고?"
"씨이발. 말 걸지 마라. 진짜 더럽게 힘드니까."
마치 손발이 저리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 마력의 끄트머리에서부터 넘어와 전신으로 퍼진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그 감각을 통해 놈의 마력과 연결되었다는 걸.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검집에서 검을 뽑는 게 아까와는 달리 엄청 힘들어졌다.
마치 내가 쥐고 있는 검이 놈의 몸뚱이인 것처럼.
"음...? 뭔가 이질감이 느껴지는데."
연결에 집중하며 놈을 바라보니 왼손으로 자기 목을 쓰다듬는 게 보인다. 힘든 건 둘째치고 예상이 확실히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이제 사람 하나 죽일 건데 웃음이 나오다니 나도 점점 미쳐가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 봤네."
"인간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시간을 끌 생각이면..."
"나도 니 이름 별로 알고 싶지 않아.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뭔 말을 하려는 거냐는 듯이 바라봐도 해 줄 수 있는 건 작별 인사 뿐이다.
"만나서 역겨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앞뒤 가릴 거 없이 모든 마력을 양팔에 쏟아 강화하며 검을 뽑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크, 크컥?!"
하지만 검은 검집에서 1미리조차 뽑히지 않았다. 그래도 효과가 없는 건 아닌지 놈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며 다급하게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무, 뭣?! 무슨, 무슨 일잌?!"
그대로 조금만 더 상황 파악을 못해주면 좋겠는데, 열심히 허공을 구르며 부릅 떠진 놈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그리고 나와 내 검을 번갈아 보며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세상 일 참 마음대로 안 된단 말이지.
"이이이익! 무슨 개수작을!!"
놈의 주변에 구체가 생겨났지만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칼날을 꺼냈으면 당장 벼랑으로 뛰어내리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저건 다르다.
저건 급소만 피하면 이 자리에서 버틸 수 있다.
"죽어! 죽으라고!!"
다시 광기가 묻어나기 시작하는 외침과 함께 열 개가 넘는 구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쏘아지는 것을 보며, 난 최대한 몸을 숙이고 옆으로 비틀어 앞으로 뻗은 팔과 다리로 머리와 급소를 보호했다.
저 살벌한 공격에서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제대로 머리를 날아오는 건 어떻게든 피해야 했기에 똑바로 놈을 노려보며 다시 검에 힘을 준다.
끼릭, 하고 이번엔 조금이지만 확실하게 검이 움직인다.
그렇게 검이 1미리씩 뽑힐 때마다 놈의 행동과 시선에서 다급함도 흘러 넘쳤다.
"끄아아악!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공격. 80년간 느껴보지 못했을 통증. 그리고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목숨의 위협이 방금까지 이어지던 방심과 환상의 시너지를 일으킨 덕인지, 놈은 무차별로 마법을 날릴 뿐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날 넘어뜨리고 싶겠지만 내가 놈에게 닿지 못한 것처럼 놈도 내 몸에 닿지 못해서 시도조차 않는 거겠지. 놈에겐 결국 저 마법만이 유일한 발버둥인 것이다.
그 발버둥이 꽤 격해서 진짜 온몸에 바람구멍이 나는 게 아닌가 싶던 그때.
검에서 느껴지던 저항이 순간적으로 반 토막 나는 걸 느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나와 눈을 마주친 저놈 역시 그것을 눈치챈 듯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뜬다.
그곳에는 목을 노렸을 때의 무심하게 반응했던 놈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표정와 외침이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동정? 나 죽이려는 놈에게 그딴 걸 느낄리가 오히려 최선을 다해 비웃었다.
"느껴지냐? 너의 죽음이?"
"엘드미아아아아!!"
"그래. 그게 나다. 씨발아."
승리를 확신하며 검을 뽑았다. 겨우 검을 뽑는 것 뿐인데도 마력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 없는 풍압같은 게 일렁였지만 다행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검이 반 정도까지 뽑히는 그 짧은 순간. 놈이 쏜 마법 하나가 마력이 요동치는 칼날에 부딪치자마자 비산하며 흩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속에서 예전에 예카트리나와 다른 이들이 말했던 빛이라는 걸 얼핏 본 듯했지만...피를 많이 흘려서 헛것을 본 건지 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놈의 머리는 확실하게 하늘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