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실리에의 일과는 평범하다.
엘드미아가 수도로 떠나고 1년 반이 훌쩍 넘었음에도 그녀의 일과는 그와 함께 했던 시절과 비교했을 때 큰 변화가 없었다. 알리샤의 거듭되는 호의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그녀의 여관에서 지내게 되었음에도, 아실리에의 일과 대부분은 숲속에 있는 오두막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게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마치며 1층으로 내려오는 그녀를 알리샤가 맞이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실리에."
"좋은 아침이에요 알리샤. 오늘 스튜도 참 맛있을 거 같아서 기대되네요."
아실리에가 눈을 뜨는 것은 항상 새벽 6시 무렵이었음에도 알리샤는 그보다도 일찍 일어나 어김없이 그날의 요리를 준비한다.
겨우 2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음에도 오그웬과 여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도시의 외곽은 대부분 성벽이 둘러져 있었고, 도시는 수년 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계속 발전하고 있었으며 여관은 이제 성광 십자회의 본격적인 후원을 받는 보육원 겸 식당이 되어 있었다.
첫 단추를 꿰는 것은 엘드미아와 라그니스였을지 몰라도 결국 성광 십자회는 알리샤의 헌신을 인정하고 일말의 의심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아실리에가 보기에도 쉬이 믿기 힘든 일이었다.
성광 십자회가 도시 내에서는 온화하고 많은 자선 사업을 시도할 지언정, 그들이 속세의 인물들과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후원까지 하는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문 경우였다. 보육원이 필요하다 느끼면 차라리 건물을 세우고 보는 이들이었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건 실상 같은 신도로 취급하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처음엔 대체 어떻게? 라는 의문도 있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알리샤는 종교만 없을 뿐이지 종교인과 다를 바 없는 헌신의 삶을 이어 나가고 있었으니까.
"오늘도 저녁에 들어올건가요?"
대체 언제부터 만든 건지 몰라도 이미 완성된 스튜 한 그릇을 내주는 알리샤에게 눈웃음으로 화답하며 아실리에는 대답했다.
"어제랑 비슷한 거 같아요. 딱히 더 손이 가는 일도 없고, 겨울 대비도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까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터라 등불에 의지해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동안 아이들이 일어나며 알리샤의 일들을 돕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아직 10살도 되지 않았을 법한 꼬마들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 불만없이 웃으며 움직이는 모습에 아실리에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누나!"
"잘 다녀오세요 언니!"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는 아이들에게 웃음으로 화답하며 밖으로 나온 아실리에는 새로 지어진 지 얼마 안 되는 마구간에서 쉬고 있던 말에게 안장을 얹고 박차를 가했다.
모험가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그녀의 일과는 항상 같았다. 오두막으로 가서, 처분하지 않은 가축을 돌 보고, 집을 점검한 뒤 마을이 있었던 폐허로 내려가 엘드미아의 부모님들이 잠들어있는 무덤을 정돈하고 옆에 세워진 조촐한 만신전을 정비한다.
세련됨하고는 거리가 먼 만신전은 엘드미아가 나무를 깎아 이전에 있던 만신전을 흉내낸 것에 불과했다. 특정한 신을 확실하게 믿는 것도 아니면서 소년은 신앙에 아무런 회의감도 지니지 않았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부모를 향한 공양조차 대충하지 않았었다.
그러한 일과를 마친 뒤 오두막 인근을 잠깐 거니는 것만으로도 아실리에는 어렵지않게 과거를 추억할 수 있었다.
차라리 따라가고 싶었다. 엘드미아가 떠나던 그 하룻밤 사이 아실리에는 정말 많은 것을 고민했다. 엘드미아가 잠든 뒤에도 그 얼굴을 보며 수없이 결정을 번복하고 같이 가고자 했다.
그런 무수한 유혹 속에서, 그녀는 더 이상 돌아올 곳 없는 사람이 돌아올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지키기로 결정했다.
따라나선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럴 경우 자신은 분명 엘드미아의 죽음이 두려워 앞을 가로 막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항상 해 오던 이런저런 잡생각과 함께 일을 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빠르게 흘러 갔으면 하는 마음에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고, 다행히 시간이 빨리 흘러갔을 뿐이었다.
그렇게 점심 시간에 이르러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오두막에서 휴식을 취할 무렵에 아무도 찾아올 일 없었던 이전까지의 일상의 끝을 알리는 방문자가 나타났다.
"아실리에! 계십니까?"
다급하게 말을 타고 달려오자마자 외치는 여성의 목소리. 하지만 기억에 없는 목소리였기에 아실리에는 경계하며 활을 꺼내 들고 인기척을 죽였다.
짧은 순간에 혹여라도 최근 트러블이 일어날만한 일이 있었는가를 떠올려보았지만 조금도 짐작가는 부분이 없었다. 오그웬의 모험가 길드는 변경의 길드가 으레 그렇듯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었고, 자잘한 트러블이 있다하더라도 정착한 모험가에 가까운 아실리에에게는 여러모로 관대한 편이라서 더욱 그랬다.
무엇보다 오두막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 없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찾아오는 상황이 일반적인 경우라고 믿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안 좋은 쪽으로 들어 맞았다.
"저는 서리 잎사귀 부족의 엔티레 하얄로이입니다! 용사 지크프리트의 동료이며 엘드미아 경의 일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서 제국의 사절로서 왔습니다!"
콰앙! 자신도 모르게 문을 박차다시피 하며 뛰쳐나간 탓에 말에 타고 있던 어린 엘프가 기겁했지만 아실리에는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넬 겨를조차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엘디...엘드미아의 일로 도움이 필요하다니?"
"바, 반갑습니다 아실리에. 푸른 넝쿨 부족의 하이 엘프를 뵙게 되어..."
황급히 놀란 말을 진정시키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엔티레였지만, 아쉽게도 지금 상황에서는 최악의 수였다. 질문의 답이 아닌 자기소개에 아실리에가 그대로 문을 후려치며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히익! 죄송합니다! 생략하겠습니다! 엘드미아 경의 위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귀걸이! 아실리에께서 만들어 주신 귀걸이! 엘드미아 경이 가진 마도구라고 할 만한 게 그거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거로 위치를 파악해서 텔레포트를 해야 합니다!"
엘프에게는 계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족을 통틀어 하이 엘프는 특별했다. 그들이 강하거나 우수한 혈통이라서가 아니라 세계수의 시련을 통과하고 격을 인정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이 엘프들이 딱히 높은 지위를 가지거나 권력을 지니는 것이 아님에도 엘프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우대하고 숭배했다. 그리고 인간의 계급 사회가 익숙한 엔티레 같은 이들은, 경외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의 아실리에가 배려할 부분은 아니었다.
"안내 해!"
두 말 없이 말에 올라타며 외치는 아실리에에게 속으로 감사하며 엔티레는 시키는대로 행동하기 위해 바로 말을 몰았다.
안 그래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오그웬으로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실리에에게는 너무 길게 느껴졌다.
엔티레를 따라 알리샤의 여관 앞에 도착했을 때 아실리에를 맞이한 것은 익숙하지 않은 수많은 얼굴들과 익숙한 라그니스의 얼굴이었지만, 분위기를 보아 그녀가 대표로 온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등장으로 알리샤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이번만큼은 아실리에도 그들을 걱정할 틈이 없었다.
그녀가 급하게 말에서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말을 건 것은 자신보다도 작고 어려 보이는, 투명하게까지 느껴지는 백발을 뒤로 넘긴 소녀였다.
"여를 구하다가 엘드미아가 제국 어딘가로 좌표가 바뀐 게이트로 넘어갔느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높은 지위에 있음이 분명한데도 아무런 인사치레 없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그 모습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기에, 아실리에는 아무런 반문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엔티레에게 들은 이야기와 방금 이야기만으로 이들을 따라갈 이유는 충분해졌다. 정말로 엘드미아가 위급할지 모르는 상황에 더 이상 시간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은 그 정도면 됐습니다. 가죠."
"음. 벤데 후작. 게이트를."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즉각 명령을 내리는 대상이 후작이라는 점에 아실리에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려야 했다. 벤데 후작이라 불린 금발의 남성이 품에서 작은 육면체를 꺼내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라그니스가 조용히 손을 잡아 왔기에, 아실리에는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정시킬 겸 그녀에게 물었다.
"라그니스. 엘디가 이번엔 또 뭘 저지른 거니?"
"...제국의 황녀를 마족들의 마수에서 구해 내고 혼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죠."
뭔가 앞에도 할 말이 많지만 일단은 생략한다는 뉘앙스가 강한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이미 충분히 놀라운 내용이다 보니 아실리에는 라그니스가 생략한 부분에 대해서는 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이티스엘의 수도로 이어지는 임시 게이트를 열 것이니라. 이후 제국의 수도로 가서 황실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위치를 특정 지을 것이고. 달리 물어볼 게 있느냐?"
"아뇨. 지금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구해줬다고는 해도 왜 황녀씩이나 되는 인물이 직접 움직이냐고 물어보고 싶기도 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기에 마찬가지로 나중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