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라고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딱히 신경 안 쓰는 편이다. 아실리에와 지내는 동안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부터는 밤 사냥을 자주 하기도 했고, 밤눈이 꽤 밝은 편에 속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무리 밤이 빨리 찾아온다한들 대낮부터 지금까지 숲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좀 신경 쓰인다.
단순히 숲이 거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만큼 내 몸의 상태가 개판이라는 게 문제였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몸을 이끌고 숲속을 거니는 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고, 정령들은 길이라는 개념이 약하다 보니 그들에게 받을 수 있는 도움은 한정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도움이 부질없는 건 아니다. 그렇게 피를 흘리고 주변의 온도가 점점 내려가고 있음에도 난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이것마저 없었으면 진즉에 발걸음을 멈추고 어설픈 위치에서 몸을 숨겨야 했을 거다.
그 도움이라도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적당한 위치에 깎여 있는 절벽 아래에 자리 잡고 쉴 수 있는 것이니 백 번 감사해도 모자랄 일이다.
"마족들의 밤눈이 어두웠으면 좋겠는데..."
흔적을 지울 여력도 없고, 아예 추적을 뿌리칠 수도 없다. 간단한 도구조차 없으며 체력적으로도 꽤나 한계에 이르렀다. 상처를 제외하더라도 너무 많은 마력을 한 번에 다룬 것이 원인인지 쉽게 회복이 되질 않는다.
이 상황에서 내가 고른 선택지는 결국 모든 걸 운에 맡기는 것에 가까웠다.
적들의 추적술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길 빌면서 지금 이 자리에 짱박혀서 몸을 추스르는 거지.
나도 안다. 조금도 계획적이지 않고 안전하지도 않은 이 선택이 내 바람대로 흘러갈 거라 믿는 것은, 에스뮈에를 납치 혹은 암살할 목적으로 제국의 영토에 들어와 게이트까지 건설해 가며 몸을 숨기고 있던 놈들 앞에서 부질없는 행복 회로라는 것을.
하지만 이 지친 몸을 이끌고 움직여 봤자 더욱 지친 상태에서 꼬리를 잡히게 된다. 툭 까놓고 말해서 8살 때 도적놈들 상대했을 때보다 상태와 상황 모두 안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수준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덜 눈에 띄는 곳에 숨어서 놈들이 날 못 찾을 희망과 함께 체력을 조금이라도 비축해 두는 게 낫다.
"심지어 비도 오려는 모양이네. 아주 개판이야."
분명 오전엔 하루 종일 맑았던 거 같은데 마치 뒤지게 고생 좀 해보라는 것처럼 비가 내릴 조짐이 보이는 걸 애써 무시하며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깊이 잠들어도 정령님께서 깨워 주신다고 장담한 만큼, 눈을 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려고 마음 먹은 순간.
"팔자가 좋군."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가 순식간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서 바짝 긴장하며 다시 눈을 떴다.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따라잡힌 건가 싶었지만, 분명 방금 눈을 감기 전과 비교해서 확연히 어두워진 주변에 몰아치고 있는 폭우를 보고 나서야 내가 자겠다고 마음 먹은 순간 졸도해 버렸고, 지금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과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목소리를 낸 놈과의 거리를 확인 해보니 절대로 폭우를 뚫고 중얼거림이 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제 막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검은 인영人影은 폭우 속에서조차 소리와 인기척을 죽이기 위해 조심히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일부러 나 들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을 리도 없다.
즉, 정령님이 보우하셨다는 소리다. 마음같아서는 절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군.
쿠르릉! 번개가 번쩍임과 동시에 울리는 소리는 천둥이 아니라 벼락의 것이었다. 상당히 지근거리에서 떨어진 것인지 순간 세상이 하얗게 빛나며 내게로 다가오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밝혔다.
뿔 달린 여섯 명의 남성들은 굳이 물어볼 것도 없이 마족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상태로 나를 노려보는 그들은 하나 같이 검을 빼 들고 있었음에도 달려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는 그 쪽은 팔자가 사납네."
잠긴 목을 가다듬고 좀 크게 말하자 여섯 명이 움찔거리는 게 어둠 속에서도 확실히 보인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던 놈이 갑자기 말을 걸어 온데다가 중얼거림을 듣고 대답까지 했으니 놀랄 법도 하지. 그 와중에도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고 포위망을 펼치는 다섯 명을 뒤로하며 가운데에 위치한 놈이 대답했다.
"용사인 건가?"
음.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네. 나도 굳이 대답할 의리는 없으니 다시 질문으로 답했다.
"대장이 죽었으면 얌전히 돌아가지 왜 쫓아온 거냐?"
최대한 여유로운 척을 하고 있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사실 놈이 대장이 아니었다던가, 우리 중에서 최약체였지 같은 상황에 맞닥드리게 되면 진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그래도 번개가 칠 때마다 보이는 경직된 얼굴들을 보아하니 그런 최악의 경우는 상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다.
그렇다면 남은 건 허세와 빈틈의 싸움이지.
◈
절벽 아래에서 비를 피한 채 잠들어 있는 인간을 발견했을 때.
추격대를 이끌던 마족은 해가 떨어지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대장을 죽인 인간의 흔적을 기어이 찾아낸 부하를 치하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조용히 포위망을 펼쳤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는 엘프라 할지라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을 수준이었지만, 상대는 대장을 죽인 자인 만큼 마족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모닥불 하나 없이 평온하게 잠든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푸념이 나와 버렸던 것이다.
그 푸념에 대답이 돌아왔을 때는 더 이상 한기를 느낄 여유도 없다고 생각했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방금전까지만 해도 감겨 있던 눈이 똑바로 자신을 마주한다는 걸 깨닫고도 그의 입에서 공포에 찬 비명이 튀어나오지 않은 건 순전히 비명조차 못 지를 만큼 놀랐기 때문이다.
마법도, 검도 닿을 수 없는 대장의 목을 뽑아 죽인 자였다. 기습이 아니면 얼씬조차 안 할 생각이었고,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접근한 거였다. 그런데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덤덤하고 확실하게 돌아온 대답을 듣는 순간 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흔적조차 지울 여력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 일부러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대장과의 전투로 서둘러 도망칠 수 없는 상태라고 여겼던 판단이...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기에 서두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대장의 복수는 해야지."
아무것도 대답할 생각이 없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압도되었다는 사실을 반박할 요량으로 대꾸하고 말았다. 그러자 웅크리고 있던 인간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인간들은 녀석을 딱히 대장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건가? 내 눈이 이상한 게 아니면 마족만 보이는데."
"대장을 죽인 자를 추격하는데 실력이 부족한 자들을 데려올 수는 없었으니까."
"너희는 왔잖아?"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인간은 마족의 대답을 지적했다. 그 대답에 대화가 맞물리지 않은 것인가 의문이 들려는 찰나에 인간의 말을 이해한 마족은 이를 악 물었다.
실력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인데 뭐가 다르다고 여겨서 너희는 여기까지 왔냐. 인간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이었지만 부하들의 동요가 확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 동요는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마족은 생각했다. 어쩌면 추격을 이어가는 동안 가장 우려 했던 사태에 직면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저 인간은... 대장을 손쉽게 죽이고 그냥 돌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게이트에서 처음 튀어나왔을 때, 수도에서의 상황을 기반으로 판단하고 너희들의 동료를 죽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공격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인간이 말을 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려 했을 때, 너희의 대장이 날 추격하고 죽이려 했기에 죽였다. 거기에 다른 이유는 없다. 너희가 마족이라서 죽인 것도 아니고, 전쟁 중이라서 죽인 것도 아니다."
무릎을 짚고 일어나는 인간을 보면서도 그 행동을 막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간다는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의 행동에 위기감을 느끼며 뒤로 한 걸음씩 물어났다.
"단순한 이야기지. 검을 들이밀면, 나도 검을 들이밀 뿐이다. 반대로 검을 거두면, 나 역시 검을 뽑을 이유가 없다."
"...지금 회유하는 거냐?"
도망치자는 본능에 맞서 이성이 외쳤다. 결코 대장을 쉽게 이겼을 리 없다고.
지난 80년 간 그 누구도 죽일 방법을 찾지 못했던 이를 어느 날 우연히. 그것도 황녀 납치라는 거사를 앞두고 갑자기 극상성의 존재가 나타나 일격에 죽인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상대 역시 극도로 지쳐있다. 그러니까 여섯 명이나 되는 인원을 두고 거짓을 지껄이며 현혹시키려는 것이라고. 정말 대장처럼 순식간에 죽일 수 있었으면 저런 무의미한 자비를 베풀 이유가 전혀 없다고.
"회유?"
하지만 인간은 너무나도 평온해 보인다.
비록 옷가지는 좀 상한 듯 하나 폭우가 몰아치는 어두운 밤에 확인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넝마짝이 된 옷처럼 팔다리도 성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싶어도 저 태연한 반응과 움직임이 자꾸만 그런 생각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원천 봉쇄하려는 것처럼 인간이 매끄럽게 검을 뽑아들었다.
"조언이다. 선택은 너희의 몫이지. 하지만 고민할 시간은 별로 없을 거다."
이미 인간에게서 마력이 느껴지고, 죽일 수 없는 대장을 죽였다는 것만으로도 공포는 포화 상태였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진즉에 흩어져서 도망치라고 명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지는 전쟁을 겪어온 마족이 공포를 직면했을 때 떠올린 건 개인의 영달이 아닌 종족의 명운이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죽는다."
저 인간은 위험하다. 멀쩡한 지 아닌지 알 수 없다면.
목숨을 걸고 알아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