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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06화 (106/412)

놈이 아무런 의사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선언했음에도 도망치는 마족은 없었다.

너무나도 숭고한 마족놈들의 사명감에 내 가슴이 다 웅장해진다. 그래, 이티스엘도 아니고 제국까지 넘어와서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딴 거로 돌아갈리 없겠죠.

이미 오래전에 결의를 다진 것처럼 자세를 잡고 확실하게 포위망을 좁혀 오는 놈들을 보면서 확인한 내 몸의 상태는 여전히 최악의 컨디션에 가까웠다.

팔다리는 무겁고, 무리해서 뽑아 쓴 마력은 제대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수면을 취하면 좀 나아질 거라 여겼던 거와 달리 몸에서는 열이 나고 있었다.

그래도 가만히 서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나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검집을 쥐고는 놈들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다섯만 모여도 쓰레기 하나가 있는 마당에 여섯 명이나 모였는데 쓰레기가 하나도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무엇보다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마족은 죽음을 각오하는 발언을 한 상태인 만큼, 놈들은 지금 나를 가볍게 이길 거라 여기지 않고 있다. 녀석들이 약해서 그런 건지 내가 죽인 놈이 그만큼 견고한 입지를 지니고 있던 강자였던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회는 있다.

딱 한 놈. 제발 딱 한 놈만 주춤거려라.

그렇게 빌면서 그나마 조금 회복된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하며, 일부러 요란하고 빠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자기보다 강하다고 여겨지는 상대를 다수가 포위했음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 와중에 그 상대가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설 경우, 스스로 판단 내리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명령 아래 합을 맞추기로 예정된 이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결국 3가지다.

움직이지 않고 철저하게 명령을 기다리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언제든지 앞으로 뛰쳐나가기 위해 무게 중심을 앞으로 이동시키는 전사, 경직되거나 몸을 뒤로 빼며 짧게나마 자세가 흐트러지는 쫄보.

그게 단순히 검을 뽑는 동작이라 하더라도 포위한 입장에서는 무기를 뽑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게 최선이니 경계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그 검을 뽑는 동작조차 재빨라서 제대로 된 반응조차 보이지 못했다면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겠지.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 예상에 맞춰 움찔거려주는 쫄보가 내 왼쪽 끝자락에 위치했다.

그놈을 제외한 나머지는 꼼짝도 않고 오직 명령만을 기다리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처럼 반응했다는 게 불행하기 그지없는 점이었지만 그에 대한 걱정은 미뤄두고 일단 쫄보를 향해 돌진했다.

"크윽!"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니 확실히 주저하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대장인 놈이 휘파람 같은 걸로 신호를 보내며 칼 같이 반응했지만, 아직은 내가 놈들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돌진이라 해도 개판 5분 전인 몸에 마력을 두른 걸로는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도 따라잡지 못한다는 건 매우 희망적인 소식이다.

물론 나 역시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놈들과 싸울 수는 없으니 마냥 희망적인 것도 아니지만!

"하아압!"

대장의 휘파람 소리에 맞춰 쫄보가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수많은 훈련을 통해 몸에 새겨진 반응처럼 내 머리를 세로로 쪼개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마족의 검술이라고 인간의 검술과 별반 다를 건 없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뛰어나더라도 사람의 형태를 한 이상 기술은 거기서 거기인 법이다. 일반적인 영역을 초월한 경우라면 다르겠지만, 결국 내가 죽인 대장보다 약하니까 얘들이 병사인 거 아니겠어?

말인 즉 슨, 녀석의 검을 내가 크로스가드로 받아 넘긴 순간 이미 결과가 나왔다는 소리다.

뒤로 빠지지 못하게 타점을 흘리며 손목의 힘만으로 짧게 후려치듯이 놈의 머리를 베는 것만으로도 정수리가 쪼개진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큰 상처가 나는 게 고작인 공격이었지만 마력으로 강화한 육체로 시도한 이상 얄짤 없다. 다른 놈들이라면 기술로 받아쳤을 거 같은데 한 번 당황한 놈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제대로 반응조차 못해보고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지는 놈과 달리 이미 상황 파악을 끝마친 다른 마족들은 거의 동시에 치고 들어왔다.

바로 앞에서 동료가 죽었는데도 욕지기 하나 외치지 않는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그들의 비정함이 끔찍한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실력자라는 사실이 끔찍하다.

만전인 상태였더라도 두 놈은 기습으로 죽이고 시작하지 않으면 귀찮았을 텐데 지금 상대해야하는 상황은 더더욱 끔찍하기 그지없고.

-콰르릉!

또다시 인근에 떨어진 번개가 세상을 새하얗게 밝혔지만, 아쉽게도 내 뒤편에서 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최소한 놈들 중 몇 명은 눈을 감았을 텐데, 그냥 서로가 서로를 한 번 확인할 기회만 줬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나에겐 정말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쳤다!"

"양쪽 팔과 오른 다리!"

그 짧은 순간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한 놈들이 각자 확인한 정보를 외치며 더욱 공격적으로 밀고 들어왔다. 밝아진 틈을 타서 주변 지형을 파악하기 급급했던 나와 달리 놈들은 오직 나만 바라보고 행동하는 듯했다.

욕이라도 한바탕 해주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전혀 없다.

"몰아붙여! 대장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여기서 용사를 처단한다!"

염병. 용사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용사라고 확정짓는 꼬라지 봐라. 안 그래도 지치고 힘들어 죽겠는데 녀석들이 점점 기세등등하게 나오니 막고 피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그때, 한 놈이 과도하게 용기 버프를 받았는지 협공을 뚫고 뛰어 나왔다.

"죽어라!"

대체 무슨 각을 본 걸까. 자기 묫자리 각?

녀석의 과감한 찌르기를 못 피할 정도로 체력이 빠진 건 아니었기에 그대로 검을 쳐 내며 자세를 낮춰 놈의 목을 베어내는 것 까진 좋았으나, 대장인 놈의 검도 나에게 닿고 말았다.

아찔한 통증이 오른팔 하완을 타고 올라와 흐릿해져가던 정신을 번쩍 깨우는 것과 겨우 몸을 빼내며 다시 거리를 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의 몸상태로 보이기 힘든 재빠른 움직임이라서 놈들조차 이를 갈 정도였다.

"빌어먹을, 아직도!"

"나서지마! 말려죽여!"

그러거나 말거나 지휘는 냉철하다. 역시 이런 건 머리부터 치고 봐야하는데. 체력을 비축하느라 기습을 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힘줄을 베인 건 아니었지만 오른팔의 상처는 꽤 컸다. 그래도 왼손을 다친 게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점점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터라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와 중에도 대장인 녀석은 방심하지 않기 위함인지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 넷이면 가능하다! 이 어둠 속에선 제대로 도망도 못 쳐! 결정타를 날리려 하지말...?"

그 모습이 너무 꼴뵈기 싫어서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되길 간절히 바라며 놈을 노려보고 있었더니.

놈의 목에서 화살이 자라났다. 나도, 놈도 그 갑작스러운 변화를 따라가기 못 하고 그대로 벙쪄버렸다.

화살? 갑자기?

"크헉! 하악!"

"대, 대장?!"

"기습이다! 매복이 있...꺼억!"

아니 그런 건 없었는데요. 있었으면 이 고생을 할 리가 있냐.

하지만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한 명의 가슴에 정확하게 화살이 날아와 박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남은 두 마족이 완전히 패닉에 빠져 오도 가도 못 하는 사이 날아온 두 발의 화살도 정확하게 둘의 머리에 명중했다.

이 어둠 속에서 정확히 마족들만 노려서 활을 쏠 줄 아는 강자가 뜬금없이 폭우를 뚫고 등장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난 검을 고쳐 잡고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 화살이 마족만 노린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맛있어 보이는걸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사이코패스가 폭우를 뚫고 먹잇감을 찾아 나섰다는 게 오히려 더 가능성 있는 이야기 아닐까?

"엘디!"

그런 모든 가능성을 다 찢어 버리면서 나타난 건 전혀 상상도 못 한 인물이었다.

"누나...?"

순간 환각 마법에 걸리거나 죽기 전에 환상을 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나도 지랄 맞아서 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백금발 머리카락은 환상으로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어둠을 뚫고 달려온 아실리에가 전력으로 부딪치며 시도한 포옹에 숨이 턱하고 막혔지만,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아니, 대체 어떻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능숙하게 정령을 이용해 빛을 띄우고, 물을 움직여 폭우로부터 격리된 공간을 만든 뒤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살펴보는 건 분명 아실리에였다.

"어쩌자고 알 수도 없는 게이트를 들어간 건데! 세상에, 팔다리가 아주 걸레짝이 되어 버렸잖아!"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실리에의 얼굴을 보고 나니 더할 나위 없는 안도감이 몰려온다. 아실리에는 그대로 날 부축해서 다시 절벽 아래에 앉히고는 차고 있던 파우치에서 이것저것 약초와 붕대들을 꺼내 내 상처를 살펴봐주었다.

"대체 누구랑 싸웠길래 이렇게 다친 거야. 적은 저것들이 전부야? 추격대가 또 있어?"

"아니. 없을 거야. 이미 가장 위험한 녀석은 죽은 데다가 쟤들도 반신반의하면서 쫓아온 거 같았거든."

갑자기 긴장이 확 풀린 탓에 상처의 통증이 더욱 생생하게 와닿았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누나는 내 생사의 갈림길과 너무 인연이 깊은 거 아니야?"

"이 꼴로 농담이 나오니?!"

반사적으로 내 어깨를 후려치는 아실리에를 보면서도 난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여전히 계시는군요 씨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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