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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07화 (107/412)

아실리에의 응급처치가 끝날 무렵에 그녀의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익숙한 검은 갑옷의 기사들과 한 명의 남자 마법사였다.

어떻게 마법사인 줄 알았냐고? '나는 마법사입니다.' 라고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지팡이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비를 피하는 보호막을 펼치며 나타나서 모를 수가 없더라.

사태가 사태인 만큼 이 어둠과 폭우 속에서 적들을 추적하겠다고 할 거 같아 피로에 찌들어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고 있자 하니, 마법사가 매우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황녀님의 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선 이 포션부터 받으시지요. 상세한 이야기와 정황은 그 뒤에 살펴도 늦지 않을 테니까요."

어영부영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은 마법사였지만 그는 한없이 정중한 태도로 포션 외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내 치료를 도왔다. 같이 온 게 분명할 텐데 상세한 과정까지는 알지 못 하는 것인지, 아실리에는 내가 황녀의 은인이라는 부분부터 뭔가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단 침묵을 고수하는 그녀는 역시 노련했다. 나도 대체 뭐 때문에 아실리에까지 부르게 되었고, 어떻게 날 찾은 건지 엄청나게 궁금했지만 나중을 기약하며 최대한 정리할 수 있는 정보를 그들에게 전달해주는데 전념하기로 했다.

상처를 씻어내고 포션을 바르자마자 살이 아물어가는, 어찌 보면 소름 끼치는 광경에 질려 눈을 돌렸을 때에는 이미 마법사와 기사들이 내가 전달한 정보를 기반으로 계획을 수렴한 뒤였다.

"놈들이 에가 경에게 거짓된 정보로 혼란을 유도할 여유는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인간과 마족으로 나누어져 행동했다 하더라도 추격대가 전멸할 가능성과 복귀할 가능성은 염두했을 거라 여기는 게 맞겠죠."

"그럼 저희는 에가 경이 말한 경로를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운이 좋으면 대역죄인들을 포획할 수 있을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법적인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까요?"

"처음 걸어 주신 고양이의 눈만으로 충분합니다. 지속 시간은 문제없을 테니까요."

어쩐지 빛이라고는 아실리에가 부른 정령 밖에 없는데 너무 잘 움직인다 싶더라. 간단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빠르게 사라져가는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자 마법사는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짐짓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궁금한 것이 많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조금만 더 참아달라 부탁드릴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주시길. 아시다시피 저희 황녀님은 불같은 성품으로 인해 기다리는 것을 매우 싫어하시거든요. 우선 도시로 포탈을 열겠습니다."

내가 구한 게 에스뮈에니까 저 사람이 말하는 것도 에스뮈에일 텐데, 불같은 성품이라는 건 정말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로군. 전차와 같은 행동력과 잔혹한 케이크 살해범 햄찌 같은 거라면 공감해 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그가 날 순식간에 도시로 이동시켜 줄 수 있는 마법사라는 것만으로도 매우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완전히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같은 일은 없었다.

포탈을 넘어서서 문명의 냄새를 맡자마자 졸도해 버렸으니까.

제 발로 숙소까지 걸어가는 것조차 못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깨끗한 숙소에서 깨끗한 잠옷을 입은 채로 깨끗한 상태가 된 뒤였고, 창밖에서는 밝은 빛...이 아니라 칙칙한 하늘과 쏟아지는 폭우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덕분에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감이 오질 않아 주변을 확인할 겸 고개를 돌리자 마자 눈에 들어온 건 날 바라보고 있는 아실리에였다.

추적추적 비를 맞았을 때와 달리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 하니 오두막으로 돌아온 기분마저 들었다.

"깼어?"

적잖게 놀랐을 텐데도 아실리에는 변함없이 침착하다. 아직 몸이 무거운 감이 있었지만 명백하게 회복된 게 느껴져서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아실리에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손길로 내 가슴팍을 누르며 말했다.

"안 돼. 더 누워 있어."

"자고 있는 동안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다 나았어."

"세상에 그런 만능의 회복술은 성녀 밖에 발휘 못해. 그리고 여기에 성녀는 없었지. 그러니 안 돼."

"진짠데..."

아무래도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얌전히 아실리에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도 아예 누워 있기는 좀 불편해서 적당히 쿠션을 쌓아 반 정도 눕는 것으로 타협한 뒤에야 우리는 서로가 모르는 사건의 전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니까...그 조그마한 아이가 제국의 제 1 황녀라고?"

"백발 금안에 묘하게 고풍스러운 말투를 쓰는 황녀가 제국에 둘이나 있는 게 아니라면."

"...아니, 정말? 그 아이가 철혈황녀라고?"

아실리에마저 에스뮈에의 별명을 알고 있을 정도라니. 솔직히 예상 못 했다.

"그렇다더라. 난 솔직히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저 귀여움 속에 저돌맹진 성향을 품고 있는 한 마리 햄찌에 불과했지만, 여간 내기가 아니라는 건 지금까지 이어진 사건과 그에 관한 대처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실리에가 만들어 준 귀걸이가 그녀의 귀걸이와 한 쌍의 마도구라는 점을 깨닫고 이를 기반으로 위치 추적 마법을 발동한다는 발상도 발상이지만, 그 계획의 실현을 위해 제국에서 이티스엘의 변경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리를 돌파하며 직접 친서를 들고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감탄을 해야 할지 감격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둘 다 하기로 정했을 정도다.

그 탓에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하고 라그니스와 함께 이티스엘의 귀족들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무례'를 사과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 끌려갔다고는 하는데...

"사과 안 할 거 같은데."

"내가 봐도 그렇더라. 처음에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온 사절에게 했던 말이 '여가 직접 친서를 들고 뛰었는데 사과를 바란다고?' 였어."

한순간 제발 별일 없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정치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내가 감히 에스뮈에를 걱정할 짬밥이 아니었기에 그냥 알아서 잘할거라 믿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로 이 귀걸이에 그런 추적 기능이 있었던 거야?"

그보다 그냥 부적 정도로 여기고 있던 귀걸이에 GPS기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더 믿기지 않아서 화제를 전환하자 의외로 고개를 내젓는 아실리에였다.

"그럴 리가 있겠니. 그냥 한 쌍으로 제작되는 마도구는 같은 마나를 두고 공명하는 법이니까. 그 반경을 엄청나게 넓혀서 억지로 찾아낸 거에 가깝지. 마법사들의 실력이 좋아서 성립된 건데, 그랬는데도 정확도는 조금 부족해. 네 곁이 아니라 좀 떨어진 곳에 도착한 것도 그런 이유고."

그냥 듣기에도 쉬워 보이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황실의 마법사단을 갈아넣다시피 해서 찾아낸 거라고 한다. 그 뒤로는 내가 본대로였고.

"그 정도는 돼야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건가 싶을 정도였어. 정말 누구도 앞을 막지 못하더라."

덕분에 날 구할 수 있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아실리에였다. 거기까지가 이번 사건에 얽히면서 서로가 가졌던 소소한 의문들이었기에, 우리는 간만에 만난 김에 편지로는 미처 다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한 시간이 넘어가도 지루할 일 없이, 그리고 끊기는 일 없이 이어졌다.

밖에서 내리는 폭우조차 보슬비로 느껴질 정도로 즐겁게 이어진 우리의 대화는 내가 길드에서 지정 의뢰를 받은 데까지 오게 되었고, 근황에 대한 것이 얼추 마무리가 지어질 때쯤 잠깐 생각을 정리한 아실리에가 웃으며 주제를 전환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서 난 앞서 느꼈던 모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엘디? 라그니스도 그렇고... 신세를 지고 있는 오가토르프 가문에도 영애가 있다고 하지 않았니?"

"어? 어. 그, 그랬지."

'형이 해 줄 수 있는 조언이라는 건 네게 귀걸이를 건네준 분한테 말할 때 아주 조심해서 말해야 할 거라는 것 정도밖에 없어.'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것은 용사님이자 형님인 지크프리트의 조언이었다.

"철혈황녀도 그렇고... 1년 사이에 여자아이들이 주변에 많이 늘어난 거 같네?"

포근하게 웃고 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정체불명의 한기는 변함없다.

두개골 안에서 일천하고도 하나의 엘드미아들이 비상사태를 부르짖으며 간만에 회의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물론 혈기 왕성한 몸뚱이를 제외하고도 아실리에는 매우 매력적인 여성인 게 맞았고, 개인적으로도 그녀에게 가족애와 이성을 향한 애정을 느끼며 오락가락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기분인 게 상식적으로 맞지 않을까?

아무리 용사님이라고 해도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아실리에의 감정까지 파악했다는 건 좀 무리수가 아닐까 싶단 말이죠?

"누나의 경험을 되새겨봐도...아무리 자기를 위험에서 구해줬다 한들 저렇게까지 열성적으로 움직이는 귀족... 그것도 황녀라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혹시 누나에게 아직 말 안한 게 있니?"

싸늘하다...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 싸늘해!

확실하다! 지크가 맞았던 건지는 몰라도 지금 아실리에의 미소는 결단코 미소가 아니다!

두개골 안에서 만장일치로 진실을 토해내자는 결론이 나오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그...고백을 받긴 했는데..."

"고, 고백?!"

"어. 그렇기는 한데 말이지. 그게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고 할까. 좀 어영부영 넘어갔다고 할까, 그 어영부영이라고 하기엔 좀 큰일도 있었다고 할까..."

자기보다 40센티 정도 작은 소녀한테 입술을 빼앗겼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반응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실리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남아 있던 미소를 지운 뒤였다.

"황녀가 오면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 거 같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차마 라그니스도 포함되는 이야기라고 말할 용기가 없던 나는, 조용히 쭈그리가 된 채 에스뮈에와 라그니스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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