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 속에서 하염없이 에스뮈에와 라그니스를 기다렸지만,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일이 복잡한 것인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바늘 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기분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다가 아실리에의 눈치를 보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유지되던 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아실리에였다.
"그래서, 어느 아가씨한테 관심이 있는 거니?"
말은 평온한 듯하지만 이미 스스로의 눈치가 절망적인 수준일지도 모른다는 걸 자각한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아까 느꼈던 그 싸늘한 분위기는 진짜였던 만큼 딱히 거짓말이라든가 둘러대는 말을 할 게 아님에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나? 내가 나 좋다는 사람 거절 못한 건 사실인데 말이지. 내가 아직 인생의 원대한 목표가 남아 있잖아?"
"그러니까 그 아가씨들이 어떤 방법으로 접근을 하더라도 지금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네?"
뭐지? 내가 할 말을 미리 빼앗기는 이 상황에서 데자뷰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으응...맞아. 내 입장은 그렇다는 거지."
"엘디 입장이 그렇다는 건, 아가씨들은 이미 그런 네 입장과는 별개로 행동하고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어...그렇...지."
"그리고 내가 '어느 아가씨'한테 관심이 있냐고 물은 것에 아무런 반박도 안 하는 거 보니 에스뮈에 황녀 뿐만 아니라 라그니스도 포함인 거네?"
순간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이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유도심문을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흐응..."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아실리에는 뭔가 착 가라앉은 표정과 분위기 속에서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모처럼만의 재회가 이런 의도치 않은 치정문제로 얽히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죽을 고비를 넘긴 게 체감상으로는 조금전이다보니 온도 차가 너무 심하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게 아실리에를 고민하고 가라앉게 만든다는 게 너무 불안하고 힘들다.
그리고 그게 단순히 보호자이자 가족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영역의 문제가 아닌, 이로 인해 아실리에가 나에게 실망하거나 오해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질까 겁이 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게 좋아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고 항상 잘난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는 걸,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다가 이제야 깨달은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아실리에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엘디가 위험을 향해 나아가는 건... 응. 힘들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이해할 수 있어. 그건 이번 기회에 확신할 수 있었던 거 같아."
그런 내 바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아실리에가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보호자로만 엘디의 곁에 있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도 지금 확실히 알았어."
그 말에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봐도 유례없을 정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똑바로 내 눈을 마주 보는 아실리에는 조용히 내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떨림은 없었다. 그저 한없이 침착한 상태로 그녀는 덤덤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120년을 살아온 엘프가 주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엘디를 사랑해."
생긴 건 나이가 좀 들어 보일지언정 결국은 15살 애에 불과한데 어디서 사랑을 느껴준 것일까. 내 딴에는 그녀 앞에서 나이에 신경 쓰지 않고 최대한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했을지라도 결국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았을 거라고 여겼는데.
전생의 기억이 이어져 정신연령만 높을 뿐인 내가 그녀에게 동등한 입장의 어른으로 받아들여질 날은 요원하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냥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굳이 따지면 누나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인간이 어린아이 아니겠니. 장생종의 특징이라고 해야 할까... 나이라는 건 사실 별 의미가 없어. 결국 상대방과의 정신적인 교감에 큰 영향을 받게 되거든."
내 손을 바라보며 말하던 아실리에가 조용히 웃어 보였다.
"원래는 엘디가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오면 그 때 자신 있게 말하고 싶었어. 엘디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 지금도 안 믿는 건 아닌데...다친 엘디를 보고 나니 덜컥 겁이 났어. 이대로 내 마음을 전달하지 못한 채, 내가 없는 곳에서 엘디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겠더라. 심지어 같은 인간 아이들이 엘디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 알게 되니까. 흠, 흠. 음...질투가 났지."
그래서 좀 처음에 과민반응을 하긴 했어. 라고 말하는 아실리에에게 차마 과민반응인 정도가 아니라 무서울 정도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옛날에는 이런 거로 휘둘리는 친구들을 보고 바보 같다고 여겼었는데, 역시 막상 겪으니까 전혀 다르더라. 조바심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미안해."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몰랐기에 그냥 아실리에의 손을 꽉 맞잡았다.
차마 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것만큼은 꼭 말해야 한다고 여겼기에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나도 아실리에를 사랑해."
"가족으로서?"
"...아닌 거 알잖아."
두근거림과 함께 느껴지는 건 깊은 안도감이었다.
유사 가족 관계로 끝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과 더불어 아실리에와 보낸 시간 동안 내가 느꼈던 애정에 의도치 않게 보답받아, 마치 예기치 못한 선물 공세를 마주한 기분 속에서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맞잡은 손의 온기를 느끼고 있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난 아실리에가 나를 끌어 안아 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엘디를 용사처럼 여기고 있었나 봐."
"용사?"
"응. 혼자서 알아서 배우고, 성장하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결국 혼자의 힘으로 모든 걸 성취해낸 뒤 세상을 구하는 용사. 사실 세상을 구하는 거 말고는 나름 비슷하게 하고 있는 거 같기도 했고."
돌이켜보면 그저 이 세계에서 멀쩡히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에 불과했던 거 같은데, 아실리에는 꽤나 좋은 형태로 해석했었나보다.
"용사라도 결국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는 법인데, 너무 알아서 잘 하다 보니 엘디를 과대평가했나 봐."
"그거 완전 팔불출..."
"분위기 흐리지 말자?"
"으응."
이젠 게슴츠레하게 뜨는 눈만 봐도 알아서 쫄게 되는 거 같다. 그렇게 잠깐동안 불만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보던 아실리에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라도, 이젠 엘디가 목표를 이룰 수 있게 옆에서 열심히 돕는 게 맞는 거 같아."
"...그러네. 약속했으니까."
제대로 포옹을 하며 사람의 온기를 느낀 게 얼마만일까. 사실 이래저래 신체 접촉이 적지 않은 요즘이었지만 이렇게 편안하게 안긴 건 어릴 때 이후로 기억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대체 뭘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황녀까지 꼬신거니."
그 온기에 심취해서 한껏 긴장이 풀리는 사이, 갑자기 아실리에의 질문이 치고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내가 수도로 갔다고 막 풀어지거나 그런 건 아니다? 엄연히 복수 이후의 삶도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오가토르프에 최대한 빚을 안 지우려고 일부러 집사 일도 도맡아서 했어. 진짜야. 나 편지 보내면서 거짓말이라고는 단 한 자도 안 썼어."
덕분에 평균 수면 시간이 5시간 미만일 정도로 정말 열심히 지냈기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궁색한 변명마냥 둘러대는 느낌으로 말하게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무슨 기분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아실리에가 고개를 기울이며 한 층 풀어진 분위기로 웃어 보였다.
"그건 알아. 아니까 엘디를 말리지 않은 거였고."
괜히 제발 저린 도둑마냥 쫄았다가 겨우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내 머리를 토닥여주고 다시 끌어 안는 아실리에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은 이걸로 만족하고. 이젠 고양이들과 담소를 나눠봐야겠지?"
"에?"
"걱정 마렴.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으니."
그녀가 딱 잘라 말하는 것과 동시에 방문이 열리며 에스뮈에와 라그니스가 들어왔다.
그리고 마치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어조로 아실리에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이제 제대로 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에스뮈에 황녀."
그런 아실리에와 눈을 마주친 에스뮈에는 잠시 내 꼴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라그니스와 함께 내게로 다가오려 했다.
"엘드미아여. 몸은 좀 괜찮느냐?"
"어. 포션도 포션인데, 자고 있는 사이 또 뭔가 치료를 해준 건지 나른한 거 빼면 멀쩡...해?"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며 자세를 고쳐잡으려 했는데, 아실리에의 손이 풀리질 않았다.
"누나...?"
"괜찮다면 엘디는 좀 쉬게 하고 잠깐 저희끼리 이야기 좀 할까요?"
"어...그, 그래도 여를 구해줬으니 제대로 된 감사와 더불어 직접 정황을 좀 듣고 싶은..."
분명 웃고 있음에도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모습에 바짝 긴장해서 연신 눈알을 굴리고 있자 하니, 무려 에스뮈에가 살짝 기싸움에서 밀린 듯한 모습으로 입을 여는 게 아닌가.
"그런 이야기는 둘 다 피로를 푼 상태로 나누는 게 낫겠죠. 그럼 엘디? 쉬고 있어. 우리는 따로 이야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어, 어어..."
순식간에 분위기로 압도한 아실리에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려 제국의 황녀를 상대로 당당하게 리드하며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 나와 아실리에를 사이에 두고 고개를 갈팡질팡하던 에스뮈에는 정말 많은 고민을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실리에에게 손을 잡혀 끌려 나가다시피 해 버렸고, 그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한 마디도 못 하고 있던 라그니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버린 나는... 그냥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거 뿐이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