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 자고 눈을 뜬 것은 맑은 아침 하늘과 햇빛이 창문을 통해 한껏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개고생을 한 게 겨우 하루였음에도 마치 일주일 만에 푹 잠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자, 간이침대를 펼친 뒤 같은 방에서 자고 있는 아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자고 있는건가 싶었지만 긴 귀가 까딱까닥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하니 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거 같다.
"으으음. 엘디, 일어났어?"
"응. 이야기 끝나면 깨울 줄 알았는데 내버려 뒀나보네."
"아무리 상처가 회복되었다 한들 이야기 좀 하겠다고 환자를 깨울 수는 없지. 대수로운 이야기도 아니었고."
"...정말?"
"누나는 거짓말 안 해요. 씻고 준비하자. 에스뮈에랑 라그니스는 어제 너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을 거야."
묘하게 날이 서 있던 어제와 달리 사근사근하게 대하는 듯한 뉘앙스라서 안심되는 반면, 내가 잠든 사이 대체 무슨 대화가 오고 갔을지 감도 오지 않아 불안하다.
하지만 그런 내 불안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방에 있던 종을 울린 아실리에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용인에게 내가 깨어났음을 두 사람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매우 힘겹게 잠에서 깨어나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고, 어차피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나 역시 다른 사용인이 준비해 준 물로 가볍게 세안과 양치를 시작했다.
아침 잠이 많은 아실리에였지만 내 걱정을 하느라 여러모로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한참을 밍기적거린 다음에야 겨우 일어나는 평소와 달리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며 세안을 시작했다. 머리 정돈부터 시작해 조금은 더 시간이 걸릴 것이 확실한 터라 그 사이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밖에서 아실리에가 준비를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복도는 수수하고 장식도 없었지만, 명백히 가문의 문장으로 보이는 깃발을 걸어둔 덕에 이 곳이 귀족의 저택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심지어 창문도 얼마 없는 탓에 저택이 아니라 군용 막사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판 처음보는 양식에 신기해하며 창문이 나있는 곳까지 조금 걸어가 고개를 내밀고 확인한 바깥은 묘하게 오그웬을 떠올리게 만드는 도시였다.
한쪽은 산, 한쪽은 평야가 펼쳐지는 와중에 화려한 건축양식을 지닌 수도와 달리 튼튼한 것에 중점을 둔 게 명확한 도시의 풍경은 이곳이 오그웬처럼 변경의 요새도시이거나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라고 알려주는 듯 했다.
흠, 그런 도시에 황녀님이 오셨다라. 난리가 났겠는데.
"뭘 그리 보고 있니?"
그렇게 연병장과 도시 거리의 구분이 거의 없다시피한 독특한 도시 전경을 감상하고 있는 동안 준비를 마치고 나온 아실리에가 팔짱을 끼며 물어왔다.
"오그웬을 연상케 하는 지방 도시의 영주님이 어제 겪었을 대혼란을 가늠해 보고 있는 중이었지."
"후후. 폭우 속에서 사용인들과 함께 뛰어다니는 영주라는 게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지."
꽤나 엄청난 폭우였는데 말이야. 얼굴도 모르는 영주님을 위해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아실리에가 이끄는대로 움직이며 도착한 곳은 저택의 식당이었다.
역시 귀족의 저택답지 않게 수수하다고 해야할까. 그게 또 싼티가 나는게 아니라 절약을 한다는 느낌이라서 꽤나 마음에 드는 인테리어를 감상하며 적당히 자리에 앉자, 내 맞은 편에 앉은 아실리에가 아직 묶지 않았던 머리를 평소처럼 갈래로 묶어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어제 두 사람과 나눈 이야기는 단순해.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서 엘디를 방해하는 일은 없어야한다는 대전제를 제시하고 모두가 동의하는 게 목적이었거든. 거기엔 물론 나도 포함되는거고."
그런데 그렇게 나온 말은 시작부터 뭔가 내 예상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였다.
"사실 그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가볍게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는 시간을 가지긴 했는데... 뭐, 별다를 게 있겠니. 솔직히 가장 우려했던 게 에스뮈에였는데 내 걱정과는 달리 영리하더라. 역시 차기 황제로 거론되는 인물답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너를 향한 감정이 잠깐의 여흥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았어."
이상하다? 분명 내가 어제 아실리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사랑한다고 대답했던 거 같은데?
왜 지금의 대화 내용은 다른 여자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 것처럼 들리지?
"어, 솔직히 지금 그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뭔가 내버려 두면 내가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줄기차게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서 일단 그녀의 말을 끊으며 운을 떼기로 했다.
"응? 왜?"
"마치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대화를 나눈 것 같잖아."
"맞는데?"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아실리에의 반응 덕에 오히려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못 잡게 되어 버렸다.
그런 나에게 아실리에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 발언을 던졌다.
"못해도 아내 둘 셋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잖아?"
"누나,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아내 둘 셋? 그게 한 나라의 황녀와 변경백인 건 둘째치고 뭔가 감각이 많이 다르잖나?
"너무 느닷없이 일부다처제를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그 아이들도 다 그 정도는 감안하고 있어. 누가 첫 번째가 될 것이냐가 관건이었지."
"예?"
나만...다른...가? 어? 아닌데. 우리 부모님도 일부일처제였고 마을 사람들도 그랬는데? 귀족이라서? 첩을 두기도 하니까 받아들이는 건가? 하지만 건 에스뮈에와 라그니스의 이야기지 아실리에가 쉽게 받아들일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엘프는 일부다처제야?"
"일부일처제지."
"아니, 근데 왜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여? 나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엘디를 사랑하니까?"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와서 살짝 부끄러워졌지만, 할 말은 마저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쉽게 납득되지 않은 부분이었으니까.
"그건...정말 기분 좋은 이야기인데, 오히려 그러면 받아들이기 힘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누나를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그게 다른 남자와 함께 이 감정을 공유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거든?"
"그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넷이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는 것이니라."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에스뮈에와 라그니스가 식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나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에스뮈에와 아실리에를 보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그니스는 묘하게 거리감이 없어 보였다.
"저희도 없는데 벌써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떻게 해요 아실리에."
"음? 그냥 어제 나눴던 이야기 정도만 말하고 있었는걸."
나누게 될 대화의 내용 탓인지 몰라도 사용인 하나 대동하지 않은 채 들어온 그녀들은 자연스럽게 아실리에를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어제 그 고생을 한 것 치고 건강한 거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구나. 여도, 라그니스도 고생한 보람이 있느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니까. 뭔가 도움이 되는 마도구라도 쥐어 줘야지 안 되겠어."
"상처를 입은 주된 원인은 마법이었던 거 같으니 방호의 마법이 걸린 마도구가 좋을 것 같긴 하네."
그러고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셋이서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듯 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미인 셋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참 보기 좋은데... 내 상식 안에서는 저럴 수 없는 상황임에도 저러고 있으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혼란 속에서 이도 저도 못 하고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사이 라그니스가 그런 나를 보고 천천히 설명을 이어 주었다.
"음, 엘드미아? 이건 그러니까 임시 동맹 같은 거야."
"동맹...?"
"엘드미아가 목적을 완수할 때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한 임시 동맹."
순간 누가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에스뮈에는 자연스럽게 라그니스의 말을 받아 설명했다.
"라그니스가 말한 그대로이니라. 그대의 목적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 아니더냐. 그대의 삶에 있어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해할 수 있기에 막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의 위협을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런 와중에 셋이서 내 마음을 독차지 하겠다고 싸우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비록 어제 아실리에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한들, 에스뮈에는 자신의 고백과 라그니스의 고백을 거절하지 못한 것 역시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동등한 조건으로 만든 상태였다.
그러니 그 마음을 주저하게 만드는 원인이자 당장의 가장 큰 위협, 복수라는 목표를 달성한 뒤에 좀 더 여유로운 상황에서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그게 내가 어제 잠든 사이 세 여성들이 대화를 나누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 그대는 그저 지금까지 하던 대로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되느니라. 이 사랑싸움은 그 뒤에 시작이니까."
우리는 그렇게 협의를 보았느니라. 라고 말하며 통보를 끝낸 에스뮈에는 식탁 위의 종을 울려 준비된 음식들을 내오도록 시켰다.
"엘디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어제 질투를 느꼈을 리 있겠니? 그저...두 사람의 이야기가 충분히 타당하고 엘디를 위하는 마음도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러는 동안 아까 내가 했던 질문에 뒤늦은 대답을 해주며 아실리에는 여느 때처럼 웃어 보였고, 그건 에스뮈에와 라그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만큼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녀들만의 공감대인 것 같았다.
그녀들의 배려와 사랑이 고마우면서도 아침에 아실리에가 말했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는 결코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결국 뭐라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사용인들이 내오는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