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모르는 제국의 도시에서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에스뮈에의 친위대들이 기어이 그 폭우를 뚫고 마왕군의 거점을 찾아 하루 만에 초토화 시켜 버린 덕이었다.
당장 추가적인 정보를 얻진 못했으나, 생포한 포로들이 적지는 않아 기대해볼 만하다는 이야기를 에스뮈에에게 들은 것은 수도로 귀환하기 위해 포탈과 게이트를 넘나드는 도중이었다.
라그니스가 다시 준비해 준 레비엥 가문의 제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아실리에에게 한껏 뽐내는 사이 도시로 복귀한 에스뮈에의 친위대에게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이동하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주변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에스뮈에는 그런 시선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평소와 같이 말했다.
"마족들의 기술이 상상을 초월할 수준으로 발전한 게 아닌 이상 바다를 통해 숨어들어왔다고 보고 있느니라."
이 세계의 바다는 육지보다 위험하다.
나도 내륙 사람인지라 직접 바다를 본 적은 없지만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접한 정보만 놓고봐도 바다에는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위험하다.
당장 지금의 이야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할 경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정신나간 소리로 여길만큼 위험하다. 마족이 아무리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지녔다한들 물에 빠져 죽는 건 매한가지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겠지만, 이번만큼은 짐작 가는 곳이 있었기에 에스뮈에의 말에 진지하게 어울릴 수 있었다.
"만델리 항이 뚫린 틈에 들어왔을 수 있겠군요."
보는 눈이 많은 터라 존칭으로 대답하고나니 세 여자들 모두가 나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음? 의외로 정보에 밝은 편이로구나."
"그러게. 알 거라고 생각도 안했는데."
"최근에 우연하게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친절한 가룬과 나눈 대화가 여기서 도움이 될 거라고는 나도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성범죄자 당텔 새끼가 또 보이면 이유 불문하고 한 번 더 패야겠다.
"어찌되었든, 평소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여겼겠으나 그대의 말처럼 이번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 귀환은 게이트로 할 예정이었던 모양이니라."
내가 들어가자마자 아카데미의 게이트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던 것과 같은 수법으로 마족령으로 귀환한 뒤에 남아있는 게이트를 파괴할 요량이었을 것이라고, 에스뮈에와 친위대는 짐작했다. 친위대의 급습으로 인해 제작된 게이트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하니 시간이 좀 지나면 밝혀질 내용일 것이다.
"이번에 그대의 공은 누구도 뭐라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니라. 여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작위를 주고 싶을 정도지만, 아쉽게도 그대가 이티스엘의 백성이기에 당장은 힘든 상황이니라."
형식과 절차라고 해야할지,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에스뮈에의 급격한 움직임에 제동을 걸지 않는 조건 중 하나가 나의 신병 인도였다고 한다.
애당초 이티스엘의 백성인데 그게 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조건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두고 라그니스가 설명해줬다.
"아카데미에서 용사를 이기고 루드라의 젊은 사자를 죽인 것도 모자라 황녀 납치 시도까지 막은 인물이 너야. 제국의 입장에서도 외교적으로는 뻔뻔하다고 욕 좀 먹을 지언정 일방적으로 작위를 내리고 제국인으로 받아들인다는 선택을 못할 것도 없는 상황이지."
그러면서 에스뮈에를 흘겨보는 라그니스의 시선에는 공적인 자리인지라 입에 담지 못한 다른 이유들이 담겨 있는 듯 했다.
그건 나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에스뮈에의 성격에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당장 시도했을 게 분명하다.
"음. 아쉽기 그지없느니라."
아니나 다를까, 옅게 웃으며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는 에스뮈에였다.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공적인 위치가 있는 그녀들과 달리 나와 개인적인 친분만 있는 덕에 마음 편히 팔짱을 끼고 있던 아실리에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겨우 2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정말 많이 성장했어. 용사를 이겼다니. 역시 엘디야."
"별로 열심히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하더라. 이번 사태도 있었으니 몇 개월만 지나도 내가 못 이길지도?"
"그런건 원래 한 번 이기고 안 싸워주면 영원히 이기는 거야."
"역시 아실리에야. 명쾌한 해답이네."
역시 내 인생의 멘토이자 참된 지식인답다. 어쩜 이렇게 바람직한 발상을 할까.
◈
그렇게 잠깐의 평화를 누리며 담소를 나눈 우리는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빠르게 짐을 싸야만 했다.
나의 신변과 건강이 확인되자마자 이티스엘에서 언질이 왔다는 이야기를 레니사를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때였으면 제국의 눈치를 봤겠지만, 이미 걸어두었던 조건을 이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보니 이티스엘에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듯 했다.
결국은 급하게 돌아가야하는 우리만 고생하는 거지. 내일까지 오라는 식으로 일방통보를 받은 탓에 순간 화딱지가 날 뻔 했지만 그래봤자 라그니스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 그냥 서두르기로 했다.
그런 우리와 달리 라드넬반데스는 지들리를 핑계로 제국에 개인적인 신분을 사용해 좀 더 남아있기로 한 모양이다. 사실 처음 올 때나 같이 왔지, 그 뒤로는 정말 얼굴 한 번 마주치기도 힘들었다보니 아직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여어 동생. 정신없이 돌아가네?"
그렇게 정신없이 준비를 하는 사이 지크가 손을 흔들며 제 집마냥 태연하게 방문한 건 해가 거의 다 질 무렵이었다.
"누가 아니랍니까. 용사님이 태만하셔서 애먼 제가 뒷정리나 하다가 가네요."
"안 그래도 미안한데 그렇게 정곡을 찌르면 어쩌냐."
"뭘 미안해합니까? 용사님이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닌데."
농담 좀 던졌는데 그걸 또 진지하게 받아들인건지 적잖게 켕겨하는 표정을 짓는 지크를 보고 있자하니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냥 농담한 거니까 괜한 생각 마시고 적당히 인사나 하고 가시죠. 어차피 금방 다시 볼 거 같더만."
에스뮈에는 이티스엘에서의 이야기가 정리됨과 동시에 반드시 이번 일에 대해 치하하겠다는 의지를 다잡고 있었으니 싫어도 다시 보게 될 거다.
그런데 지크는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는지 꼴같잖게 우물쭈물 거리는 게 아닌가.
"이번엔 좀 위험했다며. 동생이 아니면 정말 에스뮈에가 납치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들었어. 동생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아! 그거 이야기 해준다면서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진짜 그 미친놈을 용사님도 봤어야 하는데. 아니, 공격이 안 통하더라니까?"
다른 건 몰라도 붉은 머리 마족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있는 한 모두에게 전달할 요량이었다. 그딴 저주에 걸린 놈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거라 믿고 싶진 않았지만, 비슷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솔직히 이번엔 오히려 나였기에 놈을 죽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멋모르고 맞닥드렸다가 용사가 죽어 버리면 답도 없다.
졸지에 내가 놈에 대한 신상정보를 줄줄 늘어놓자 당황하면서도 이야기를 경청한 지크였다.
"아무튼 혹시라도 그런 낌새가 느껴지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합니다. 자존심이고 뭐고 없어요 그건."
"아니, 근데 동생은 어떻게 죽인거야?"
"영업 비밀이라 그건 말씀 못드립니다. 그렇게 보지 마시죠? 용사님이 따라할 수 있을거라 여겼으면 진즉에 알려드렸습니다."
제가 마족 놈들처럼 마력을 쓸 줄 압니다 라고 말하면 좋은 일보다 좆같은 일이 더 많이 엮일 게 뻔하다. 아무리 용사에 같은 전생자라지만 지크에게도 아직은 말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다행히 지크는 굳이 더 캐묻지 않고 납득하며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넘겼다.
"그보다...에스뮈에한테 이야기 들었다며."
"전 남자가 감질나게 떠보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뭘요?"
"에이씨. 내가 제국에 비협조적이던 거."
사내 놈이 자꾸 뭔 눈치를 이렇게 보며 귀찮게 하나 싶었더니 지난번 식사 때 나온 이야기를 말하는 거였다.
"그거 때문에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 겁니까?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이제부터는 훈련이나 열심히 하십시오. 두 달 만에 그 정도면 금방 날아다니겠네."
"...정말 그게 다냐? 아무렇지도 않아?"
"에스뮈에가 말 안해줬습니까? 저랑 라그니스는 딱히 용사라는 존재한테 뭘 기대한 적이 없다니까요. 기대를 안 했는데 용사님이 놀던 뭘 하던 뭔 상관이겠습니까."
내가 처음 제국에 방문하기 전 혼자 추측하고 혼자 빡이쳤던 이유는 순전히 이 범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사리사욕에 이용해 먹는 존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깊은 빡침에 불과했다.
그리고 용사가 이 세계 사람이라는 가정하에서 화가 난 거였지. 지금의 지크와 제국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용사님이 용사로 신탁을 받은 게...제가 12살 때였나? 언제였나 자꾸 헷갈리네. 아무튼 그 무렵인데반해 저희 마을이 불탄건 제가 8살 때입니다. 따지고 들려면 오히려 4년이나 지나고 나서 나이도 어린 용사님을 용사라고 뽑아 든 신께 따져야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것이다. 그들은 용사가 몇 년의 시간을 허비하다시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근데 그건 용사가 열심히 노력해서 강했다 한들 다를 게 없다. 용사라고 대륙을 혼자서 지키는 게 아니니까 용사가 없는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죽게 되어 있다.
정말 동화 속 영웅이나 판타지의 용사가 실존한다 한들 여기도 결국은 현실인 것이다.
현실에 완벽한 건 없다. 심지어 신마저도 완벽하지 않아서 지크 같은 놈을 용사라고 뽑았잖아.
"물론 다른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 안 할 테지만 저희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그냥 평소대로 하세요. 본격적으로 전장에 나가면 그거보다 더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원망과 맞닥드려야 할 텐데 벌써부터 그게 뭡니까?"
"...고맙다."
"옘병 진짜."
안 어울리는 짓거리가 너무 징그러워서 어깨를 주먹으로 쳐 버렸지만, 지크는 맞은 곳을 감싸면서도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