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크 놈의 징그러운 짓거리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제국 방문 일정은 막을 내렸다.
이튿날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움직이는 우리를 게이트에서 맞이해준 건 처음과 마찬가지로 벤데 후작 혼자였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참 큰 족적을 남기고 가는군."
에스뮈에는 후작을 통해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보게 될 거라는 서신 한 장만 보냈을 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사실 이번에 일어난 사건의 경중만 놓고봐도 한동안은 정신없이 바쁠 게 당연한만큼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아쉬움도 들지 않았다.
"결국 나중에 그대의 공을 치하할 날이 오겠지만, 황실의 녹을 먹는 입장에서 황녀 저하를 위해 한 몸 바치고 공을 세운 그대에게 개인적인 감사를 표하고 싶네."
거두절미하고 이야기를 진행한 벤데 후작이 나에게 직접 건네준 것은 굉장히 심플하게 생긴...
건틀릿? 권갑? 뭐라고 해야 하냐 저걸?
"이번에 전해 들은 위용에 의하면 대부분의 상처가 마법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군. 마침 괜찮은 장비가 가문에 남아 있어서 이 기회에 선물하고자 하네."
꼭 아르마딜로갑옷도마뱀같으면서도 좀 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이 물건은, 단순히 건틀릿이라고 하기엔 너무 전투적이고 권갑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얇은 느낌이었다. 색만 놓고 보면 은근히 내 드워프제 롱소드랑 잘 어울려서 딱히 상관은 없지만 일반적인 디자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넘겨 준 이상 거절할 생각도 없어서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건틀릿을 그 자리에서 착용하고 있자 하니 벤데 후작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제국은 마족에 대항하기 위해 그간 여러 방면에서 노력했다네. 그 중 하나가 드워프들과 협업하여 마족의 마법에 좀 더 대항할 수 있는 방어구를 생산하는 거였고, 이 건틀릿은 그 시도들 중에서도 나름 성공작에 속하는 물건이었네."
"나름...인겁니까?"
황녀를 구해준 사람에게 후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주저없이 줄 정도의 물건이니 상등품인 게 분명할텐데도 뒤에 붙어오는 뉘앙스는 심히 미묘하다.
내 질문에 벤데 후작은 쓴웃음과 함께 설명을 이어나갔다.
"기본적인 내구도와 마법 내성은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은만큼 손색이 없었네만 제국의 마도학이 부족했던 탓에 걸린 주문의 실효성이 좀 끔찍한 수준이었지. 인챈트된 마법을 발동하는데 너무 많은 마나가 들어가거든."
"무슨 마법을 부여한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마법 차단의 방벽이라네. 발동만 된다면 별의 가능성이 있는 마법사들 정도는 뚫지 못할 정도로 견고한 마법이지."
문제는 연비와 효율이었다.
발동되는데 간단한 보호 마법 네 개를 시전할 정도의 마나를 요구하다 보니 도무지 써먹질 못 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거보다 효율이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이렇게 후작 가문 창고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충분히 좋은 장비인지라 간단한 투사체 마법 정도는 무리 없이 막아 낼 걸세."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변변치 못한 선물이라네. 아무튼 다음에 방문할 때에는 좀 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
나와의 대화를 정리하고 라그니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벤데 후작에게서 살짝 멀어지자,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보고 있던 아실리에가 자신의 귀를 주무르며 말했다.
"저 사람, 상당히 대단한 마법사더라."
"만나 봤었어?"
"에스뮈에 황녀가 오그웬으로 직접 방문했을 때 같이 있었어. 간이 게이트라는 걸 선보인 것도 저 사람이고."
"간이 게이트? 그게 말이 돼?"
무전기만하던 휴대전화기가 하루아침에 스마트 폰으로 바뀐 것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질 뻔했지만 아실리에는 덤덤하게 자신이 본 것을 손짓까지 동원하며 표현해주었다.
"나도 놀랐어. 대충 이만한? 네모난 금속제 상자 같은 걸 꺼냈는데 그게 펼쳐지면 게이트가 만들어지더라고."
"내 주먹보다 조금 큰 게 게이트가 된다고...?"
아무래도 아실리에는 제국 최첨단 기술의 편린을 엿본 거 같네. 방금 내가 받은 건틀릿도 그렇고, 벤데 후작은 제국의 마도기술을 책임지는 매우 인텔리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잘생긴 게 능력까지 좋으니 좀 많이 괘씸하지만 선물 받고 착해진 내가 참는다.
"그러고 보니 누나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일단은 라그니스한테 신세를 좀 지기로 했어. 집을 다 정리하고 나온 건 아니니까. 일단은 오그웬에 한 번 돌아가야겠지."
"아예 수도로 오려고?"
"정확히는 엘디가 있는 곳으로 오는 거지. 네가 가면, 나도 갈 거야."
이젠 결심이 섰으니까 라고 말하며 결연한 눈빛과 함께 웃어 보인 아실리에는 팔짱을 끼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엘디도 간만에 오그웬에 갔다가 오는 게 어떨까? 그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잖아?"
"오그웬이라..."
원래는 이번 제국 방문을 휴가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휘몰아치는 사건 속에서 오히려 빡세게 지냈던 탓에 정신적으로 지친 것도 사실이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무슨 일을 이렇게나 많이 겪은 건지 납득이 안 갈 지경인지라 내심 아실리에의 제안에 끌리기 시작할 무렵, 벤데 후작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은 라그니스가 레니사에게 명령하며 사용인들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실리에가 나를 이끌며 말했다.
"일단은 돌아가서 상황보고 생각해 봐. 이렇게나 서둘러서 오라고 하고 있으니 또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잖아?"
"에이, 누나도 참. 죄 지은 것도 아니고 공을 세운 거랑 다를 게 없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
오히려 제국과의 화친을 위한 좋은 계기를 만들었다고 칭찬받지 않을까?
그런 느긋한 마음으로 게이트를 넘고 넘어 정겹기 그지없는 이티스엘의 수도로 돌아온 우리를 맞이해준 것은 놀랍게도 창과 칼이었다.
냉병기인 그 창칼이 맞다. 게이트에서 나서자마자 우리를 향해 기울어지는 족히 30개는 넘어 보이는 창 끝에 어이없어할 틈도 없이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입을 열었다.
"라그니스 리엔 다 레비엥 변경백. 현재 그대에게는 반역 혐의가 적용되어 있는 상태다. 현 시간부로 임시 감금에 들어갈 테니 얌전히 협조하도록."
정말, 정말로 육성으로 욕지기가 나올 뻔한 걸 꾸역꾸역 참으며 라그니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이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인지 적잖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긴, 이게 당황스럽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더 당황했을 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라그니스가 마냥 당황만 하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감히 왕실 성명문도 없이 날 체포하겠다고?"
"그대를 향한 혐의는 이티스엘 귀족원에서 제출되어 통과된 사안이다. 이티스엘 귀족원은 합당한 사유와 근거를 기반으로 한 혐의에 한해 후작 미만의 귀족들의 신병을 임시로 확보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지금 내게 귀족원이 반역 혐의라 의심할 정도로 확실한 사유와 근거가 있다는 거냐?"
"적어도 귀족원은 그렇다고 판단한 상태다. 상세한 사항은 내일 오전 중에 열릴 귀족재판에서 다뤄질 예정이니 지금은 얌전히 응하도록."
귀족 사회의 법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다시금 라그니스의 안색을 살펴 이게 합당한 주장인지 멍청한 궤변인지를 판가름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정말 어처구니없고 어이없게도, 라그니스는 이를 즈려물면서도 딱히 반문을 내뱉지는 못했다.
"레비엥 변경백의 사용인들은 저택으로 귀가해도 좋다.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 감금이니 면회도 가능하며, 그대들의 주인에게 편의성을 제공하기 위한 모든 행위들도 용인된다. 허나 귀족원의 결정에 반발하고 그녀의 감금을 방해할 경우엔 합당한 책임과 형벌이 따를 것이니 그 점을 잊지 말도록."
응? 나는?
뭔가 싶어서 대장 놈을 계속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내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며 라그니스만 포박했다. 그 태도에 라그니스도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기울였지만 혹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봐 입을 다무는 눈치였다.
라그니스에게 반역 혐의가 있으면 제국에서 가서 가장 활약한 나는 유력한 협력자인 거 아닌가? 근데 아예 손도 안댄다고?
내가 이래서 정치하는 것들이 싫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건지 무식한 나는 조금도 알 수 가 없다니까.
"엘드미아. 우선 셰릴에게 가서 이 상황에 대해 알아봐줘."
그런 나를 향해 확실한 요구사항을 남긴 라그니스는 마치 내가 미쳐 날뛰는 상황을 막으려는 게 목적인 것 처럼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레니사. 나와 동행해서 임시 감금 구역을 확인한 뒤 오가토르프 가문에 언질을 넣어두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이를 갈며 검을 뽑을 것처럼 사백안을 뜨고 있는 레니사에게도 명령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살기로 똘똘 뭉친 상태였고, 라그니스의 명령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대로 대장의 목을 치기 위해 검을 휘둘렀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라그니스의 제동이 통했기에 일단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떨지 알 수 없는 상태라고 여긴 나는, 멀어져가는 그들을 뒤로한 채 아실리에와 같이 최대한 서둘러 오가토르프 가문으로 돌아갔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이 개 같은 상황이 어떻게 튀어나온 것인지 알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