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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14화 (114/412)

이티스엘의 수도에는 두 부류의 귀족이 있다. 귀족원에 속한 귀족과 그렇지 않은 부류의 귀족.

무조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보통 영지가 있으면서 수도에 저택을 마련해 정치 활동을 하는 돈과 지위가 되는 인물들이 귀족원에 소속되고 영지 없이 가문과 저택 정도만 있는 이들이 그 외의 귀족으로 부류되는 편이라고 셰릴은 말했다.

그리고 귀족파와 국왕파는 여기서부터 갈라진다.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 자신들의 영지와 이익을 최대한 우선시하고 싶은 이들이 고이고 고여 귀족원을 장악하게 되고, 영지가 없거나 있으면서도 충성을 우선시하는 이들은 귀족원에서 빠져나와 국왕파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흐름에 휘둘려 어영부영 한쪽을 선택한 이들이 있을 수는 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간단하게 해 줄 수 있는 설명은 그 정도라고 한다.

나와 달리 역시 귀족의 자제답게 이런 부분에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는 셰릴에게 물어보며 우리는 저택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저택에 남아 있어 봤자 할 것도 없는 상황인지라 아실리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나왔지만, 셰릴은 크게 개의치 않으며 추측만 가득했던 내 머릿속에 현 상황을 하나하나 풀어서 넣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나 아실리에는 이런 귀족 법도에 관한 건 문외한에 가까웠기에 얌전히 이야기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물론 아무리 귀족원의 힘이 크다 한들 어지간한 죄목으로는 같은 귀족을 감옥에 집어넣을 수는 없어. 왕실의 힘이 긴 전쟁으로 인해 위축되었다고는 해도 명분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나마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건 국가 규모의 위해를 끼치는 존재 혹은 왕실에 반기를 드는 자를 대할 때인 거지. 그래서 귀족원이 택한 게 반역인 거 같은데... 왕국 역사를 다 훑어봐도 이런 앞뒤 안 가리는 수단을 택하고 이행한 건 이번 귀족원이 처음일 걸."

선조치 후보고가 허락되는 몇 안 되는 선택지. 귀족원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 나라를 위해 긴박하게 움직였는데 그걸 뭐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발상에서 기인한 행동.

반역의 조짐이 의심되는 놈을 잡았으니 국왕파 귀족파 다 같이 모여서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재판을 열어 진위 여부를 확인하자, 라는 것이다.

평소와 같이 뒷문을 통해 저택을 벗어나면서 셰릴은 세상 모든 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처럼 미간을 찡그린 채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내가 보기에도 이번 제국 방문을 통해 라그니스와 엮이게 된 이득은 엄청나. 영지와 세력이 무너져 내린 허울뿐인 변경백에서 진짜로 거듭난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긴 전쟁을 이어오면서 지난 몇 년간 실리를 따지며 열심히 수싸움을 해 오던 이들에게 보이는 이득은 훨씬 더 다양하고 많겠지. 그게 국왕파에게 넘어갈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고. 그걸 감안하면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라그니스의 입지가 확고해지기 전에 강제로 싹을 잘라 내야겠다고 여긴 뒤 행동했을 여지는 있어."

좋아. 귀족원이 어떤 원리로 움직였는지에 대한 부분은 얼추 내 추측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부적인 이해득실을 따진 계산 결과는 그들만이 알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셰릴의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막 붙잡고 반역자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야?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나 혼자만의 추측으로는 알 수 없었던 부분.

왕가와 국왕파가 머저리가 아닌 이상 이렇게 일이 귀족원의 입맛대로 돌아갈 리 없어야 정상인데, 그렇게 돌아가는 것 같은 상황에 대한 해답이 부족하다.

그래서 던져 본 내 질문에 잠깐 걸음을 멈춰서 단무지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을 정리한 셰릴이 이야기를 꺼냈다.

"설명이 좀 부족했던 거 같군. 당연히 문제가 있다."

"어? 있다고?"

"없었으면 수도의 귀족들은 절반 이상이 서로가 서로를 반역 혐의로 몰아 붙이며 단두대가 마를 날이 없었겠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걸 통해 오히려 한껏 치솟았던 짜증을 정리한 것처럼 표정을 조금 핀 셰릴이 천천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엘드미아. 네가 가지고 싶은 멋진 검이 하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 검은 다른 사람의 소유고, 넌 그 검을 반드시 가지고 싶어. 당연히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하겠지?"

"갑자기? 뭐, 그래. 그렇겠지."

설명을 위한 비유이겠거니 하며 일단 대답을 하자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셰릴은 말했다.

"일반적으로는 금전적 거래 혹은 여러 조건을 이용한 협상을 떠올릴 테지만, 상대방이 허술해진 틈을 타 훔치는 것도 방법이고 상대방을 아예 죽여 버리는 것도 방법이지. 동의하나?"

"그으으래. 선택지라고 했으니까. 그걸 택할 이유는 딱히 없지만, 선택지이긴 하지."

"그런 거다."

"...뭐가?"

"지금 귀족원이 시도한 게 그런 거라고. 일반적인 선택지를 싹 다 걷어차버리고 갑자기 타인의 물건을 죽여서 빼앗는다는 발상을 한 거란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이티스엘의 귀족법이 한없이 허술하고 구멍 투성이인 것 아닌 모양이다. 깔끔하게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비유 덕분에 조금은 머릿속에서 상황이 정리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방법은 방법인데 불법이다?"

"결과에 따라서 불법과 합법이 나뉘는 극단적인 상황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지. 완전하게 라그니스의 반역 혐의를 입증하는 게 아닌 이상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귀족에게 행해질 형벌은 최소가 작위 박탈이고 경우에 따라서 전시 상황 중 내부 혼란을 야기했다는 이유로 내란 혐의를 물어 처형당한다."

더럽게 편중된 권력이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비합리적인 법 집행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 막고라였다. 그것도 장대한 무리수를 둬가며 일방적으로 걸어온 수준의.

"아니 잠깐. 그럼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지금 이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귀족원이 지는 싸움이라는 거잖아? 왜 그렇게 다들 심각한건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버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거지."

아까보다 한결 냉정해진 얼굴로 나를 돌아본 셰릴은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는 시간을 가지고 나서야 대답해주었다.

"귀족원은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지 않으니까. 단 한 번도 지는 싸움을 하지 않았던 적이 갑자기 무조건 질 수 밖에 없는 뻔한 수를 들고 눈 앞에 나타나면 넌 어떻게 여길 거 같나?"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셰릴은 다시 걸음을 옮겼고, 나도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묵묵히 그녀를 따라갔다.

당연히 내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 두뇌를 풀 가동하며 고민할 게 뻔하다.

"셰릴? 괜찮으면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네. 아실리에.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우리와 걸음을 함께 하면서도 묵묵히 고민을 거듭하던 아실리에가 자신의 귀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재판에서 무죄가 입증되면 귀족원의 패배. 유죄가 입증되면 당연히 라그니스의 패배인 상황인데, 심증만 있고 물증이 부족한 상황이 만들어지면 어떻게 되는거죠? 물론 라그니스가 그랬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정치 싸움에는 뒷공작도 흔하잖아요? 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만들어내거나 위증을 하거나 말이죠."

"정도에 차이는 있겠으나, 솔직히 그런 어중간한 증거를 가지고 반역 혐의를 제시한 경우가 없어서 감을 잡기 힘듭니다. 보통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니까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느려진 셰릴의 걸음 걸이가 고민의 깊이를 알려주는 듯하다.

"그래도 굳이 따져 본다면... 양쪽 다 심각하다고 할 만한 처벌은 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심증을 지우기 힘든 상황이라는 점에서 라그니스의 행동에는 큰 제약이 생기게 되겠지요. 그리고 차후 좀 더 면밀히 정황을 살펴본 뒤에 다시 재판에 들어갈 거라 여겨지는군요. 그 정도까지 가면 설령 라그니스의 결백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오해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고 판단되어 고발한 귀족도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지 않을까 싶습니다. 벌금과 위자료 정도?"

얘는 대체 학교에서 뭘 배우길래 벌써 저런 내용들이 머릿속에 들어가있는 건지 새삼 궁금해진다. 왕국 아카데미에서 저런 것도 가르치는 걸까?

뭔가 더 궁금한 점이 있냐는 듯한 셰릴의 시선과 뭘 물어볼지 궁금한 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귀를 주무르던 손을 입가로 가져간 아실리에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만약 라그니스를 통해 제국이 왕국과 친교를 쌓으려 한 상황에 그런 결론이 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야 당연...히..."

"보통은 반역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확실하게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거리를 두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어이 걸음을 멈추고 대로 한복판에서 굳어버린 셰릴은 다시금 심각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거리를 두면... 이번 일로 인해 귀족원이 느꼈던 제국의 개입으로 인한 위협은... 일단 뒤로 미뤄지게 되겠죠. 그것만으로도 귀족원에는 정치적인 유예가 생기는 것이구요. 충분히 가능성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반역이라는 심각한 죄목 아래에서도 적용될 거라 생각치는 못했습니다만, 원래 입어야할 타격보다 훨씬 적은 타격만으로도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하지만 누가 그런 방패 역할을 자진해서..?"

작은 중얼거림 끝에 열심히 무언가 고민하는 셰릴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실리에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말했다.

"응. 역시 엘디랑 비슷해."

"이번엔 또 왜?"

"엘디랑 동갑이라며? 근데 한 20대 중반의 귀족과 대화하는 거 같아."

애가... 좀 과도하게 똑똑하거나 종잡을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지. 그런 부분에서 비슷하다고 느꼈다면 이번엔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귀족원에서 노리는 게 그런거라면 의외로 몇 가지 문제 정도는 엘디가 나서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거 아니야?"

"나도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아까 그렇게 기도를 했던건데... 두고 봐야 알겠지."

델트와 관련된 부분과 제국의 협조만큼은 내 선에서 정리가 되겠지만 겨우 그게 전부일리는 없으니까. 일단 지나치게 낙관적인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 먹으며 우리는 다시 길드로 향했다.

이야기와 고민이 반복되느라 예상보다 늦게 도착한 길드였지만,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나와야만 했다.

마족과 연관이 있다고 할 만한 정보라는 게 만델리 항의 습격을 제외하면 나와 셰릴이 같이 참가했던 파바에리의 주작 사건과 나 혼자 참가했던 폐던전 비밀 의뢰 뿐이었던 것이다.

그마저도 내가 비밀 의뢰를 받아서 파바에리 사건도 연관이 있다고 알 수 있었던 거지, 데스크의 접수원이 알려 준 정보는 만델리 항에 대한 것이 전부였다.

결국 셰릴은 크게 낙담했고, 그런 셰릴을 달래는 건 내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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