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15화 (115/412)

"나는 다른 쪽으로 수소문해 보겠어."

귀족 사회라는 건 생각보다 일반 서민들과 큰 간격을 두고 있었고, 전문적인 정보상들이 아닌 이상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이 거리를 조사해봤자 하루 만에 얻을 수 있는 정보따위 전무했기에 다른 선택지라고 할 만한 게 없다.

그러니 방금 셰릴이 말한 것처럼 다른 방향으로 수소문을 한다는 건 결국 같은 귀족들의 친분을 이용한다는 소리인데... 어차피 열심히 에카프 경이 움직이는 마당에 그게 과연 의미 있는 행동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셰릴의 두 눈을 바라보고 나니 거기서 의미를 찾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이해했다.

"그래. 난 일단 저택에 가서 다시 라그니스네 옷으로 갈아입고 레니사 경이 알려 준 구금 장소로 가 볼게. 이 상태로 가 봤자 좋은 대접을 받긴 힘들 거 같고."

"그럼 나도 조금 돌아다녀볼게. 수도엔 오랜만이지만, 어쩌면 아는 사람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난번에 봤던 긴의 경우처럼 아실리에도 지인이 수도 어딘가에 살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각자 갈 길 가는 모습을 잠깐 바라본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어 본 다음 저택으로 향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하는 걸 새삼 실감한다. 아직도 익혀야 할 건 많고 넘어야 할 산은 더 많은 거 같은데, 물리적인 장벽 외에도 이런 정치적인 문제로 발목이 잡히니 여러모로 갑갑하기 그지없다.

당위성이 확보돼야 물어뜯기라도 하지 씨발. 앞으로는 야금야금 겉에서부터 갉아먹고 들어오려는 잡것들에 대항할 방법도 강구하는 편이 좋을 거 같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채 저택에서 다시 옷을 갈아입고 튀어나와 내가 향한 곳은 외곽에 위치한, 나름 깔끔한 건물이었다.

"살풍경하네."

하지만 2층으로 단출하게 지어진 건물은 그저 깔끔하기만 할 뿐. 그냥 직사각형 모양의 벽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2층으로 지어진 이유도 단순히 건물을 지킬 경비와 죄인을 구분짓기 위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주변은 일반 시민들도 아무렇지 않게 오고 가는 거리인지라 얼굴이 팔리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그래도 일반인이 대상이었다면 지하 감옥이 아닌 만큼 상당히 좋은 대우를 해주고 있다고 여길만 했지만... 안에 있는 게 귀족이다 보니 참 너무한 수준이다.

자연스럽게 불편해진 마음을 눌러 담으며 유일한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들에게 다가가니, 매우 절도 있는 자세로 창을 교차하여 문을 막으며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곳은 죄인을 포박해 둔 장소입니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근데 그 첫 질문부터 간만에 나쁜 엘드미아와 더 나쁜 엘드미아가 눈알을 부라리게 만드네?

뭐? 죄인?

"죄인?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임시 구금된 귀족을 두고 지금 죄인이라고 했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욕지기가 튀어나오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아가며 최대한 가문 수행원에 걸맞는 태도로 되물었다. 안 그래도 핑계 하나만 내놔라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얼토당토않은 놈이 신경을 건드리네.

자기보다 20센티는 더 큰 놈이 누가 봐도 제복처럼 생긴 옷에 반망토까지 차려입고 눈을 부라리자 경비는 처음에 보여줬던 당당한 태도가 조금 수그러드는 듯 했다.

"시, 신분을 밝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위협이라 여기고 포박하겠습니다."

"라그니스 리엔 다 레비엥 변경백의 임시 수행원 엘드미아 에가입니다. 이제 제 질문에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신 입으로 임시 구금을 위해 자발적으로 출두하신 변경백님을 죄인 취급한 게 맞습니까?"

허리 춤에 차고 있던 검의 폼멜에 손을 얹으며 확실하게 물어본다.

이 친구가 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몰라도 이건 위협이 아니라 전투 준비다. 귀족 사회란 참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서 단어 선택 하나 잘못한 것만으로도 명예에 먹칠을 할 수 있고, 금칠을 할 수도 있거든.

문제는 귀족답게 먹칠과 금칠의 대응이 매우 극단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평민이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경우엔 법이고 나발이고 없는 것처럼 행동해도 오히려 합법이 될 수 있지.

귀족을 함부로 죄인 취급하면 결투고 나발이고 칼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세상이다.

평민이라면 귀족과 아예 말도 섞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로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가만히 있으면 반을 가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는 수준이니까.

"그렇습니다. 이곳은 귀족원의 지침으로 인해 죄인을..."

"딱 한 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무, 무슨?"

귀족원이 아무리 좆같아도 이 친구도 결국은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가족이지. 사실 법에 대해 몰랐으면 충분히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만큼 난 관대한 마음으로 설명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레비엥 변경백은 현재 귀족원이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억지로 시도한 임시 구금임에도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곳에 온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시 구금인 것이고, 그렇기에 변경백께서는 아직 죄인이 아닙니다. 평민이 함부로 죄인이 아닌 귀족을 죄인 취급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걸 모르고 저지른 실수라 여길 테니 정정하십시오."

이렇게까지 설명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지능의 소유자를 병사로 뽑았을 리 없다고 믿었지만, 놀랍게도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하는 법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주춤거리던 놈이 무슨 자신감이 붙었는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후... 최대한 예의를 차리려 했는데 어이가 없군. 우리는 귀족원 소속 사병대이고 이곳은 죄인 라그니스가 포박되어 있는 장소이며 이는 귀족원의 지침이다. 허튼소리 하지 마라."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끝까지 다 들은 이유는 단순하다.

"유언이 좀 길지만 귀족원에는 잘 전해 주마."

-서걱!

유언을 끊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난 놈이 문을 가로막고 있던 창을 내 쪽으로 향하기 전에 검을 뽑으며 그대로 목을 베어 버렸다.

이미 제국에서 치료란 치료는 다 받았기 때문에 내 몸 상태는 최고조다. 거기에 마력까지 사용했는데 일개 병사가 반응할 수 있을 리 없지. 허공으로 튄 머리가 뒤에 있는 건물 벽에 부딪쳐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옆에서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던 다른 경비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으, 으아아! 비상! 비사아앙!"

창을 휘두르기는커녕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려는 녀석을 도와줄 겸 온 힘을 다해 문을 걷어찼다.

-쾅!

원목도 아니고 단순한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탓에 그것만으로도 문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비산한다.

흠. 생각보다 후련하구만.

문고리를 잡으려고 뻗은 손끝을 스쳐 지나간 발차기가 문을 박살 낸 걸 본 놈은 그대로 하얗게 질리며 주저앉아 버렸고, 안에서 이제 막 놈의 비명 소리에 반응하여 일어나던 경비 넷은 제대로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부릅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책임자 나와."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곳은..."

"네가 책임자냐?"

가장 안쪽 벽난로에 위치한 흔들 의자에서 팔자 좋게 앉아 있던 놈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말하길래 검을 겨누며 물었더니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 그래, 딱 봐도 책임자 전용석 같긴 하더라.

하지만 놈들이 침묵한다해서 내가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기에 난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나는 임시 구금 된 레비엥 변경백님의 면회를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 그런데 네 부하는 재판 전 임시 구금에 불과한 레비엥 변경백님을 죄인 취급하더군. 발언을 철회 할 기회를 줬음에도 거절해서 귀족의 법도대로 죽였다. 불만 있나?"

"이 무슨 극악무도한 주장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귀족원 소속 사병단이고 귀족원의 지침으로 지정된 임시 구금 장소인 거 안다. 질문에 대답해라. 아니면 너도 법을 모르나?"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외운 거라고는 복무신조 정도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그 모양인데 이놈들은 과연 법을 얼마나 알까?

"알고 있다고? 귀족원을 적으로 돌리겠단 말이냐?"

왜 옛날부터 내가 뭘 물어보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놈 보다 동문서답을 하는 새끼들이 더 많은 걸까?

하지만 사람이 넷이나 있는 만큼 친절은 아직 세 번까지 비축분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기에 난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설명해줬다.

"난 법을 준수하는 왕국 시민이다. 너희들 중 레비엥 변경백을 죄인이라 주장하려는 자, 무기를 들고 죽어라. 그렇지 않은 자는 당장 귀족원에 연락해서 제대로 법을 알고 말이 통하는 이를 파견하도록. 너희의 책임자는 법을 모르는 무지렁이라서 대화가 안 통한다."

사실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놈이 이미 줄행랑을 쳤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 같지만, 그놈이 병영이든 어디든 가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할 리가 없으니 이놈들에게라도 설명해 두는 게 맞겠지. 적어도 저 주춤거리는 분위기를 봐서 한 명 정도는 말을 들어 먹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내 말에 오만상을 쓰며 책임자인 놈이 외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반역이다! 죄인 라그니스를 탈출 시키려는 반역 행위다! 공격!"

귀족마저도 반역 혐의를 부르짖으려면 모든 걸 내걸고 막고라를 떠야 하는데 한낱 경비병 새끼가 참 겁대가리가 없어요.

놈의 외침에 내 기대와는 달리 책임자를 포함한 나머지 경비병들이 나를 향해 검을 뽑아 들며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게 참 꼴같잖았지만, 혹여라도 이 중 누군가 전투를 포기하고 살아남아 내가 비겁하게 기습했다는 헛소리를 할 경우를 대비해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공은 양보하기로 했다.

합법적으로 날 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지한 새끼들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