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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16화 (116/412)

루세릭은 귀족원의 대변인이자 대행자다.

그렇다고 그가 엄청 대단한 인물인 건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편지 정도로 여기고 있었고, 귀족원의 귀족들도 그렇게 여겼으니까.

일반적인 대변인들과 차이가 있다면 편지를 보내는 이와 받는 이 모두를 만족시킬 줄 아는 매우 고급진 편지라는 점. 그리고 단 한 명만이 쓸 수 있는 주인이 정해진 편지라는 점 정도였다.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루세릭은 그 사실에 입각하여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며 성실히 일했다.

"마침 기회가 닿은 거 같으니, 초대해서 데려오게나."

방금 전까지는 말이다.

"혹시 제가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부디 한 번만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각하."

편지는 내용을 전달할 뿐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내용이든 당당하게 가서 귀족원의 말을 아무런 사견없이 전달한다. 편지 내용에 대해 개인적인 불만과 아쉬움이 있을지언정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자살은 좀 이야기가 달랐다. 설령 그 말을 내뱉은 사람이 귀족원의 실세이자 왕국에 둘밖에 없는 공작 중 한 명이라 하더라도.

"무슨 섭섭한 소리인가? 자네의 업무처리는 한결같이 만족스럽거늘. 귀족원을 좀 먹는 일부 머저리들과 자네를 저울질 하라 그러면 난 주저 없이 자네를 선택할 거라네."

외눈 안경을 낀 노인은 창밖을 바라보던 몸을 돌려 의외라는 듯 웃으며 말했지만 루세릭은 한 번은 더 그의 진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레스롬 즈라실 츠신 라위네라 공작.

70이 넘어가는 나이에도 꼿꼿한 자세에서만큼은 세월의 흔적을 찾기 힘든 귀족원의 핵이자 고목古木같은 존재인 그는 항상 농담과 진담의 경계가 애매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말게나. 말이 통하는 친구니까. 자네도 그가 왜 그 난리를 치고 있는지 알고 있지 않나?"

"너무 잘 알아서 두렵습니다만."

확실히 레비엥 변경백은 임시 구금이었다.

설령 그녀가 정말로 반역을 꾀했다 하더라도 재판도 열리지 않았고 증거도 확실치 않은 지금 그녀를 죄인이라고 부르는 건 모욕이다. 기사들 뿐만 아니라 귀족 사회에서 그 옆을 보필하며 지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 모욕에는 칼부림이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을.

7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질적 저하를 피할 수 없었던 사병들 사이에서 그러한 의식이 한없이 낮아져 일어난 이 초유의 사태에 대해 귀족원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게 사실이긴 했다.

대변인이자 대행자인 만큼 그로 인해 개판이 나버린 상황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루세릭이 레스롬 공작의 대변인으로 지낸 10년의 시간 동안 그런 상황은 항상 있어왔다.

상대방이 그걸 빌미 삼아 정말 일말의 주저도 없이 20명의 목을 따버렸다는 게 핵심이었지. 그게 설령 정당하고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무려 귀족원 전체를 대상으로 검을 뽑아 든 것이다.

무슨 동화 속 주인공도 아니고, 지금 수도에 있는 기사들 중 그럴 수 있는 자들이 대체 몇 명이나 있을까. 그의 추측에 불과했지만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겨우 말 한마디만으로 그런 루세릭의 불안을 제대로 읽어낸 레스롬 공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확답했다.

"걱정 말게. 그렇게나 죽였는데도 아직 2층엔 올라가지도 않았다지? 올라가면 죄가 두려워 레비엥 변경백이 탈출을 꾀했다는 누명을 쓸 수 있어서 그런 것이네. 그는 결코 핑계 없이 검을 휘두르지 않아. 그리고 자네라면 무사히 그를 데려올 수 있네."

레스롬 공작은 모르는 걸 안다는 듯이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가 확신하는 것은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추론해 나온 결과라 할 수 있다고, 루세릭은 믿었다.

비록 그 정보가 어디서 왔으며 어째서 제국에 방문하기 이전엔 아는 이조차 드물던 그를 저렇게나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인지는 알 길은 없었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은 루세릭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럼 데려오겠습니다."

그는 결국 편지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지구에서는 입에 담배를 달고 살았다.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담배도 피긴 했지만, 즐겨 피는 건 파는 곳도 얼마 없는 잎담배였다. 관리가 번거롭긴 해도 니코틴은 똑같이 작용하는데 맛도 향도 비교가 안 되니 일부러 발품을 팔아가며 사는 수고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몸에 나쁜 건 매한가지겠지만 폐암으로 죽기 전에 스트레스로 죽을 것만 같은 삶이라서 아무래도 좋았다. 그 담배를 피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휴식을 취한다는 기분 속에 잠겨 있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 참 담배가 마렵다.

즉,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말이다.

합법적으로 날뛰는 건 좋지만 씨발 이렇게까지 무식함이 만연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다.

"새삼 지긋지긋한 세상이야 정말."

자그마치 20명이다. 법을 몰라서 다짜고짜 창칼부터 휘두르고 죽어 나간 놈들이 20명. 그나마도 내가 처음 죽인 감옥 경비병들을 제외한 게 이 모양이다. 아마 위에 있을 라그니스는 대체 무슨 소란인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상황이겠지.

정당한 절차도 밟지 않고 올라가면 빼도박도 못하고 반역이다 뭐다 가져다 붙일 게 뻔하다 보니 그냥 아래에서 죽치고 기다리며 이번엔 제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오길 비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대화하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지금 워낙 구경꾼이 많아서 라그니스의 품위 유지를 위해 보류하는 게 낫겠더라.

"비켜라! 귀족원이다! 구경거리가 아니니까 모두 비켜!"

공개 처형마저도 유희로 취급되는 세상인데 사실 24구의 목 없는 시체들은 엄청난 구경거리가 맞지 않을까?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게 보였기에 슬슬 준비해야 하나 싶어서 손목과 발목을 푸는 사이 10여명의 사병들을 대동한 채 유일하게 갑옷을 입지 않은 사무직 같은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원의 대변인이자 대행자 중 한 명인 루세릭이라고 합니다. 엘드미아 에가 경. 잠시 검을 거두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짙은 적갈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다듬은 남자는 중년이라 부를 만한 나이로 보였음에도 나를 향해 깍듯이 인사하는 것에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목 없는 시체를 일방적으로 양산하는 것도 역겨워서 슬슬 그만하고 싶을 때 와 줬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20명의 머저리들에게 했왔던 것처럼 똑같이 물었다.

"당신은 법 좀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만 벌써 5번째다. 이번엔 제발 좀 알아먹길 바라는 내 간절한 기도가 통한 것인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입니다. 상황을 전달 받았고, 당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귀족원을 대표해서 사병들의 무례를 사과드리고 임시 구금 중인 레비엥 변경백의 면회를 승인하라는 지시를 전달 받고 온 것입니다."

그가 대답과 함께 손짓하자 10명의 사병들은 지금까지 썰렸던 놈들과 확연히 다른 제식을 보여주며 주변 사람들을 물리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귀하를 귀족원에 초대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 상황에 초대라는 건 참 안 어울리는 말 아닙니까 루세릭 경?"

이 지랄을 치는 마당에 귀족원에서 뭔 짓을 할 줄 알고 거기로 기어 들어...

"그냥 루세릭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만, 초대는 레스롬 즈라실 츠신 라위네라 공작 각하께서 바라신 겁니다. 그 누구도 당신을 해코지할 수 없으며, 그분 또한 에가 경을 해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걸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갈 수밖에 없네.

"공작...각하께서?"

"네.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레비엥 변경백님에 대한 용무를 마친 뒤의 이야기입니다."

분명 왕국에 늙은 공작 하나 좀 젊은 공작 하나 해서 딱 둘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날 찾는다라. 나도 참 대단한 놈이군.

하긴, 제국 황녀도 만나고 왔는데 그깟 공작이 대수냐.

"그러죠."

어차피 형식을 위해 기다린 것에 불과한 만큼 검에 흥건한 피를 적당히 시체의 옷가지로 닦은 뒤 검집에 꽂아 넣고는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뒤에서 아련하게 루세릭이라는 남자가 사병들에게 지시해 주변을 정리하는 소리가 곧장 들려오는 걸 보아하니 그도 당장에 다른 용무가 있었던 건 아닌 듯 싶다.

그리고 예상대로 단출하게 두어개의 방만 있는 2층 중에서 유일하게 닫혀 있는 방에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었다.

"아래 개판났으니까 내려가지 마라."

겨우 빛만 들어오는 작은 창문 하나와 침대만 있는 독방에 앉아 있던 라그니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 사달을 내 놓고 그런 말이 나와?"

워낙 시끄러웠으니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도는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나보다.

"사달이라니. 죄인 아닌 귀족을 죄인이라고 말한 평민한테 수 차례의 조언과 경고 끝에 들어 먹지 않아서 싸운 건데. 저쪽도 인정했어."

"저쪽이라니? 귀족원? 지금 귀족원 사람들이 직접 온 거야?"

"어. 루세릭이라는 사람이 왔던데. 대변인이라던가?"

하다못해 손님이 앉을 의자 하나도 없는 방이라서 그냥 열어 놓은 문에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기대는 나를 바라보는 라그니스의 시선이 영 못마땅한 눈치다.

"루세릭이면 레스롬 공작 직속 대행자야. 레스롬 공작은 한 파벌의 수장이라고."

"안 그래도 얼굴 한번 보자고 초대했다길래 이야기 끝나면 바로 가 봐야 할 거 같아."

"...하아. 이젠 놀랄 기력도 없다. 왜 그렇게 태연하니..."

"뭘 새삼스럽게. 제국가서 황녀도 만나고 왔는데 이제와서 공작에게 주춤거릴 순 없지."

어째 머리를 휘젓고 싶은 강한 욕구를 꾸역꾸역 참는 것 같은 모습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라그니스가 지친 얼굴로 바닥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귀족원가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칼 뽑지마."

"죽을 위기에만 뽑을게."

"그건 당연한 거고."

어처구니없는 일에 엮인 것에 불과할 뿐, 위험한 일에 엮인 게 아니라고 믿었기에 딱히 위로의 말 같은 건 하지는 않았다. 대신 독방에 대한 불만 가득한 이야기나 좀 나눈 뒤 내일을 기약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레니사한테 들은 이야기나 말해 줄까 했지만, 어차피 집사장과의 이야기가 정리되는대로 한 번 더 들릴 게 분명했기에 대충 언질만 해줬다.

그리고 올라가자마자 다시 내려오다시피 한 나와 주변의 시체들을 번갈아 보며 매우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사병들을 뒤로하며 루세릭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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