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의연하게 말을 모는 루세릭을 따라 도착한 귀족원은 감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수도에 지내면서도 한 번을 와 본 적이 없던 터라 적당히 영국 국회의사당 같은 건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건물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솔직히 안에 들어서자마자 모두가 날 노려보며 죽이려들지 않을까 싶은 걱정도 있었지만, 나이 좀 있는 사병들을 스쳐 지나가는데도 날 알아보지 못하고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별로 문제가 될 거 같지는 않아 보였다.
"벌써 스무 명이 넘게 죽었다더군. 살아서 돌아온 놈들 말로는 검 한 번 휘두르면 목 하나가 날아간다더라."
바로 그 당사자가 옆을 지나가고 있는데도 모르는데 안심을 안 할 수 없지. 그것도 꽤나 여러 곳에서 저들끼리 뭉쳐 이야기하고 있는 게 대부분 나에 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들 잘못으로 죽었으니 제대로 된 부조금도 못 받겠군."
"이번엔 어디 놈들이었는데?"
"에타빌 자작."
"휘유. 사채업자가 또 한 건 해냈군. 어째 사병을 끝없이 데려온다 했는데 사실 적당한 술집에서 고용해서 데려오는 거 아냐?"
"깡패 놈들한테 빚을 지우고 데려오는 것일지도 모르지. 고생하는 우리도 좀 생각해줬으면 하는데."
어쩌다가 잠깐 주워들은 것 치고는 상당히 의외의 내용인지라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뻔 했다. 저런 내용을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고?
안그래도 루세릭이 대동한 사병들만 해도 내 손에 죽은 놈들하고는 훈련도부터가 달라보이긴 했지만... 소속감 마저도 다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거의 다른 부대 취급이네. 게다가 사채업자? 설마 우리 친구 기에스한테 작업친 게 저 에타빌인가 하는 인간인가?
의문에 집중해서 기억을 되집어볼 틈도 없이 루세릭은 그저 열심히 걸음을 옮겨 3층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방까지 날 안내해줬다. 그리고 가볍게 노크를 하며 목소리를 내었다.
"각하. 엘드미아 에가 경이 방문했습니다."
"들어오게나."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따라 정중한 자세로 문을 열어준 루세릭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고풍스러운 외눈 안경을 낀 노인이 나를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제야 만나게 되는군. 반갑네. 내가 국왕파의 눈엣가시인 레스롬 즈라실 츠신 라위네라 공작이라네."
빈말이라도 서글서글하다고 할 수 없는 매서운 인상과 달리 퍽이나 유쾌한 자기 소개다. 비록 귀족원은 지금까지 마음에 든 적이 없었을 지언정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엘드미아 에가는 유쾌함에는 유쾌함으로 답할 줄 알지.
그래도 최대한 예법에는 맞춰 자세를 취하며 마찬가지로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각하. 귀족파의 눈엣가시 엘드미아 에가입니다."
"하하하. 역시 유쾌한 친구야. 자네 같은 친구가 둘만 귀족원에 있었어도 여생이 좀 더 재미있었을 거 같구만. 앉게나. 초대에 응해준 손님을 계속 선 채로 두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법이지. 아, 하지만 자네의 소개는 틀렸다네. 자네는 의외로 눈엣가시가 아니거든."
공작이나 되는 어르신이 굉장히 열린 마인드를 가지고 있나보다. 하지만 어째 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저 뉘앙스는 조금 신경이 쓰였다.
"마치 저를 알고 계셨던 것처럼 느껴지는군요."
방 중앙에 위치한 소파에 앉으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어보니, 레스롬 공작은 굉장히 익숙한 움직임으로 한 켠에 위치한 티 세트를 꺼내 능숙하게 차를 준비하며 대답해주었다.
뭐? 공작이 직접 차를 내온다고?
"물론이지. 모르기엔 최근 행적이 굉장히 화려했으니까. 국왕 폐하께서 아는 만큼 나도 알고 있지. 역으로 말하면 국왕 폐하도 자네의 존재는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일세. 비단 제국에 방문하기 이전부터 말이야. 아, 여기에 차 종류는 하나 밖에 없으니 일단 마셔보고 취향이 아니면 말하게나."
시종일관 즐거움이 가득한 어조로 말하는 것과 달리 담긴 내용은 내 예상을 좀 많이 뛰어 넘는다. 제국 방문 이전부터 날 알고 있었다고? 에카프 경이 보고라도 한건가?
"좀 궁금증이 동하나? 영 내키지 않을 수 있네만 자네가 나와의 대화에 흥미를 느꼈으면 하거든. 즐거운 대화란 흥미에서부터 시작되는 거 아니겠는가."
거짓말 안하고 오가토르프 가 집사장이 차를 준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로 깔끔하게 준비를 마친 레스롬 공작이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동작으로 걸어와 다기를 내려두고 내 맞은 편에 앉는 모습을 계속 보면서도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어서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이래봬도 차를 꽤 잘 뽑아낸다네."
엄청 강압적이고 권위에 찌들어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 여겼는데 너무 예상 밖의 존재라서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다. 결국 갈피를 잡지 못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동안 어깨를 한 번 으쓱여보인 레스롬 공작은 알아서 말을 이어나갔다.
"마도구라는 건 참 편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 포트는 내장된 마석에 마나만 주입해주면 적정 온도를 맞춰주는 기능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물건이야. 기능적으로는 대수로울 거 없어 보이지만 내가 젊었을 적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기술에 속한다네."
"아, 예..."
"하지만 이 마도기술이 처음부터 즐거운 다과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야. 지연식 폭발 마법이라는 형태로 적군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나온 부산물이지. 우습게도 그 연구를 진행하던 마법사들이 식어 버린 차를 마시면서 연구하기 싫어 적당히 응용해 만든 기술의 결과물이라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아련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은 마치 추억을 회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기색은 순식간에 사라지며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
"기술, 도구, 사람. 결국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내는 법. 하지만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아는 이에겐 오히려 아무것도 없고 그럴 능력이 안 되는 이에게 모든 게 쥐어질 때가 있다네. 최근엔 그런 일이 좀 자주 있는 편이라서 속이 쓰릴 정도야."
그러니 귀족파에 귀의해라 같은 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어 뚱한 표정으로 차를 따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델트도 마찬가지였지. 더 큰 일을 해야하는 인재였는데, 그 굳건한 충성심이 엉뚱한 놈에게 향했거든."
갑작스럽게 본론이 훅 치고 들어왔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엔 제대로 표정 관리를 했기에 난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델트가 누굽니까?"
"아, 이름을 모를 수 있겠군. 자네가 재작년 무렵에 레비엥 변경백을 구하기 위해 죽인 기사 중 한 명일세. 비룡과 함께 죽은 기사 쪽이지."
씨발. 그러거나 말거나 레스롬 공작의 반응은 한결같다.
혹시나 싶어 주변의 인기척이나 레스롬 공작의 동태를 재확인해봤지만 딱히 이상한 건 없다. 그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
저 태연한 반응을 보아하니 떠보는 게 아니라 아예 다 알고 있었던 거 같은데 왜 지금까지 침묵한 거지? 심지어 델트와 관련된 사항은 내일 있을 재판에 증거랍시고 내놓을 요량이 아니었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언제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준비를 갖추니, 레스롬 공작이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야생 동물 같구만. 걱정 말게. 이게 자네에게 무슨 협박이 되겠나? 오히려 자네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있어서 일부러 꺼낸 이야기일세."
"각하께서 제게 양해를 구할 만한 사안은 레비엥 변경백과 관련된 것 말고는 없을 거 같습니다만."
"관련된 건 맞지. 되먹지 못한 델트의 주인을 단두대에 올려야 하거든. 자네가 계속 날뛰면 이쪽의 계획이 틀어진다네."
"...예?"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누굴 단두대에 올려?
이제 와서 꼬리를 자르려는 계획인 건가? 아니, 그런 거면 굳이 나한테 이런 자리를 마련해서 이야기할 이유도 없지 않나?
무엇 하나 딱 떨어지는 거 없이 그저 의문만 계속되는 와중에 레스롬 공작이 옅은 미소와 함께 차분히 말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되는군. 꼬리 자르기는 아니라네. 애당초 꼬리인 적이 없었으니 말이야. 굳이 표현하자면... 눈 밖에서 딴 짓을 못하게 우리에 가둬 놓은 멧돼지를 도살할 때가 된 거라 할 수 있겠군."
마치 내 머릿속을 훔쳐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확답하며 레스롬 공작은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정작 그 평온한 태도와 달리 방금 내뱉은 말은 결코 평온하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그의 태도에 변함은 없었다.
"가문과 영지의 이익을 우선순위로 놓고 움직이는 것. 귀족이 추구하는바를 단순명료하게 풀어놓으면 딱 그 정도라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법 아니겠나? 그런 게 없으면 도적들보다 질이 나쁘지. 당연히 귀족파라고 불리며 뭉쳐 있는 우리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일세. 우선순위와 별개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게 딱 하나 있지."
"...그런 게 지켜지긴 합니까?"
"지켜야 하고 말고.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 그것만큼은 타협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지. 뭐, 가문이 왕가로 인해 멸문당하는 순간까지도 지키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지경이 아니면 당연히 지켜야 해."
당연하다는 듯이 튀어나온 대답이었지만 그 말이 나온 곳이 국왕파의 반대선상에 위치한 귀족파 수장의 입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지며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레스롬 공작은 내 무례를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그대로 말을 이었다.
"아직 자네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탓에 모든 걸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줬으면 하는군. 하지만 계산적으로 생각해 보게나. 지금까지 현 왕가 옆에서 조금 투닥거릴지라도 아쉬운 거 없이 잘 지내 왔는데 새로운 가문이 들고 일어나서 왕가를 뒤엎는다면, 결국 새로운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지금까지 쌓아왔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거기서 이전과 같은 이익을 얻으며 지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손해가 생길수도 있고 말이지."
대다수의 귀족들은 그런 수고를 하면서 새로운 부와 명예를 원할 만큼 젊지도, 부족하지도 않다네.
차를 홀짝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레스롬 공작의 말은 굉장히 합리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고. 귀족원 내부에 아직 스스로가 유능하고 젊어서 왕이 될 자질을 지녔다고 믿는 이들이 있지. 아쉽게도 그런 이들보다 정말 잘난 많은 이들은 전장에 나가 있거나 수도에 없다보니 비교 대상이 적거든. 그런 희생이 7년간 이어지는 사이 자기들은 꾸준하게 배를 채워와서 그런지 몰라도... 슬슬 뵈는 게 없는 모양이야."
"그거랑 레비엥 변경백이 대체 무슨 연관인 겁니까?"
"음, 그것도 말하기엔 좀 애매하구만. 지금은... 그녀의 존재가 반역자의 계획 안에서 꽤 많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만 해 두겠네."
나에게 술술 정보를 털어놓았어도 당연히 의심했겠지만, 지금 내가 레스롬 공작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러저러하니 가만히 있어 달라고? 어림도 없지.
"그걸로는 제가 레비엥 변경백의 안전을 위해 뛰어다니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공작님."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서 서약서를 하나 써 줄 생각이라네."
"...서약서요?"
"어떤 말장난도 없이. 내일의 재판에서 레비엥 변경백을 완전 무죄로 석방한 뒤 반역자를 밝혀내지 못하면... 어디보자, 내 모든 지위와 재산을 내놓겠네. 당연히 내 공식 인장과 서명을 적어서. 어떤가?"
자신의 집단에 위해를 끼치겠다는 다짐과 이를 증명하기 위한 보증금으로 자기가 가진 모든 직위와 재산을 올인 해버리는 레스롬 공작을 앞에 둔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딱 하나 뿐이었다.
두뇌를 풀 가동하여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고민하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