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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18화 (118/412)

일천하고도 하나의 엘드미아들이 집단 지성을 끌어모은 끝에 결론이 났다.

지금 가장 먼저 알아보고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게 딱 하나 있다고.

"각하께서는 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아십니까?"

"오그웬에서 들리던 소문부터 자네가 수도 모험가 길드에서 활동하며 쌓은 소문 정도까지는 알고 있다네. 마왕군을 향한 복수심이 강하다는 것도 말이지."

의외의 질문으로 여기고 조금은 딜레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레스롬 공작은 즉답했다.

개인적인 사생활 외에는 나름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는 소리인데... 기분은 조금 오묘해도 설명할 건 줄어서 마음에 든다.

"마왕군 지휘관과 관련된 일은 분명 복수가 맞습니다만, 거기엔 제 신념과 연관된 게 좀 있는 편이라서요. 짧은 본론을 꺼내기 위해서는 말씀드리는 편이 나을 거 같다고 생각되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신념이라. 상대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도움되는 요소 아니겠는가. 부디 알려 줬으면 하는군."

고압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을 완곡하게 표현하는데 아주 이골이 난 레스롬 공작이었다. 저 정도는 해야 귀족원의 수장 노릇을 하는 것일지도.

"우선, 제게 복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목표는 무엇인가?"

"8살 꼬맹이가 십수 년이 지난 뒤에도 원수를 잊지 않고 찾아내, 그 사람의 지위와 권력따윈 개의치 않고 죽음을 안겨 줬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 사람들의 반응이 목표라고 할 수 있죠. 각하라면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거짓이 아니라는 가정하에서요."

"하하. 적대적인 상황으로는 별로 엮이고 싶지 않겠지."

당연한 이야기다. 나조차도 그런 놈과는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에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라는 건 그겁니다. 손익을 저울질 하며 건드려볼지 말지를 고민하기보다 일단 기피하는 게 최선이라고 여기도록 만드는 거죠."

"허나 그러기엔 장애물이 너무 많지 않나? 자네의 복수가 아무리 타당하다 한들 피해를 입게 된 다른 이들에겐 전혀 다른 의미일 테니까. 그들이 자네처럼 행동하게 되면 그 연쇄는 끊이지 않을 텐데?"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이다. 괜히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지. 당연히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도 문제 될 게 없다.

"완벽을 바란다면 문제가 되지만 제가 바라는 건 완벽이 아닙니다. 제가 하나를 빼앗겼을 때 가만히 있다면, 언젠가 결국 그 사실을 알게 된 열 명이 달려들어 열을 빼앗아 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하나를 빼앗기고 상대에게서 다섯을 빼앗아 온다면, 저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으려는 이들은 훨씬 줄거나 고민을 좀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달려와서 칠 수 있는 동네 북이 되느냐, 소수의 사람만 각오를 하고 칠 수 있는 북이 되느냐의 차이다.

애당초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절대 불가침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신마저도 마왕이라는 게 튀어나와서 신경을 건드리는 마당에 한낱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판타지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최소한 100명이 우습게 볼 걸 50명 정도만 우습게 보는 수준으로 바꿀 수는 있지. 마왕군 지휘관이라는 이름에 그 정도 무게는 충분히 존재한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내가 먼저 깽판을 치지 않는 이상 날 먼저 건드리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 드는 날이 반드시 온다. 내가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겁간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선량하게 살고 있는데 끝없이 적들만 늘어날 리가 있겠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니 이 지랄을 치며 살아가는 거고.

"얼굴도 모르는 마왕군 지휘관을 노리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당연히 저희 마을을 직접 쓸어 버리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군사적 명령을 내린 건 지휘관이니 뒷감당 정도는 본인이 해야죠. 그리고 그건 비단 마족뿐만 아니라 저와 엮이고, 적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절대로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세상에 박아넣겠다는 내 신념은 타협이나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그게 설령 한 나라의 공작 양반이라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레스롬 공작이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마실 요량으로 잔을 들어 올렸지만, 무슨 수작질을 해 놓았을지 알 수 없으니 일단 향만 음미하고 다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허리 가까이 두며 언제든 검 손잡이를 잡을 수 있게 준비를 마친 뒤 레스롬 공작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직접 대답을 듣고자합니다. 말씀하신 멧돼지, 각하의 명령으로 움직인 겁니까?"

말로는 꼬리 자르기가 아니고 멧돼지라고 했으나 그런 건 내 입장에서 말장난에 불과하다. 결국 품에 품고 있던 건 똑같잖아.

병사의 탈영이 간부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레스롬 공작도 피해자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일단 이야기는 확실히 마무리 지어야 뒤에 가서도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같은 식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는 법이다.

그 멧돼지의 계획 때문에 라그니스는 어린 나이에 몸을 숨기고 다니다가 납치까지 당해야 했고 비룡 조종사 기에스는 빚을 지고 반역인지도 모른 채 일에 가담해야 했다. 내가 약했다면 당시 델트의 계산처럼 준기사 네 명에게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살아 있다고 해서 그런 시도들을 웃어넘겨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날 건드린 놈은 아직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확인해야 할 게 바로 이 부분이지.

누가 날 건드린 거였나.

반역자 멧돼지? 아니면 레스롬 공작?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반역자는 반역자대로 왕국의 처벌을 받겠지만 각하께서 그 모습을 보진 못하겠죠."

오늘 내 손에 뒈질 테니까.

해석이 뻔한 내 행동을 보면서도 레스롬 공작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차를 마시는 그의 행동에는 기품이 넘친다.

그렇게 잠시동안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눈 너머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질 쯤이 돼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전혀 연관 없다네. 오히려 귀족원도 신 귀족파와 구 귀족파 수준으로 갈라진 채 눈치를 보는 사이지. 누가 어느 파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하네."

딱히 말이 필요할 거 같지는 않아서 그냥 두 손을 다시 무릎 언저리에 두는 것으로 대답을 마쳤더니 아무런 질책도 없이 여전히 흥미롭다는 태도로 레스롬 공작이 운을 뗐다.

"두 가지만 물어봐도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미리 자네의 신념을 나에게 말해 준 이유가 뭔가? 내가 당장의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으로 둘러댈 가능성만 더 높아지는 꼴 아닌가? 그리고 내가 말한 서약서를 받은 다음에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더라면 자네에게 좀 더 유리한 입장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지금 말하는 건가?"

뭐 대단한걸 물어보나 싶었는데 다행히 별거 아니었다.

"전자는 제가 손익을 따져가며 복수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걸 설명해야 진정성이 느껴질 거 같았기 때문입니다. 각하의 말씀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저 유예를 얻으신 것에 불과하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느낌이기도 하구요. 후자의 경우는 '용무는 끝났으니 죽어라.' 같은 상황은 성미에 안 맞아서 그런 거 뿐입니다. 도적놈들 같잖습니까."

협조 잘 해주는 이에게는 목숨을 선물해주는 것. 내 인생의 모토 중 하나다.

"서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기다리게나."

그런 내 인생 모토가 심금을 울린 건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레스롬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굉장히 속필인 레스롬 공작이 서약서를 다 쓰고 나에게 재차 확인까지 시켜 주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 그가 언급했던 것처럼 그 어떠한 두리뭉실한 표현없이 확실한 단어와 문장으로 구성된 서약서는 오해의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이행이 되지 않을 경우 레스롬 공작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놓겠다는 내용이 추가로 적혀 있었다.

덕분에 괜히 또 두뇌 풀 가동하려는 걸 겨우겨우 참았다.

"혹시 몰라 말해 두지만 문장과 인장, 내 친필은 왕성에서도 대조가 가능하다네. 위조라는 식의 거짓말은 통하지 않으니 걱정 말게나."

확인을 마치고 돌려주자 깔끔하게 말아 밀랍으로 봉인까지 완료한 레스롬 공작이 손수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오늘 말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고 있겠네."

"공작님이 귀족파고 제가 레비엥 변경백을 돕는 이상 그런 날은 안 올 거 같습니다만."

"글쎄. 오히려 빨리 보게 될지도 모르지."

아리송한 말이나 하며 웃어 보인 레스롬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친히 방문을 열어 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즐거운 대화였네 엘드미아. 심심하면 놀러 오게나. 자네라면 언제든지 환영하겠네. 다음엔 오해가 풀려서 사이좋게 차를 마셨으면 하는군."

방금 전까지 내 손에 죽을 뻔했다는 걸 제대로 자각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밝은 태도를 보이는 레스롬 공작을 떨떠름하게 지나치려고 하자, 그의 다리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며 내 앞을 살짝 가로 막았다.

"멧돼지는 이번 재판이 끝날 때까지 절대 죽어서는 안 되네."

"...?"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대부분의 증거들은 다 수집한 상태라서 말이야. 이곳을 나선 뒤 혹여 무슨 일이 생기거든, 그게 귀족원의 의지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사실과 함께 기억해 두게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불의의 습격을 조심하라는 조언을 남긴 레스롬 공작이 문을 닫는 것을 지켜본 나는 서약서를 품에 넣으며 귀족원을 빠져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역시 정치하는 사람들과 엮이면 안 된다는 깊은 깨달음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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