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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19화 (119/412)

귀족원에서 오가토르프 가문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 편이다. 안 그래도 피곤한 하루이다보니 서둘러 돌아가 침대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드는 지금은 더욱 멀게 느껴지는 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일부러 더 먼 길을 선택해서  산책이나 하는 중이지.

"공작이 아니라 무슨 점쟁이야 씨발."

귀족원을 벗어나자마자 요상한 새끼들이 꼬리를 잡고 따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어디까지 그리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할 겸 진짜 산책을 좀 하다 보니 확실히 알겠더라.

시장에 널리고 널린 가판대에 거울 대용으로 쓸 수 있는 물건이 보일 때마다 살펴보는 척 들어서 뒤를 확인하면 어김없이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여자 둘에 남자 둘. 복장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민인 주제에 검은 제식에 맞춘 것처럼 넷 다 똑같이 패용하고 있는 골 때리는 년놈들.

저것들이 그 반역자의 부하들인지 뭔지 짐작하느라 조금 길게 목걸이를 보고 있었더니 가판대의 여주인이 너스레를 떨며 말을 걸어왔다.

"어휴, 나리. 보는 눈이 있으시네! 거기 목걸이 중앙에 박힌 건 진짜 은이랍니다."

"신품은 아닌 거 같은데, 굉장히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네. 주인장이 직접 관리하시나?"

귀금속 파악하는 건 아실리에에게도 배우고 오가토르프 가문에서도 배웠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거리에 나온 물건 정도는 얼추 꿰뚫어 본다고 자부할 수 있지.

아예 쌩 깠다가 들러붙은 놈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면 좋을 게 없어서 적당히 받아주자 박수까지 치는 리액션을 펼치며 여주인이 반응한다.

"역시 여간 내기가 아니셔! 정확해! 그래도 장물인 건 아니랍니다!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보석상에서 중고품들을 가져온 거죠! 귀족나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여긴 다르니까요!"

일반적인 시장 아낙네라고 보기 힘든, 오히려 모험가에 가까운 복장을 한 갈색 머리의 여성은 주변 가판대의 주인들에 비해 월등히 젊었다. 그런데도 양쪽으로는 보디가드처럼 보이는 떡대들을 둘이나 끼고 있는 게 영 평범하진 않아 보인다.

나도 참 굉장해. 하필 무의식중에 골라도 이런 가판대를 골라서 보고 있었네.

충분히 장물일 가능성도 있어 보이지만 어차피 나한텐 중요한 게 아니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가격은?"

"겨우 이티스엘 은화 10개!"

"중고를 원가에 팔려는 시도는 좋았어."

내가 이래 봬도 아실리에에게는 영 시원찮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오가토르프 가의 집사장님께는 칭찬받은 눈썰미의 소유자다. 이미 보석이 아니라 은이 박힌 것부터가 가난한 귀족들의 사치 대용품에 가까운 건데 무슨.

어차피 살 생각도 없었으니 그냥 갈 길 가려는데 여주인이 목걸이를 내려놓으려는 내 손을 재빨리 막아 내며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으아앗! 나리! 잠깐! 농담! 농담이었다니까요! 아이잉! 농다아암!"

"난 가격 속여 먹는 거 농담으로 취급 안 하는데."

"솔직히 농담은 아니었지만 그 가격에 사 줬으면 이것저것 서비스라고 잔뜩 챙겨 주려고 했다니까요? 믿어줘요오."

몸을 배배꼬며 되먹지 못한 애교를 부려대는 꼴이 가증스럽지만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도 아마 자기 외모를 믿고 저러는 것이리라. 가판대 상인치고는 눈에 띄는 미모인 건 확실하니 자신감이 있는 거겠지.

근데 내 주위에 너보다 예쁜 여자만 셋이다. 셰릴까지 합치면 넷이고. 그것마저 떨궈내고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내 어깨에 낯선 이의 손이 올라왔다.

"어이, 나리. 우리 동생이 농담 좀 한 거로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말고 물건 좀 더 보고 가지?"

놀랍게도 어깨들이 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며 눈치를 주는 게 아닌가?

"허리에 검도 멋진 거 차고 다니는데, 이런 건 푼돈 아뇨? 좋게 좋게 갑시다."

"뭐, 뭐라고?"

뒤에 꼬리가 달렸다는 것조차 별거 아닌 걸로 느껴질 정도로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지들이 떡대라고 해도 이제 190에 육박하는 키와 근육을 갖춘 나보다 머리 반 개 정도는 작은 놈들이 지금 날 협박하고 있어!

"혹시 너희 지금 내 복장이 안 보이니?"

믿기지 않는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도해 버린 탓에 순간 이 두 놈의 시력에 문제가 있나 싶어 나도 모르게 걱정을 담아 물어보고 말았다.

"아주 잘 보이죠. 돈 많은 나리. 어휴 얼마나 잘 먹고 잘 컸으면 키도 크잖아? 우리도 어디 가서 꿀리는 키는 아닌데 목이 다 아프네."

"하지만 멋지고 비싼 옷이라고 칼까지 막아주는..."

"너 거기서 조금이라도 손 움직이면 뒈진다?"

순간 유쾌했던 기분이 싹 날아가는 손동작을 봐서 나도 모르게 정색을 때려 버렸다.

새끼들이 말로만 하면 유쾌하게 웃어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려고 하네. 조금이라도 더 꼼지락 거리면 그대로 턱을 박살 내버릴 준비까지 마친 상태로 경고한 나의 친절이 무색하게 녀석은 되려 오만상을 쓴다.

"형씨. 검 믿고 까부나 본데, 그거 뽑는 거보다 내 칼이 댁 배때기에 박히는 게 더 빠를 거라고 생각 안 해? 실전 경험이 없으시구만?"

실전...?

이 내가... 실전 경험이... 없다고...?

실전이란 뭘까...?

방금까지만 해도 스물네 명의 머리를 오프너에 걸린 병뚜껑마냥 따버리고 왔는데.

"이거 좋게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우리랑 같이 잠깐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해 보는 게 어때?"

"아이, 오빠들. 손님 불안하게 너무 그러지 마."

그러면서도 나에게서 떨어진 여주인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떨어지며 가판대 뒤쪽에 나 있는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길을 만든다.

그리고 반쯤 강제로 날 끌고 들어가는 두 떡대의 수작질에 딱히 저항하지 않은 채, 나는 일단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다.

얘들이 지금 나한테 무슨 쓸모가 있을까?

내 옷차림이 딱히 귀족스러운 건 아니다. 하지만 수도에서 사는 상식인이라면 어디 제복인지는 모를지언정 최소한 제복이라는 것 자체는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디자인을 갖춘 의복이다. 선대 레비엥 변경백의 의상 센스는 장난 아니라니까?

근데 그걸 보고도 이렇게 당당하게 끌고 들어간다고? 대체 왜? 뭘 믿고?

"이런 말 너무 식상해서 안 하려고 했는데, 너희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거야."

"글쎄? 전혀 잘못 생각하지 않는 거 같은데? 우리가 이래 봬도 수도에서 사는 귀족 나리들 제복은 싹 다 꿰고 있거든."

"거짓말하지마. 그런 놈들이 날 왜 건드려?"

"거짓말이 아니니까 건드리지. 형씨는 딱 봐도 수도 밖에서 올라온 쫙 빼 입은 졸부잖아. 댁이 입고 있는 제복은 본 적 없어."

왜째서? 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스쳐 지나간 건 레니사와 라그니스 저택의 사용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네. 라그니스 주변에서 이 옷 입고 있던 건 나랑 레니사 정도였구나. 못 볼 만 하네.

"우리 형님이 이 바닥에서 정보로 동생들 먹여살리는 분이거든. 만만하니까 고른다 이 말이야."

"...정보?"

안 그래도 귀찮은 상황에 이 괘씸한 새끼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에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한 마디였다.

"신이시여. 이번엔 좀 부르는 텀이 짧네요."

어김없이 계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하, 이 형씨 덩치는 산만해서 신이나 찾고 있네."

"신이 있었으면 우리한테 이렇게 붙잡혔겠어 형씨?"

"엘드미아 에가다."

"뭐?"

골목길로 좀 더 따라 들어가니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는 불량한 패거리들을 바라보며, 난 진심을 다해 미소 지어 보였다.

"나는 엘드미아 에가라고 한다."

지크멜은 성공한 정보상이었다.

4년 전, 오그웬에서 주먹 깨나 쓴다는 패거리에 들어가 멋모르고 날뛰던 15살 철없는 꼬맹이에 불과했던 시절.

지금도 가끔씩 악몽을 꿀 정도로 강렬한 경험을 한 지크멜은 부러진 두 다리가 제발 멀쩡히 붙길 기도하며 네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죽음의 공포 속에서 지내야 했다. 패거리의 대장이었던 이가 발길질 한 방에 절명했다는 이야기를 주워 들었을 때는 다리만 부러진 걸 감사히 여기기도 했으나 두려운 건 두려운 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러진 두 다리 덕에 구걸은 어렵지 않았고, 그런 나날을 버티며 지크멜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폭력이라는 건 더 큰 폭력 앞에서 너무나도 부질없다는 것과, 무지함에서 나온 행동들은 결코 유쾌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살아남으려면 폭력이 아니라 지식을 얻어야 한다는 깨달음 속에서 지크멜은 다리가 낫자마자 오그웬에서 도망쳐 다른 인근의 도시로 향했다. 먹을 돈도 아껴가며 약제사에게 글을 배우고, 지식을 얻고, 바닥을 기면서 떨거지들이 폭력으로 거리를 지배할 때 정보로 돈을 벌었다.

지크멜같은 일반인에게 모험가를 상대로 하는 정보는 돈이 되지 않았기에, 그는 도시에서 주로 활동하는 상인과 귀족의 정보를 취급하며 돈을 벌었고 여러 위험들도 그런 정보로 극복해내며 수도에 자리를 잡았다.

그 와중에도 폭력은 취급 대상이 아니었다. 정보만으로도 그는 아쉬울 것 없이 세를 불려 나갈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 정보를 이용한 가판대 운영 정도는 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소소한 부업에 불과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이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평소와 다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장.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중요한 업무가 아니면 나중에 와라."

정보상이란 결국 하루 종일 책상머리로 들어오는 문서들을 대조해 보며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것의 연속이다. 그래서 지크멜은 문서의 바다에서 머리를 들지 않은 채 목소리만 들으며 상대를 기억해냈다.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릴시의 장물 가판대를 지키는 데 붙여 준 호위 중 하나였다. 이름이 벤이었던가?

알아서 중요도를 구분할 일머리는 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놈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더욱 큰물에서 놀기 위해, 그리고 공포의 근원인 오그웬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질 요량으로 수도에 입성한 그의 조직은 순조롭게 몸집을 키우고 있었지만 인재는 항상 부족했다.

그리고 그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는 건 결국 지크멜 본인의 몫이었던 만큼 그는 시간을 허투루 쓰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손님? 나한테?"

"어. 너한테."

처음 듣는 목소리다. 반말이기도 했고. 벤이 말한 손님이라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서에서 고개를 돌려 방문자를 향하는 얼마 되지 않는 순간 동안 지크멜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은 단순한 의문이었다. 이런 식의 방문이 가능한 고객은 없었을 텐데? 누가 정보를 헤프게 흘린 걸까? 안전을 위해 체계를 재정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렇게 완전히 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바라본 지크멜은 혹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얼굴인가 싶어 집중해서 손님이라 불린 자를 바라보았다.

굳이 찬찬히 뜯어볼 필요는 없었다.

"응? 너 어째 낯이 익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었나?"

"끼, 끼, 끼!"

"끼?"

"끼야아아아아아아악!!!"

4년간 악몽 속에서 지겹도록 봐 왔던 얼굴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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