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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22화 (122/412)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은 좋았으나, 문제는 내 덩치였다.

진짜 빈말이 아니라 눈에 띄어도 너무 눈에 띈다.

키만 놓고봐도 185에서 187센티 정도 되는 근육 덩어리가 140센티짜리 롱소드를 허리에 차고 새하얀 제복에 와인빛 반망토까지 두르고 잘생긴 얼굴을 뽐내며 돌아다니는데 그게 감춰져?

"어쌔신 크리드도 아니고 이대로는 절대 불가능하지."

어차피 아직은 좀 더 돌아다닐 거라 생각할 여유는 있겠지만, 머릿속 엘드미아들의 집단지성을 이용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걸 봐서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일단은 나에게 개쩌는 검을 지인 할인으로 팔아 줬던 발쿤 드말리 씨를 만나러 가며 꾸준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다.

솔직히... 아, 이걸 뭐라 해야 하려나? 마력이 잘 흐르는 정도라고 해야 하니 도전율導電率에 빗대어 도마율導魔率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귀찮아도 마력 전도율魔力 傳導率이 나을 거 같긴하네. 아무튼 튼튼한 것도 튼튼한 거였지만 이번 구사일생은 이 검의 마력 전도율이 좋았던 덕도 있었으니까.

내가 원래 쓰던 검, 폐던전에서 마족한테 뺏어던진 검에 걸쳐 이거까지 쓰고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발쿤 씨는 따지고 보면 내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장인이 아니니 도구 빨을 탈 수밖에."

당연히 은혜에는 감사를 표할 줄 아는 엘드미아가 인사 한번 안 드릴 수 없지. 비록 어수선한 하루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진드기들의 뒤를 잡을 방법이 떠오르기 전까지 밖에서 처리할 일들을 최대한 하면서 시간을 끌어볼 생각이다.

사실 중간에 놈들이 미리 접선을 시도하는 유쾌한 상황을 기대하긴 했지만, 세상만사가 뜻대로 흘러가진 않는 법이지.

거의 20분 정도를 빙 돌아 이동하며 드워프 지구에 도착할 때까지 놈들은 끈질기게 따라오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독한 놈들 아주 내 일거수일투족을 싹 다 파악해서 어딜 돌아다니고 누굴 만나는지 알아내려는 심보 같아서 더 괘씸해지네.

"음? 긴의 친구 아닌가? 그래, 엘드미아. 엘드미아 에가였지?"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도착한 가게에 도착해 혹여라도 발쿤 씨가 지난번 그 자리에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던 찰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난번에 만났던 가게 내부 대장간 입구 앞에서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발쿤 씨가 날 먼저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긴이 없군? 방어구라도 알아보러 왔나?"

자신이 판 물건에 벌써 문제가 생겼을리 없다는 저 자신감에서 나오는 말을 보라. 저 정도는 해야 드워프라고 할 수 있지.

"굉장히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발쿤 씨. 솔직히 기억 못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이거나, 투철한 직업 정신의 소유자인가 싶었는데 의외로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단순했다.

"허헛. 자네 덩치만 봐도 잊기 힘든데 간만에 얼굴을 보인 긴이 데려오기까지 했으니 잊을 수가 없지. 그래, 오늘은 어쩐 일인가?"

"감사 인사를 드릴 겸 혹시 몰라 장비 상태도 확인 받으려고 왔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거든요."

"호오? 그거 자세히 좀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매우 흥미로운데."

개쩌는 장비로 신인 살리기라는 기가 막히게 숭고한 취미의 소유자답게 아무래도 자신의 무기가 멀쩡히 활약한 이야기에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지만 사실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아 그에게 말해 줄 수 있는 내용은 별거 없다시피 했다.

'좆같은 저주에 걸린 놈 모가지 따는데 당신 검이 마력과 상성이 좋아서 어찌저찌 신기술을 써서 죽일 수 있었습니다.' 같은 걸 어떻게 말해.

결국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던 이야기는 적당히 검으로 마법을 좀 많이 막았는데도 멀쩡했다는 식의 내용이 고작이었다. 어차피 공격 마법이나 그냥 마력이나 검에 부하를 주는 건 비슷하니 크게 틀린 말도 아니고.

다행히 발쿤은 그 별 거 아닌 내용보다 내가 진심으로 도움 받았다고 여기는 부분에 기뻐하는 듯 했다.

"허허헛. 좋구만! 내 검이 활약했다는 것도 좋고, 그걸 또 이렇게 인사하겠다고 굳이 와서 알려주는 자네도 참 마음에 들어!"

"생명의 은인과 다를 바 없는데 당연하죠."

"허허허. 매우 깨어있는 사상을 가진 전사였구만! 젊은 친구 자세가 아주 바람직 해! 이리 줘보게! 내 당장 상태를 봐주겠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순식간에 하이 텐션이 된 발쿤 씨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검을 받아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마법과 연금술을 병행한다던 드워프 무구를 살피는 과정이 대체 어떤 모습인지 참관할 기회가 생겼다.

검을 받아든 발쿤 씨가 날에 손을 얹고 30초 정도를 가만히 있었을까?

갑자기 칼날이 수은처럼 일렁이며 형태를 잃어버렸다!

"세상에, 마법과 연금술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인데요?"

"마법사 친구도 있나보구먼? 처음 보는 전사들은 무기가 박살 났다고 난리법석을 떨지."

껄껄 웃으며 울렁거리는 칼날이었던 것을 살펴보는 발쿤 씨의 눈매는 한없이 진지하다.

"그런데 이러면 드워프 장인분들께 맡기기만 해도 수리 걱정은 없는 거 아닙니까?"

"흠... 일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할 일이 별로 없어서 잘 이해가 될지 모르겠네만, 이건 굳이 따지면 이 검이 갖추고 있는 마나의 형태라네. 굳이 비유하자면 사람의 영혼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단번에 이해가 되네요. 그러면 결국 수리는 영혼이 아닌 몸을 고쳐야하는 거니 이 과정으로는 마법과 관련된 부분만 고칠 수 있겠군요."

"정확하네. 반대로 장비에 부여한 마법적인 부분은 이 방식으로만 고칠 수 있지. 설계 회로라고 부르는 건데 어차피 일반인에겐 별로 중요하진 않다네."

순간 저 기술이 있으면 적이 드워프제 장비를 가지고 있다는 조건 하에서 장비 파괴를 밥 먹듯이 할 수 있지 않나 싶었지만, 발쿤 씨 정도 되는 장인조차 30초나 예열이 필요한 거 보면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거 같다.

"얼레? 니가 어쩐 일로 이런 데서 기술을 다 펼치고 있냐?"

보기만 해도 마냥 재밌는 모습에 넋을 잃고 구경을 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뒤에서 묘하게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왠 젊은 난쟁이 하나가 껄렁껄렁한 자세로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가게를 지나 대장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모험가가 분명한 무장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신지 않은 털이 수북한 맨발은 그가 전혀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실리에에게 이야기로만 들었던, 지구의 몇몇 판타지 설정에서 하플링이라고 불리던 종족이다.

"뭘 봐? 하프풋 처음 봐?"

당연히 인간의 반 크기라고 해서 붙은 저 하프풋이라는 호칭은 순전히 인간의 관점에 불과한 호칭이기에 매우 실례되는 종족 차별적인 발언이지.

"정확히는 스스로를 하프풋이라고 칭하는 풀링을 처음 보긴 했습니다."

아실리에에게 우수한 교육을 받은 내가 그런 차별 발언을 할 수는 없었기에 적당히 둘러대자 그는 갑자기 정색하며 양손을 뽑아 매우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네며 허리를 숙였다.

"이거 배우신 분이었군요. 워낙 세상에 못 배워 먹은 놈들이 많아서 제가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야이 땅딸보야! 이런 귀인이 와 계셨으면 임마 가게 앞에다가 팻말이라도 걸어 놨어야지!"

"꼬맹이놈 또 오자마자 지랄났군."

그런 그의 태도는 퍽 유쾌한 편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발쿤 씨는 눈을 흘기며 혀를 찰 뿐이었다.

"어어? 저거 저거 밖에 요상한 병신들이 간 보고 있길래 뭔 일 생겼나 걱정돼서 들어온 친구한테 지랄? 지이라아알?"

"밖에 뭐가 있어?"

"있던데? 지들이 완전히 일반인으로 위장했다고 믿는 병신 머저리 인간 넷. 이야, 난 또 그 놈들 눈깔에서 나오는 안광으로 용광로에 불 붙이는 줄 알았지 뭐냐."

양손을 눈앞에 두며 손가락을 파르르르 움직이는 건 불꽃을 형상화 한 것일까. 역시 꽤나 유쾌한 남자였다. 하지만 말한 내용은 유쾌하지 않네.

"아, 저 때문에 있는 겁니다. 이거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켰군요."

신기한 광경에 잠깐 정신이 팔려 뒤로 미뤄놨던 고민거리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군. 그러자 풀링 남성이 매우 희한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의문을 제기해 왔다.

"귀인이? 아차! 저는 그림자 발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가명인데 뭐, 남들에게 이름처럼 말하고 다닌지 오래되어서 이젠 이름과 다를 바 없으니 그러려니 해주시면 좋겠군요!"

"반갑습니다 그림자 발. 저는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이름이 아닌 호칭으로 부를 수 있는 건 풀링들 사이에서 굉장한 명예라고 들었습니다. 실력이 뛰어난 척후이신가보군요."

"세상에! 땅딸보야! 용이시다! 귀인의 현명함을 보아하니 용이 현신하셨어!"

역시 아실리에의 교육은 피가 되고 살이 된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종아리를 탕탕 치는 모습은 영락없이 기특한 아이를 대하는 어른의 모습이다. 그런 행동이 딱히 새롭지는 않은 모양인지 발쿤 씨는 혀를 차면서도 내 검을 살피는 것에 집중하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뭐! 농담은 여기까지 한다 쳐도 참 보기 드문 친구네! 아주 유쾌한 만남이야! 오늘따라 이곳으로 향한 내 발이 사랑스럽기 그지없군! 항상 그랬지만! 으하하하!"

"저도 살면서 풀링을 직접 뵙는 건 처음이라 이 새로운 만남이 매우 유쾌하군요. 모두 그림자 발처럼 유쾌한 분들입니까?"

"풀링이 죄다 저랬으면 마족놈들도 역겨워서 지들 영토로 돌아갔지."

발쿤 씨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닌 거 같군. 하지만 정신나간 하이 텐션의 그림자 발은 그저 웃을 뿐이다.

"그런데 저 치들을 암만 좋게 봐줘도 우호적이지 않던데? 꼬라지도 그냥 깡패들은 아닌 거 같고."

"정확하십니다. 죄다 잡아서 족쳐야 하는 것들인데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그냥 뒤에 달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족쳐? 저 넷을?"

"하하. 겨우 넷으로 누구 코에 붙이겠습니까. 본거지를 털어야죠."

"으하하하하! 호쾌하네! 생긴 것처럼 사나이답구만! 도와줄게!"

"하하하...예?"

나도 모르게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어보자 그림자 발은 내 무릎을 찰싹 때리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도와 준다고! 내 살다가 이렇게 유쾌한 인간 친구 만난 것도 손에 꼽는데, 저 땅딸보가 거리낌 없이 기술까지 보여 주며 무기를 봐줄 정도면 에가 씨도 꽤나 유쾌한 삶의 소유자 같거든! 도와줄게! 저것들 적당히 뒤를 캐면 될 거 아냐? 재밌겠네!"

"저거 또 시작이네."

세상에.

이 남자, 텐션과 전개를 따라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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