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너 내가 보샤 백작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설명했는데. 어떻게 알았냐?"
"루빌라 남작의 말을 듣고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철문에 맞아 기절한 놈이 사실 기절이 아니라 죽은 놈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유일한 생존자인 메타몽녀, 이하 몽순이를 데리고 나와 대충 철문을 다시 세워 맞추며 물어보자 의외로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는 몽순이었다.
"내가 그냥 단순히 미친놈일 수도 있잖아?"
"전 오늘 엘드미아 님을 미행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목걸이에 반사되는 풍경으로 감시를 확인할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 단순한 광인이라고 믿기엔 무리가 있죠."
"뭐야, 그걸 눈치챘다고?"
"다른 이들과 달리 저는 전문가니까요."
허어. 그런데도 그냥 주변 수준에 맞춰서 놀고 있었다는 건가? 그건 또 그거대로 어이가 없네.
하지만 진짜 미친놈은 냉철한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 보아하니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구만.
"그 계약이라는 건 상당히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면 여러모로 허점 투성이인가 보네?"
"맞습니다. 교단의 방침이며, 교단에 의뢰하는 모든 의뢰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책 한 권짜리 가이드 북이라도 만들어 주지 않는 이상 안심하고 고용하는 게 가능한가 싶으면서도 마음대로 얼굴을 바꿀 수 있다는 건 분명 매력적인 요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단원을 고용하려면 얼마나 드는데?"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거야 누가 더 의뢰 성공률이 높은가에 따라 차이는 나겠지. 기본 가격은 있을 거 아냐?"
"아뇨. 의뢰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창고처럼 쌓여 있던 입구의 물건들을 쓰러뜨리며 통로를 막아 버린 뒤 건물을 벗어나는 와중에도 꾸준히 협조적으로 행동하며 몽순이는 말을 이었다.
"저희는 일의 경중을 의뢰인의 가치로 판단합니다. 고용 비용은 거기에 맞춰 조율되죠."
"가치? 그럼 왕이 고용하면 더 싸게 고용할 수 있고 그런 건가?"
"속세에서의 권세가 아닌 신탁을 통해 가치를 판단합니다."
"아니 미친 그럼 신께서 직접 얜 얼마짜리 인간이다 하고 알려 준다는 소리야?"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표정 관리도 못할 정도로 당황해서 물었더니 몽순이가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어쭈? 웃어? 심지어 웃는 포인트조차 알 수 없는 구간에서?
"픕,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신탁이라는 게 워낙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 많기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의뢰인이 하고자 하는 일과 의뢰인을 사이에 두고 그게 과연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의뢰인의 능력 밖의 문제인지 아닌지를 평가받는 것입니다."
"난 또 돈에 민감한 신이신 줄 알았네."
"세상 그런 신이 어디에 계신단 말입니까. 돈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도 아니거늘."
"그러게나 말이다."
상업의 신도 돈 자체가 아닌 거래라는 행위 자체에 의의를 두는 편이긴 하지. 그런 설명을 듣고 나니 자꾸만 몽순이한테 의문이 생겨난다.
"그럼 아까 네가 말했던 목숨까지 구매하는 가격은 더 높다는 거. 대체 보샤 백작의 가치는 어땠길래 그걸 포기하고 일반적인 가격으로 널 고용한 건지 혹시 알아?"
"물론입니다. 신탁은 누군가를 거치는 게 아니라 의뢰를 수행하는 이가 직접 받는 것이니까요. 그의 가치는 제가 매겼습니다."
"얼마였는데?"
"그가 지불해야 했던 제 목숨 값은 상단 교역 금화 50개입니다."
몽순이의 대답을 듣고 걸음을 멈추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 인내심은 박수의 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일반 금화 100개 값이라는 소리잖아?
"너희의 교리를 의심하지 않기에 물어보는 건데, 진짜로 그런 목숨값을 지불하고 너희를 고용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냐?"
"말씀드렸다시피 사람에 따라 다른 법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은화 두 개만으로도 목숨을 걸기도 하죠."
무슨 가격 차이가 고무줄 마냥 제멋대로 늘어난다. 합리적인 가격이라면 아예 내가 다시 고용하는 거로 변수라도 좀 줄여볼까 했는데 엄두도 안나네 이거.
아찔한 가격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더니 마치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몽순이가 말한다.
"엘드미아 님이 당장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역으로 생각하시죠. 교역 금화 50개의 가치가 있는 목숨을 거두지 않고 살려주셨으니, 저 역시 그에 합당한 자세로 협력할 것입니다."
쟤네 교리대로라면 값어치가 다르기야 하겠지만 말이라도 저렇게 하니 나름 살려놓은 보람은 있네.
그렇게 몽순이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에카프 경이 돌아왔나 확인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긴급 회의로 철야라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기에 난 일단 셰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몽순이의 신병을 넘기기로 했다.
"꿈을 섬기는 자라니, 대체 뭘 어떻게 하면 한평생 만나 보기 힘든 이들을 자꾸 데려오는 거지?"
"만나기 힘들어?"
"너도 그녀가 부여받은 권능을 봤다며? 그런 게 흔할 리 없지."
들어 보니 성녀보다는 급이 낮지만 그들의 교단 내에서는 그 정도 대우를 받는다고 하더라.
한 세대에 많이 나와봤자 4명 정도가 고작이라고 하는데 보샤 그놈은 대체 어디서 이런 애를 구해 온 건지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아무튼 지금은 바빠서 여유가 없으니 너한테 좀 부탁할게. 나랑 아실리에는 이제 노예 상단 박살 내러 가야지."
"원래는 내일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는데, 얘 이야기 좀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당장 쳐도 문제없을 거 같아."
원래 계획으로는 보샤 백작이 재판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 순차적으로 놈의 손이 닿은 불법 사업장들을 가능한 만큼 싹 다 털 생각이었다.
재판이 열리는 동안은 외부에서 새로운 사람이 들어갈 수도, 참석한 사람이 나올 수도 없는 것을 이용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놈의 대응을 미루기 위해 생각한 계획이었지.
하지만 몽순이 덕분에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
나흘에 한 번 보고를 하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배불뚝이 남작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른 공모자들과의 환담을 가질 때도 종종 언급되었던 만큼 확실합니다. 보샤 백작의 부하들은 모두 같은 날 그에게 보고서를 올립니다."
때마침 몽순이가 보샤 백작에게 보고를 올린 게 어제라고 하니, 나만 잘 움직인다면 남은 나흘 간 놈이 눈치챌 걱정 없이 풀로 뛰어다니며 아주 개작살을 낼 수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맺어왔던 기나긴 악연을 이렇게 정리하게 되는구나."
주체할 수 없는 유쾌함에 미소를 짓고 있자하니 이미 채비를 마친 아실리에도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되게 즐거워 보이네 엘디."
"당연하지. 보샤라는 놈 얼굴을 몰라도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황망해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해."
"후후후. 엘디가 좋다니 나도 좋네."
심지어 역모를 꾸미고 있었으니 모아 놓은 부하들도 좀 있을 거 아냐?
안 그래도 부대 단위의 적들을 상대하는 연습도 필요하다고 느끼던 찰나에 잘됐다.
그 병력과 자원이 시체와 잿더미로 대체 되는 꼴을 보여주마.
◈
가장 가까운 곳부터 알려달라 했을 때 지크멜이 왜 노예 상인 놈들부터 알려줬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유랑극단인 줄 알았던 저 천막들이 죄다 빌어먹을 노예 상인 놈들이었다 이거지?"
수도에서 1년 반이 넘게 지내면서 모험가 일도 많이 한 나였기에 수도를 두르고 있는 외벽 밖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당연히 얼추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근데 아니었네? 진짜 거짓말 안하고 내가 영화에서 보던 서커스 천막과 똑같이 생긴 것들이 인권유린의 현장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쩐지 위치가 참 미묘하다 싶더니 나름 대가리를 굴린 위치 선정이었구만."
닦아진 대로에서 묘하게 가까운 듯 하면서도 수도와는 거리가 있고, 그러면서도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는 곳과는 멀다보니 적절하게 경비만 세워두면 안전한 위치. 그러면서도 수도 정찰대의 순찰 루트를 의미하는 깃발 범위 밖인 위치.
순찰도 잘 안 오고 손님이 오기엔 편하고, 몬스터나 도적놈들로 귀찮을 걱정도 없는 그런 위치에 알박기를 하고 있었다. 적당한 언덕에 자리 잡고 그 광경을 보고 있자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옆에 있던 아실리에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낀 듯 했다.
"후후. 이런 식의 습격도 정말 오랜만이네. 옛날 생각이 나."
"옛날 생각?"
"숲에 있을 땐 엘프 사냥꾼들과 정말 많이 부딪쳤으니까."
대체 얼마나 옛날인지 물어볼 뻔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칭찬받아 마땅한 내 인내심이 선을 지켰다.
"혹시 숙영지 배치나 그런 거에서 뭐 유사점은 없을까?"
"으음. 그런 건 안 보여.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낙관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해. 저들은 이곳에 노예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 팔러 온 거잖아? 심지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꽤 긴 시간 동안 해온 일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효율보단 외견에 치중된 형태로 배치 되어 있어."
엘프 사냥꾼의 숙영지는 언제 어디서 습격이 시작되더라도 즉각적으로 전체가 반응할 수 있게 끔 짜여져 있다는 게 아실리에의 설명이었다. 사각이 없도록 하기 위해 텐트도 굉장히 낮게 만들고 일정 간격을 두고 횃불과 모닥불을 지피는 걸로 시야를 확보하는 식이었던 것에 반해, 저놈들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분위기를 만든다고 해야 하나? 나도 이건 옛날에 어떤 상인한테 들은 이야기였는데, 물건을 살 마음이 아예 없던 사람도 특정 조건을 만족 시킬 수 있다면 구매 욕구가 올라가고 그런다더라."
결코 합법적이지 않은 행동을 당당하게 할 수 있다는 배덕감을 자극하기 위해 밤에 장을 열고,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를 연출함과 동시에 손님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거니는 길은 깔끔하고 화려하게 치장해 놓는다. 반대로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의도적으로 광원을 줄이고 인기척도 줄인다.
당연히 어두운 영역에서 기습이 일어나면 연계가 될 리 없다.
"역시 기습은 언제나 옳은 법이지."
"지당하신 말씀. 겉멋만 든 기사들하고 달리 엘디는 똑똑하다니까."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뒤꿈치를 들어 올리는 아실리에에게 맞춰 허리를 숙이면서 점점 텐션이 오르는 것을 만끽한다.
지금까지의 돈벌이에는 효과적인 연출이었겠지만 오늘은 거꾸로 놈들의 목을 죄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찌 유쾌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로 인해 오늘 밤 노예들은 자유를 되찾고 노예 상인 놈들의 영혼은 육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을 생각하니 온몸의 근육들이 알아서 펌핑되는 기분이다.
"생각하니 진짜 즐겁네. 저 손님이라는 놈들은 오늘 선불로 지급하고 내일 노예가 올 것이라 믿으면서 집에 갈 거 아냐?"
"그렇겠지. 상인들은 다 죽고 노예들은 자유가 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기대감 속에서 침대에 눕지 않을까?"
거기까지 상상한 우리들은 하하호호 웃으면서 다가올 놈들의 불행에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역시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는 법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