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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27화 (127/412)

딱히 시야를 가리는 것도 없는 넓은 평지에, 보이는 불빛이라고는 숙영지와 적지 않은 마차에 달린 등불이 전부였기에 놈들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늦은 시간까지 저 손님이라는 놈들이 남아 있는 탓에 우리는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풀이나 뜯고 있어야만 했다.

"저기 저 경계탑에 있는 횃불을 아래로 던지면 엘디가 적당히 처리 좀 해 줘."

"그럼 저거랑... 저 아래 천막에 있는 횃불 두 개까지 끄고 시작할게."

물론 정말 풀이나 뜯으며 빈둥거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숙영지 배치를 살펴보며 어디에 뭐가 있을지 예상하고, 놈들이 임시로 세워 놓은 경계탑을 점령하고 저격 포인트를 잡을 경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커버가 가능한지를 따져 보는 등 계획을 구체화하는 시간을 가지긴 했다.

대충 숙영 천막만 해도 10개는 되어 보이니 못해도 마흔 명 남짓한 규모일 것이다 라던가, 배치 상으로만 보면 어느 부분에 노예들을 가두고 있을 것이다 등등.

근데 그것도 몇십 분 정도지, 놈들의 장사가 우리의 예상보다 꽤 길게 이어진 탓에 결국 싸늘한 밤바람을 정령의 도움으로 이겨 내며 한 시간 정도를 더 살펴본 뒤에야 마지막 마차가 숙영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저게 마지막인 거 같네. 가자 누나."

목표는 단순하다. 문서화된 증거품들은 챙길 수 있을 만큼 싹 다 챙기고 노예들은 구출한다.

마음 같아서는 죄다 화공으로 정화해 버리면 좋겠지만 숙영지가 그래도 좀 온전히 남아 있어야 나중에 수도에서 파견될 사람들도 조사하기 수월할 거로 생각돼서 그건 참기로 했다.

굳이 서두르지는 않았다. 일과가 끝나고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지며 분위기가 풀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완전히 오늘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감이 숙영지를 지배할 때 즈음 치고 들어가 일상을 파괴해 줘야 노예 상인 놈들도 자기들이 저질러 왔던 업보의 일부를 체험하는 거 아니겠어?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마자 활시위를 당기는 아실리에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놈들의 목책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목책이라고는 해봤자 내 허리 정도까지 오는 높이의 울타리에 불과하다. 짐승이나 몬스터들을 막을 목적으로 뾰족하게 깎아 박은 말뚝이 사이사이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들 저 정도는 그냥 뛰어넘을 수 있다.

200미터는 될 법한 거리가 반 이상 줄어들기까지 5초도 걸리지 않는 운동 신경 앞에서 저 정도는 애들 장난에 불과하지. 심지어 제국에서의 사건 이후 유독 좋아진 마력 운용 덕분에 기존보다 움직임이 훨씬 가벼워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발걸음마저 가벼워져서 별다른 소리 없이 달려드는 나를 경계탑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던 용병으로 보이는 남자가 발견한 건, 그의 옆에 걸려 있는 횃불이 시야를 밝혀주는 영역까지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표정까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거리 속에서 확실하게 눈이 마주쳤지만, 그가 이변을 눈치챌 틈도 없이 아실리에의 화살이 날아와 목을 꿰뚫으며 그의 몸을 경계탑 기둥에 고정시켜 버렸다.

-텅!

무슨 대못이라도 박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체걸이가 되어 버린 화살을 신호 삼아 허들 경주 하듯 목책을 뛰어넘어 착지한 뒤 잠시 귀를 기울여 봤지만 무언가 경계하는 듯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세상 모르고 열심히 세수나 하고 있는 불쌍한 놈이 하나 보일 뿐. 하필 또 요란스럽기 그지없는 아저씨 세수를 시전하는 터라 방금 화살이 박히면서 난 소리조차 못 들은 거 같다.

"하필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구나."

"응? 누구..."

-서걱!

다른 때라면 좀 불쌍해서 정보나 캘 겸 살려 뒀겠지만 노예 상인과 한 패거리인 만큼 이번엔 자비 없이 검을 뽑아 목을 벴다.

어차피 다 죽이고 찾으면 되는 건데 뭐. 지들이 설마 중요 문서를 땅에 묻어 놨겠어?

바로 옆에 있는 천막 안을 들여다보니 두 놈 정도가 자고 있길래 깔끔하게 목을 쳐 낸 뒤 방금 전 세수하던 놈이 쓰던 물통을 이용해 천막 앞의 횃불을 끄자 내 뒤를 따라 아실리에도 숙영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엘디가 싸우는 건 처음 봤는데 정말 깔끔하구나? 사람 목 베는 게 결코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의외로 요령이 늘더라고. 아, 위에 있는 놈, 검 차고 있으면 그것도 좀 같이 던져줄래? 얜 씻느라 아무것도 없네."

"검? 단검 같은 것도?"

"있으면 좋지."

가만히 있는 사람의 목을 베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지구에 있을 때 얼핏 주워듣긴 했지만 마력과 함께 철저하게 단련된 육체 앞에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법이지. 다람쥐가 나무를 타는 것처럼 순식간에 경계탑에 올라선 아실리에가 아래로 떨어트린 횃불마저 물통에 넣어 처리한 뒤 잠깐 기다리고 있자 단검 두 자루와 숏소드 한 자루가 혁대 째로 떨어졌다.

대충 살펴본 것만으로도 그리 좋은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날이 나가거나 관리가 안 된 건 아니라서 적당히 어깨에 둘러매고 최대한 허리를 숙인 채 인기척에 유의하며 빛이 들지 않는 장소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심을 해도 거대한 내 몸뚱이 때문에 심리적 안정감을 얻긴 힘들었다. 기습 숭배자답게 잠입이 정서적으로는 궁합이 잘 맞는데 육체적으로 맞질 않으니 갑자기 슬퍼지네 이거.

"하, 이 짓거리도 이제 며칠 안 남았구나."

"이번엔 한 일주일은 쉬게 해준다고 했던가?"

"그랬었지. 추가금도 두둑이 준다고 했으니 난 사흘은 빡촌에서 살련다."

일단 손에 닿는 천막은 하나하나 다 확인하며 지나온 터라 이번에도 아무 생각 없이 들추려고 했던 천막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새끼. 언제까지 이 일로 먹고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냐? 성실하게 돈을 모아 임마."

"지랄하네. 앞으로 10년은 더 해 먹고 살 거다. 이렇게 수입이 짭짤한데 빡촌에서 좀 쓰는 걸로 티가 나겠냐?"

"대장이 상품 쓰라고 줄 땐 뭐 하고 굳이 빡촌에다 돈을 쓰냐. 존나 이해를 못하겠네."

"노예하고 그짓 하느니 그냥 자르고 만다."

"진짜 이해 못 할 놈이라니까."

들리는 목소리는 셋. 이제야 천막 안에서 등불이 켜지는 것으로 보아하니 정말 간발의 차로 안 겹쳤군. 등불에 비춰진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보아하니 이제 막 장비를 풀고 환복 하는 거 같다.

세 놈을 동시에 조용히 잡으려면 아무리 봐도 지금이 기회인지라 돌아다니는 놈들이 없는 지 확인한 뒤 그대로 양손에 단검 하나씩 꺼내 들고 천막 입구로 당당히 들어섰다.

"응? 뭐야?"

"오늘은 근무 없는... 넌 누구냐?"

세 놈이 각자 따로 놀며 단검 던지기 딱 좋은 각도로 서 있는 걸 보면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이다. 이제 막 가죽 갑옷을 벗던 두 놈의 미간을 향해 단검을 집어던지고는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마지막 녀석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뒤통수를 팔꿈치로 후려치는 것으로 천막 안은 싱겁게 정리 되었다.

-우득!

"억!"

"어랍쇼."

마지막 놈이 죽은 것만 제외하면 말이지.

투검술에도 자신이 있는 만큼 두 놈이 죽는 건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팔꿈치 한 방에 목 뼈가 부러져 죽을 건 예상 못 했는데...

"알게 모르게 위력도 오른 건가...?"

느낌상 경추 한 개 정도는 아예 박살이 난 거 같다.

솔직히 이번엔 노예들 위치라도 알아보고 죽일 생각이었기에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별수 있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적당히 놈들의 주머니와 무기만 털고 등불을 껐다.

어차피 밤은 길다.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찾을 수 있겠지.

경계탑 위에 올라서자마자 다른 탑에 있는 보초들을 파악하고 저격을 마친 아실리에는 엘드미아의 동선을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건 딱히 가르친 적 없는데 묘하게 능숙하다.

심지어 순조롭다.

"얘가 모험가 일이 아니라 암살 의뢰를 받으면서 지낸 건가...?"

결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의문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엘드미아의 행동은 깔끔했다. 능숙하게 불을 끄고, 좀 먼 거리에서의 움직임도 소리에 신경 쓰며 움직이는 건지 확실하게 인지한다.

일말의 주저 없이 이어지는 신속한 행동 속에서 벌써 네 번째 천막을 처리한 그였기에 이젠 엄호조차 필요 없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아실리에였다.

그동안 그가 직접 싸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기에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 거라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의외로 덤덤한 자신에게 새삼 놀라면서, 아실리에는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다른 경계탑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이미 숙영지에 있는 인원 중 절반 가까이 해치운 상황이었지만, 방심은 금물이었기에.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내려와 이동하는 숙영지는 엘드미아가 한바탕 훑고 지나갔기에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거라고는 미세하게 올라오는 피 냄새 뿐.

하지만 그 속에서 아실리에가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아직 15살에 불과한 엘드미아가 이 정도까지 다방면으로 능숙하다는 건, 그의 복수를 무사히 달성할 가능성도 높다는 의미였으니까.

묘한 고양감 속에서 남은 적들도 이렇게 깔끔히 해결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두 번째 경계탑에 올라서서 엘드미아의 위치를 확인한 순간.

"꺄아아아악!"

숙영지에 내려앉았던 정적을 찢어내며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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