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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31화 (131/412)

녀석들이 손님이라는 인간들에게 받은 대금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굳이 기절한 놈을 다시 깨울 필요는 없었다.

결국 이 비밀 공간이 가장 안전했던 것인지 금고도 함께 비치되어 있었거든. 언제든지 쓰기 편하게 돈주머니까지 같이 옆에 놓여 있어서 금고의 잠금장치를 박살 내고 거기에 같이 넣고 어깨에 들쳐매자 상당한 무게가 느껴졌다.

마력이 없었으면 이렇게 들고 갈 엄두도 못냈을 철제 금고지만 지금의 나에겐 대충 쌀포대 정도에 불과한 무게라서 큰 부담은 없다.

그렇게 한쪽 어깨엔 금고를 들쳐 매고 반대편 옆구리에는 노예상 놈을 끼운 채 비밀 공간에서 벗어난 우리가 붙잡혀 있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격한 반응이 우리를 맞이했다.

"영웅님! 이제 이곳에서 나가도 되는 건가요?"

"저희는 이제 자유인 겁니까?"

"그 빌어먹을 놈은 당연히 처벌을 받는 거죠?"

뭐, 그 말의 대부분이 자기들을 구해 준 우리를 향한 감사와 거리가 멀었지만 어차피 그런 걸 기대한 것도 아니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아까 내가 나갔을 때랑 지금이랑 머릿수가 똑같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쳐주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데 복작거리면서 자기들 할 말만 하고 싶어 하는 건 받아줄 수 없지. 난 일부러 금고를 대충 바닥에 던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쿠웅! 쇳덩이와 금화로 이루어진 금고는 내 키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침묵을 흐르게 만들기 충분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노예상 놈은 적당히 살살 내려 놓으면서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가 된 대중들에게 나는 점잖은 태도로 말했다.

"노예상 놈들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합니다만 아직 처리할 게 남았습니다. 이티스엘 왕국 법에 의거해 불법적인 활동을 한 노예상의 재산은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으로 지급하게 되어있죠."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금고 문짝을 발로 열어 개방한 뒤 내부에 들어 있는 금화를 보여 주며 그들을 훑어보았다.

"저희는 딱히 합법적으로 놈들을 처단한 건 아닙니다. 그래서 법정까지 가서 여러분들의 억울함을 해결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대신 이 금고에 들어 있는 재산이라도 법대로 분배하고자 합니다."

원래 그 재산이라 함은 단순 금고 안의 돈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해당 노예상이 보유한 모든 자산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내가 지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금고에 들어 있는 금화만 나누더라도 한 사람당 금화 여섯 개씩은 충분히 가져갈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이 정도 금액이면 이들도 아무런 불만 없이 납득하기에 충분한 양이다.

평범하게 지내면 최소한 몇 년은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테니까.

"일방적 통보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혹여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싶으신 분 계십니까?"

일부러 그다지 살갑지만은 않은 딱딱한 어조로 말한 게 효과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내 말을 잘 따라줬던 사람들인 만큼 이번에도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건지 몰라도 이견은 없기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로 금고를 쏟아붓고 그 위에 앉아 널브러진 금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상당히 길고 지루한 작업임에도 내가 돈을 분배하는 동안 붙잡혀 있던 사람들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일부는 여기까지 와서도 불신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고, 일부는 기대어린 시선을 보냈으며 일부는 무슨 생각인지 알기 힘든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날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구체적인 액수를 모르는 상태로 일단 10개씩 금화를 쌓아 나누고 나니 한 명 당 금화 8개라는 엄청난 거금이 담긴 주머니 24개가 완성되었다.

대체 노예라는 게 어떤 가격에 거래되길래 이렇게나 많은 금화가 쌓여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다보면 나름 납득이 간다.

선남 선녀이거나 이티스엘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수인들. 이들을 고객의 주문에 맞춰 일일이 찾아다니며 잡아 왔다면 분명 엄청난 금액을 요구 할 만하다.

"이제 한 분씩 오셔서 받아가시죠."

같은 철장 동료들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누구 하나 서두르거나 욕심을 부리는 일 없이 각자 하나씩 주머니를 들게 된 이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나는 작별을 고했다.

"부디 여러분들이 고향으로 혹은 원하시는 곳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 돈으로 다른 무언가를 하신다 하더라도 잘되길 기원하죠."

"이, 이걸로 끝인가요?"

"음? 뭔가 부족하십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정말 이제 집에 갈 수 있냐는 의미였습니다! 부족할 리가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해 놓으면 봇짐 내놓으라는 게 사람 심리라고, 난 또 뭐 뒤늦은 트집이라도 잡으려는 줄 알았네.

"물론입니다. 밤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부터 움직이셔야 안전하겠지만 이제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집이 너무 멀거나 가는 길이 불안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금화 정도면 분명 해결할 수 있겠지요."

애당초 노예가 아닌 이들이라서 노예 문서나 낙인 같은 것도 없다. 노예상들도 다 죽은 마당에 문제 될 리 없지. 바로 옆은 수도니까 저 돈을 그대로 들고 가겠다는 식의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모험가 길드에 의뢰를 넣든 상인들과 협상을 하든 어떻게든 집에는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예상 속에서 내뱉은 나의 확답이 마치 법정 결론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머지는 여러분들의 양심에 맡길 뿐입니다. 그래도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인 만큼 여기서 타인의 돈을 뺏으려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목숨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 말이죠."

몇몇은 내 마지막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까부터 남들과 다른 눈치를 공유하던 수인들은 확실히 내 말을 이해한 거 같았다.

그나저나 실제로 보니 정말 신기하긴 하더라. 누구는 거의 동물처럼 생겼고 누구는 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편의성 좋게 귀랑 꼬리만 달리고 누구는 얼굴까지 살짝 동물을 닮는 등등 천차만별이더라고.

자기들끼리 뭉쳐 있는 건 아무래도 인간을 향한 강한 불신 때문이겠지. 나한테 돈주머니를 받아 갈 때조차 움찔거리며 경계했던 걸 보면 저들도 참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럼 이만. 밖은 시체가 많으니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조심하시길."

"이, 인간! 기다려라!"

내일의 일정도 있는 만큼 하루 종일 이들을 지켜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슬슬 자리를 벗어나려던 찰나 한 수인이 말을 걸어왔다.

딱 봐도 대체 저 덩치의 수인을 뭔 수로 잡아 왔는지 강한 의문이 들 정도로 탄탄한 근육을 지닌 동물형 남자 수인이었다. 대장이라던 놈이 나선건지 떼거리로 달려들어 다구리로 잡았는지 몰라도 결코 쉽지는 않았으리라.

어쩐지 첫 마디는 떼걸룩일 것만 같았던 고양이과 수인은 내가 별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뜨문 뜨문 입을 열었다.

"나 크룰 피탈리 바자소라고 한다. 친구들. 크룰이라고 부른다."

"좋지 못한 환경이지만 결과적으로 여러분에게 자유를 돌려줄 수 있었으니 좋은 만남이고 반갑다고 인사하겠습니다 크룰 피탈리 바자소. 저는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니다. 나 구해 준 인간 이름 알고 싶었다. 나 인간 말 익숙지 않다. 건방져 미안하다."

익숙하지 않은 것 치고 의사 전달은 확실해서 다행이구만. 그래도 수인들은 대륙 공용어가 익숙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이거나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산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지식이 늘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수인들의 언어는 아예 모르는걸요. 의미는 충분히 전달 됐습니다 크룰 피탈리 바자소."

"은인이다. 크룰이라 불러라. 아무것도 요구 안 하는 은인에게 감동했다. 좋은 수인만 있는 거 아니듯 나쁜 인간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알 수 있었다. 은혜 무조건 갚는다. 이거 받아줘라."

멀쩡히 대륙 공용어로 말할 수 있는 같은 사람들은 빈말로도 은혜 갚겠다는 말을 안 하는데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수인은 필사적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하고 있다니. 감격스럽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생에 처음으로 만난 수인이 대체 뭘 선물로 주려는건가 기대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자기 송곳니 하나를 아무 주저 없이 뽑아버렸다!

"에."

결코 짧지도, 작지도 않아서 말할 때 참 불편하겠구나 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저렇게 과감하게 뽑을 수 있는 물건인지도 몰랐다. 아니, 누가 그걸 예상할 수 있겠어?

그렇게 뽑은 송곳니를 자신의 옷에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열심히 닦은 뒤 양손으로 감싸고 뭐라 중얼중얼거리는 걸 일단 가만히 보고 있자 하니 뒤에서 아실리에가 조용히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이 사람, 일반적인 수인이 아니야"

혹여라도 수인이 들을까봐 평소보다도 작은 소리다.

"그럼?"

"주술사, 그러니까 부족의 마법 기사같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왜 잡혀?"

비유가 마법 기사라면 결코 약하지 않을텐데? 아무리 쪽수에는 장사가 없다한들 자기 한 몸 사리기엔 충분한 실력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볼모로 잡혀 있었을 거야. 주술은 강력하지만 준비가 오래 걸리거든. 무엇보다 생김새는 다양해도 수인들은 자기들끼리 유대감이 엄청 굳건한 편이라서 생각보다 흔히 있는 일이긴 해. 아예 얼굴도 모르는 수인이라도 일단 돕고 보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그거 참 굉장한 동질감을 소유하고 있는 종족일세. 마법 기사 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런 놈들한테 잡히는 것조차 납득할 수 있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순박하고 착한거야?

감탄을 넘어 내심 허탈하기까지 한 심정을 추스르는 사이 크룰의 손바닥 안에서 열심히 울리던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그쳤고, 그는 그제야 자신의 송곳니를 내게 건네주었다.

"표식이다. 수인들 이거 안다. 나쁘게 대하지 않는다. 인간 부족에서 나고 자란 수인 아니면 모두 은인 돕는다."

"감사...합니다 크룰. 생각도 못 한 선물이군요."

정말 여러모로 생각도 못 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크룰은 한쪽 송곳니가 빠진 채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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