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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32화 (132/412)

부족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사람들이 아무런 분쟁 없이 도시로 갈 수 있도록 지키겠다고 다짐한 크룰을 뒤로하며 나와 아실리에는 노예상을 들쳐메고 수도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놈들의 천막과 시체를 다 털어서 용돈이라도 벌고 싶었지만, 이미 일방적으로 습격까지 한 마당에 괜히 약탈이 목적이었다는 둥 명예도 모르는 놈이라는 둥 이상한 핑계가 따라올 일은 최대한 배제해야 할 거 같아서 눈물을 머금고 그냥 돌아왔다.

당연히 사람을 노예로 사고파는 새끼들에게 명예고 나발이고 있을 리 없지만 상대는 귀족이니까. 괜히 빌미를 줘봤자 죽여야 할 놈들만 늘어나는 거지.

귀가하는 동안 수인들의 이빨은 빠져도 손톱마냥 다시 자란다는 엄청난 사실을 비롯해 여러 이야기를 듣다 보니 수도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한밤중에 사람 하나 묶어서 들고 다니는 괴한을 발견한 경비병들이 의무를 다 하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긴 했지만 대충 범죄자 잡아 오는 길이라고 당당히 대하자 생각보다 스무스하게 넘어갔다. 이럴 때마다 과연 치안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참 알쏭달쏭 해.

그런 소소한 검문을 거치며 도착한 오가토르프 저택은 평소 같으면 이미 한참 전에 소등했을 시간임에도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뭔 일이래?"

기껏 선물들고 왔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다주지 않아 섭섭하려던 찰나에 눈에 들어온 것은 집사장님과 함께 있는 셰릴이었다.

"아, 엘드미아. 마침 잘 왔다. 네가 데려왔던 옌 티에를 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이송하려는 중이었거든."

"옌 티에? 그게 누구... 아, 몽순이 이름이 옌 티에야?"

"...정말 근본을 알 수 없는 기괴한 가명으로 부르고 있었군. 꿈을 섬기는 자를 이야기하는 게 맞다면, 그 자의 이름이 옌 티에다. 그보다 어깨의 그건 또 누구지?"

"노예 상인. 이건 증거 문서."

여전히 기절한 상태인 녀석과 이런저런 문서를 담은 가방을 함께 바닥에 내려 두자 셰릴 뿐만 아니라 집사장님 마저도 표정 관리를 못하고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세상에. 어떻게 납치해 온 건가?"

"다 죽이고 얘만 살려서 납치해 왔죠. 노예로 잡힌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이놈들이 모은 재산을 분배해 준 뒤 알아서 가게 내버려 뒀구요."

덤덤하게 진실을 전달하자 감탄을 금하지 못 하는 집사장님과 경악하는 셰릴이었다.

"다 죽였다고?"

"한 명도 빠짐없... 아, 누나. 마지막에 도망치던 애들도 다 죽었던가?"

"응."

"그렇다네. 그럼 한 명 빼고 다 죽은 게 맞겠다. 그 한 명이 얘고."

새로운 증거가 생겼으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셰릴은 묘하게 침착한 태도로 바닥에 널브러진 놈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엘드미아. 이건 당연히 엄청 큰 도움이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 많아질지도 몰라. 괜찮겠어?"

"뭔 감당?"

"...많은 귀족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는 거지."

나 없는 사이에 에카프 경한테 뭔가 전갈이라도 받았나?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반응의 셰릴이었지만 솔직히 헛웃음이 나왔다.

"틀렸어. 내가 걔들을 적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걔들이 날 적으로 돌린 거고, 감당은 내가 할 게 아니라 걔들이 해야지."

원래 가진 게 많은 놈들은 잃을 것도 많은 법이다. 웃으면서 한 대답이지만 그게 가벼운 농담과는 다르다는 걸 셰릴도 이해하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랑 죽이 잘 맞는 건 사실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납득한 그녀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발치에 쓰러져 있는 노예상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 녀석도 아버님이 계시는 곳으로 같이 이송하는 게 나을 거 같다. 넌 어떻게 할래?"

"거기가 어딘데?"

"왕실. 국왕 폐하께서 직접 이 일에 관여하신다. 내일 재판도 재판이지만 그와 별개로 많은 문제를 다루는 중이시라고 전갈이 왔다."

"사양할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다른 곳도 털어야 하거든."

왕실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떠오른 건 능글맞은 레스롬 공작이었다. 엮여서 좋은 결과를 얻고도 찜찜한 인물.

내가 가 봤자 머리만 아프고 잠만 못 잘 뿐, 이미 왕이 나서는데 거기 가서 뭘 하겠어?

"하지만 이번 기회에 네 공을 치하할 수도..."

"그건 나중에 다 정리되고 필요하면 주겠지. 오늘 하루 뛰어다니면서 보니까 이미 자기들끼리 뱃속에 들어 있는 구렁이들 꺼내 놓고 축제 벌이기 일보 직전인 거 같던데, 거기에 끼고 싶지 않다. 정치는 내가 관여할 영역이 아니더라고."

난 그냥 심플하게 나 건드린 놈 좆같게 만들기도 바쁘다. 이짓 저짓 다 하면서도 정식 서임을 피하고 에카프 경에게 직접 검술을 배우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일은 노예상이랑 협업하고 있던 도적들 치러 갈 거야. 또 뭐 있으면 가져올 테니까 연락할 수단은 저택에 남겨 둬."

복장만 봐도 셰릴이 마차를 타고 왕실로 향할 게 뻔했기에 나는 간단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녀를 뒤로한 채 저택으로 향했다.

"후후. 여전하네 엘디."

"응? 뭐가?"

그런 나와 셰릴의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아실리에가 웃으며 말했다.

"권력욕도, 물욕도 별로 없는 거 말이야. 보통 네 또래의 인간들은 그런 거에 욕심내기 마련이잖니?"

"딱히 욕심이 없는 건 아닌데."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이긴 하다는 게 내 지론 중 하나다. 그리고 권력 역시 마찬가지지. 내 편안한 판타지 라이프를 위해서라도 수도승처럼 아예 등지고 살 생각은 없다. 그저 지금은 방해에 불과해서 그런 거지.

"글쎄? 지금의 엘디가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으으으음... 가만히 있을 땐 평범한 미소년이지만 건드리면 미치는 미소년?"

"넌 정말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거니."

아니, 지금 나 좋다는 여자만 셋이 생겼는데 자신감만으로 신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지. 그래도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는 부끄러운 자신감의 원천이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자 아실리에는 본론과 이어지는 답을 말해주었다.

"아직 세간에 공표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번 사건만 정리되더라도 엘디는 영웅으로 알려지게 될 거야. 실제로 이미 네가 해 온 많은 일들이 동화 속 영웅의 이야기로 남아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인 건 알잖아?"

"솔직히 주변에 워낙 파란만장한 사람들이 많아서 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장 폐던전 파티의 구성원들만 놓고 보더라도 범상치 않다. 에스뮈에에 진짜 용사인 지크프리트에 왕국 아카데미 성적 카스트 최상층에 위치한 실전파 셰릴도 있지. 이러니저러니 하더라도 아실리에 역시 지식과 실력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나 정도면 그냥 나 건드리는 놈들 머리통 쪼개는 취미가 있는 평범한 일반 시민이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잘 생각해 보니 잘난 그들과 달리 못난 놈들은 더욱 지천에 널린 세상이다.

"음. 전언철회. 평범하진 않은 거 같네."

"그걸 말이라고 하니. 어느 평범한 사람이 제국 황녀한테 작업을 걸어."

"아니, 작업이라 말씀하시면 좀 많이 억울한데..."

하필 콕 집어서 말해도 그런 걸 말하네. 아실리에는 내 소소한 반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하나 같이 남들에게 자랑하지 못해 입이 간지러울 수준이잖아. 그런데도 자랑은커녕 굳이 입밖으로 안 꺼내니 욕심이 없는 게 아니면 뭐겠니?"

"그거야 다 원대한 계획의 일부에 불과한 거지."

"계획?"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실리에는 내가 계획이라고 할 만한 게 결국 복수와 관련된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딱히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에이, 나도 아예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들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모르진 않지. 누나도 알다시피 또래에 비해 나름 영특하잖아. 이번에 보샤 백작을 제대로 잡아서 반역자 놈들 뿌리 뽑고 재산 압류하는 과정에서 안 그래도 뒤숭숭한 민심 달랠 겸 얼굴마담으로 내세울 만한 인물 목록에 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겠어?"

전쟁도 장기화되는 마당에 반역의 조짐까지 있었다는 소식이 퍼지면 우울한 세상이 안 그래도 더 우울해지겠지. 그럴 때 영웅이라는 존재를 내세워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은 어디나 똑같다.

그러기 위한 영웅 후보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파바에라의 대사기극을 막은 것부터 시작해서 폐던전의 마족 그리고 에스뮈에의 구출까지 합치면 내가 그런 영웅 후보 목록에서 딱히 빠지거나 부족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거기서 당첨되는 순간부터 왕국 사정에 놀아나게 될 텐데 내가 뭐 좋다고 내가 한 일을 떠벌리고 다녀서 당첨 확률을 높이겠어."

그리고 그걸 핑계로 던져 주는 보상과 권력을 덥썩 무는 순간 뼛속까지 이용해 먹겠지.

내가 목적이 없는 놈이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어림도 없다.

"지금은 전부 방해 요소에 불과해. 그러니까 더 날뛰어서 그 목록에서 빠져야지. 부와 권력은 복수가 끝난 뒤의 이야기야."

내가 자발적으로 시간을 할애하는 계획의 일부면 모를까 남에게 휘둘리는 건 사양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짱박혀서 신경 건드리는 놈들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있을 수 없으니 아예 거하게 깽판을 쳐서 난장판이 되도록 유도한다.

분명 이득이긴 했는데 마냥 덮어놓고 칭찬하기엔 애매한 놈으로 인지될 수 있도록.

"그럼 에스뮈에는?"

"응?"

"왕국은 그렇게 무마한다고 해도 에스뮈에는 결코 네 업적을 덮어두고만 있진 않을 텐데?"

"그게 바로 제 완벽했던 계획에 생긴 예상치 못한 차질이긴 합니다. 미래의 제가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요."

"정말... 뭔가 치밀한가 싶다가도 허당이라니까."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내젓는 아실리에에게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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