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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33화 (133/412)

그저 한없이 피곤하다.

델트를 잃은 이후로 한순간도 편할 날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모든 계획에 초를 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재판소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깊은 피로감에 휩싸여 처리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을 되새김질 하던 엔벨데 다 보샤 백작은 이내 자신의 생각을 정정할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그렇지만도 않군. 일은 그 전부터 꼬여 왔던가."

이미 7년도 더 된 기억인지라 연관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 이보다 훨씬 암담한 실패도 겪긴 했었다.

수년 전 측근이 운영하던 대규모 노예 상단이 몰살 당했을 때도 한동안 이런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자연재해에 휩쓸린 것과 다를 바 없었던 최악의 실패.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겪은 실패 중 가장 최악을 떠올리고 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최소한 이번엔 아직 기회가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이겨낼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엘프 사냥꾼마저 별도로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자금원이었다.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심지어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범인을 찾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지면 어김없이 문제를 일으켜 축소되는 탓에 그때만큼의 유용성을 발휘하지 못하긴 하지만 노예 상단은 다시 운영되었고, 과거에 비할 바가 못될 뿐 충분히 큰 규모의 자금원이다.

불합리한 자연재해와도 같았던 그날을 결국은 이겨낸 것이다.

"아직은... 아직은 기회가 있다. 라그니스와 제국의 친교가 확실 시 된 건 아니니까."

레비엥 변경백. 영토만 수복된다면 마족령 침공의 선두에 설 명분과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위치이자 충분한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위치.

능력, 자금, 인재 모든 게 충분해도 공식적인 작위가 일반 백작에 불과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폐허가 되고 마족들의 손아귀로 넘어가 버린 레비엥으로 비밀리에 조사대를 파견해 기회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고, 꽤 많은 손실 끝에 라그니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보고를 받게 되었음에도 그녀와 비슷한 소녀를 찾아내기 위해 사람을 뿌렸다.

비록 결정적인 단서는 국왕파에 심어둔 첩자를 통해 들어오게 되었지만 엔벨데는 그간 들인 시간과 노력을 조금도 아까워 하지 않았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만약 델트가 무사히 라그니스를 데려와 허수아비로만 내세울 수 있다면 모든 일들이 한결 수월하게 해결될 수 있었다.

분명 그랬을 터였는데.

"백작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순간 어그러진 계획에 다시 한번 분노가 치솟을 뻔한 걸 겨우겨우 억누르며 엔벨데는 표정을 다잡았다.

이번 재판을 통해 또 한 번 타격을 입겠지만 라그니스가 제국과의 교두보가 되어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허울뿐인 변경백에서 벗어나 진짜가 되는 것보단 나았다. 패배가 뻔한 재판에 쓸 버림패도 딱히 아까울 것 없는 자다. 오히려 버림패가 가졌던 본연의 가치에 비해 훨씬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감정 조절을 마친 엔벨데가 문을 두드리자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재판소 앞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개중에는 자신을 알아보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이들도 있었고, 달갑지 않게 눈을 흘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엔벨데가 오늘 관심 있는 것은 라그니스 하나뿐이었다.

"왕실의 반응은?"

"밤을 새가며 이야기가 오고 갔으나 구체적인 이야기가 밖으로 흘러나오진 않았다고 합니다."

"흠."

시종과 이야기하며 라그니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진 귀족 자체가 흔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엔벨데는 다른 존재로 인해 라그니스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저 자가 엘드미아 에가인가."

"그렇습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용사를 이긴 자. 제국 1 황녀를 구한 자. 레비엥의 숨겨둔 칼. 그리고 바로 어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단두대라고 부르는 이들조차 나오기 시작한 소년.

솔직히 덩치만 놓고 보면 소년이라는 단어가 쉬이 입에 붙지는 않았다.

"라드넬반데스 경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덩치로군. 어떻게 지금까지 저렇게 눈에 띄는 놈을 숨기고 있을 수 있었던 거지?"

"모종의 이유로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지내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만, 종종 모험가 일도 했던 걸 보면 딱히 감출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사료 됩니다."

"용사마저 이기는 인물이... 모험가?"

저도 모르게 의문이 튀어나왔지만 시종은 그게 대답을 원하고 말한 게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 엔벨데 역시 그런 시종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라그니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 정도면 델트의 빈 자리도 충분히 채울 수 있었을 텐데. 어찌 저런 패가 라그니스 같은 꼬맹이 손에 들려 있는 것인지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것도 곧 방도가 생기리라. 언제나 해답을 찾아냈으니까.

"오랜만이로구나 라그니스."

"...오랜만에 뵙는군요 숙부님."

생각해 보면 수도로 그녀가 귀환한 뒤에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라그니스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과 별반 다를 거 없는 반응을 보이며 거리를 뒀다.

그 눈은 우습게도 죽은 형을 닮아 있었다.

"형님이 자식 교육은 잘 시키셨나보구나. 한결 같이 날 꺼려하는 것을 보면."

"아버님의 성격을 아시잖습니까."

"그래. 귀족파를 벌레 보듯이 했지."

사리사욕만을 챙긴다며 귀족파를 경멸했던 형. 왕실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을 맹세한 형. 그리고 결국 그 충성심에 보답받지 못하고 죽어 버린 형. 변경백이라는 입지를 절반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무능한 형.

결국 살아있을 때 그가 틀렸음을 증명하지는 못했으나,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재판 때문에 힘들 텐데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지. 그래, 이 자가 요즘 소문이 자자한 그 수행원이로구나."

"...네.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엘드미아? 이 분은 엔벨데 다 보샤 백작님이셔. 내 숙부님이시지."

생각보다 퍽 친근한 말투로군. 그런 감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려던 엔벨데는 생전 처음 본 반응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왜... 저렇게 고개를 옆으로 꺾으면서 웃는 거지?

"세상 참 좁단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보샤 백작님?"

"음? 우리가 구면이던가?"

그럴 리 없었다. 한 번도 접촉한 적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장신의 소년은 이까지 드러내고 웃는다.

"굳이 따지면 초면이죠. 하지만 알게 모르게 서로 엮인 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건 미소라기보다... 짐승의 위협에 가까웠다.

"델트의 시체는 잘 찾으셨습니까?"

엔벨데의 사고가 정지했다.

목까지 오는 장발을 적당히 뒤로 넘기고 턱수염이 멋들어지는 미중년.

보샤 백작의 첫인상은 그 정도였다. 파바에라 때도 그렇고 악당 놈들이 생긴 건 왜 이리 멀쩡한지 모르겠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진 터라 그거 찾는다고 너무 고생하지는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머리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을지도 모르겠군요. 높이를 생각하면 설령 근처에 떨어졌어도 형태조차 안 남았을 거 같긴 한데."

"네놈...이...!"

방금까지의 온화한 듯 무심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게 퍽 보기 좋다. 저 분노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레스롬 공작마저 탐냈던 델트라는 부하의 죽음 때문인 걸까?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퍽 유쾌한 만남이다.

"표정 관리 좀 하시지? 저도 그쪽이 좆 같은데 이렇게 웃고 있잖습니까. 웃어요. 웃으면 복이 온다더라고."

울상 지으며 얼굴 구기기엔 아직 너무 이른데 뭘 벌써부터 그러시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해주며 시범삼아 활짝 웃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보샤 백작은 웃음 비스무리한 것도 지어 보이지 못했다.

"아직 잃을 것도 많으신데 겨우 델트 하나로 그렇게 티가 나면 쓰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제가 병신도 아니고 그걸 왜 말해줍니까? 나중에 잃어버린 거 견적내서 보내보던가. 그 정도는 확인해서 제가 한 건 표시해 드릴게."

대체 왜 그렇게 라그니스를 가만히 못 내버려두나 했더니 가족이었다라.

성인식 이전이라면 뭐 대충 라그니스의 대리인이라는 명목으로 그녀의 입지를 입맛에 맞춰 이용해 먹으려 그랬겠거니 할 수 있겠는데, 지금은 왜 건드리는 걸까? 아예 대놓고 물어볼까 싶은 와중에 갑자기 보샤 백작이 고개를 내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웃어? 힘들 때 웃으면 일류라던데 이놈이 일류인건지, 아직 덜 힘든 건지 구분이 안 가네.

"대단한 배짱이군.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그러는 그쪽은 지금 살짝 맛이 간 거 같은데요? 웃으라고 말했지만 진짜 웃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인재를 허투루 쓰지 않는다. 어떤가? 지금이라도 나를 따르지 않겠나?"

녀석의 진중한 제안에 업무용 미소가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진짜 웃음이 터져 버렸다. 이 아저씨도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난 영화를 많이 봤으니 영화로 대답해주기로 했다.

"에이, 어떻게 늑대 새끼가 개 밑으로 들어갑니까."

웃음을 가장하고 있던 보샤 백작의 얼굴에 미세하게 경직이 일어난다.

"...돈도, 권력도. 라그니스보다 나를 따르는 게 이득일 텐데? 자네도 국왕파 얼간이들처럼 명예에 인생을 낭비하는 부류인가?"

"아무리 웃으면서 작게 말한다고 해도 단어 선택이 직설적이시네. 그런데 말이지? 그런 거에는 관심 없어. 중요한 건... 메시지야."

"메시지?"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메시지."

사람 성질은 다 건드려놓고 이제 와서 쓸모가 있을 거 같으니 포섭을 하려 들어?

"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고,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을 뿐이야. 남은 건 몰락뿐이지."

나는 보샤 백작을 향해 범차원적인 제스처 그 세 번째를 선보였다.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모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제스처 중에서 이만한 게 없지.

앞으로 내민 내 주먹 사이에서 홀로 우뚝 선 중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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