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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34화 (134/412)

본인 입으로 명예를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취급하고 있지만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먹는 욕은 맛이 색다를 거다.

귀족 모독죄? 이런 건 안 들키면 그만이지. 이미 각도와 시선 계산을 다 끝내서 선보인 심플한 손동작은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린 놈이... 오만방자하기 그지없구나...!"

"늙은 놈이... 오만방자하기 그지없구나...!"

예로부터 따라하기는 화를 돋구는데 최적화된 아니꼬운 행동이었다. 말하는 타이밍에 맞춰 정확하게 따라 말한 탓도 있겠지만 높으신 귀족 사회에서는 한 번도 당해 본 적 없을 놀림에 정신을 못 차리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보샤 백작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이놈...!"

왜 화를 내지?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암시하는 건가? 그래도 정치판 한가운데에서 작두 좀 타본 양반답게 언성을 높이지 않는 건 칭찬할 만하다.

"진짜 오만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 칼날은 신분 가리지 않고 쑤시고 들어가지만 왕관은 사람을 가려서 올라타거든. 자격이 없으면 모가지를 분질러버리지."

솔직히 사람은 누구나 칼에 찔리면 죽는다라는 생각으로 움직이는 놈과 자기가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놈을 놓고 누가 오만하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지 않겠어?

내 입에서 마치 그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던 것처럼 갑자기 그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왜? 그냥 칼 좀 쓸 줄 안다고 생각한 꼬맹이가 거기까지 예상한다는 게 놀라워? 겨우 그걸로 놀라도 되겠어요? 놀랄 일은 따로 있을 텐데?"

"무슨..."

"에스뮈에와의 연결점은 나야. 라그니스가 아니라."

나와의 대화가 적잖이 혼란스럽긴 한 것인지 보샤 백작의 표정은 또다시 의문이 가득하게 바뀌었다. 저 표정의 의미는 나도 알겠네. '에스뮈에가 누구길래 연결점을 운운하는 거지?'라는 느낌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 의문은 순식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번 재판에서 당신은 얻는 거 하나 없이 잃기만 하는 거라고."

맨날 1 황녀, 철혈 황녀라 부르거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제국의 하얀 별이네 뭐네 하다 보니 이름이 생소하긴 하지?

그 반응이 만족스러워서 옅은 미소에서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려, 썩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정신이 들어?"

"그런... 허언에... 휘둘릴 줄 아느냐...!"

당연히 휘둘릴 거라고 믿으니까 떠들었지. 용사도 이기고 황녀도 구한 사람이 직접 말한 걸 흘려 들을 수 있을 놈이었으면 라그니스가 오자마자 이딴 무리수도 안 뒀을 거니까.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판단이고. 나중에 몰랐다는 둥 뭐라는 둥 후회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언질이나 넣어드린 거니까. 그럼, 이제 갈 길 가시지?"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롱소드의 폼멜에 손을 얹었다. 명분도 없이 이 자리에서 벨 의도는 당연히 없다. 그저 적의라는 것을 확실하고 좀 더 치욕적으로 느끼길 바랐을 뿐이지.

다행히 보샤 백작은 내 의도대로 아주 치욕스러워했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댁은 후회할 틈조차 없을 것이고. 아, 무섭다 무서워. 기껏 집안에서 튀어나와 열심히 만든 가문이 하루아침에 왕국에서 사라지게 생겼구나. 인생무상이야. 그렇지?"

보샤 백작은 나를 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처음과는 전혀 다른 싸늘한 시선으로 라그니스를 흘겨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서 집 지키는 개를 잘도 주워 왔구나."

"그를 모욕..."

"아르르르 왈왈. 으르릉 크엉컹컹."

아니 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봐. 어차피 곧 인생 끝날 어르신 마지막 가시는 길에 웃음거리 하나 남겨드리려고 했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건 둘 다 똑같았지만 라그니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다시 보샤 백작을 향하며 예의 바른 몸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시길 보샤 백작. 그래도 숙부님이라 여겼으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할 테니 미리 여기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얘도 가끔 보면 세게 나온다니까. 라그니스는 보샤 백작의 반응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고, 나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래 봤자 곧 재판소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 조금 멀어진 정도에 불과했지만 보샤 백작도 우리와 반대로 걸어가 파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기에 거리는 꽤 벌어졌다.

거기까지 거리가 생기고 나자 묘한 표정으로 라그니스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지막에 그거 뭔데."

"곧 있으면 죽을 사람 웃긴 기억 하나는 남겨 주려고 그랬지."

"어이가 없어 진짜."

작게 웃음을 터트린 라그니스의 손이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농담을 통해 긴장이라도 풀어 줄 요량이었지만 여전히 그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네가 어제 알아낸 게 이거였나보네."

"정확히는 알아낸 것 중 하나지."

정말 귀신 같은 타이밍에 등장해서 그렇지, 그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내가 먼저 그녀를 노린 인물의 배후가 보샤 백작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놀랐겠지.

아무리 파벌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신을 노리던 인물의 끄트머리에 있는 게 아버지의 동생이라는 건 적잖은 충격일 거다.

"델트에게 납치됐을 때.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느꼈어. 그도 날 아는 듯이 대했었고.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숙... 보샤 백작의 측근이었다면 납득이 되네. 몇 번 정도는 볼 일이 있었을 테니까."

할 말이 많은 건지 없는 건지, 라그니스는 착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걸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그냥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른 건 몰라도 네 신변 걱정은 하지 마라. 아무 문제 없을 거니까."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는 라그니스는 그 벌써부터 지쳐 보였다. 마족만 상대해도 골치 아플 마당에 저딴 흉계나 꾸미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절로 기운이 빠지긴 하지.

그러니 더 기운이 빠지기 전에 빨리 박살 낼 수 있는 곳까지 박살 내야겠다고 다짐할 무렵 육중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엥... 데엥...

재판 준비를 알리는 예비 종소리. 나야 생소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은 익숙한 것인지 삼삼오오 모여 재판소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국왕파 사람들은 훨씬 먼저 들어가서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이 사람들은 전부 귀족파인 건가 싶어 좀 아니꼬와졌다.

라그니스도 당장 주변에 우군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주눅이 된 거 같아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배웅해주기로 했다.

"다녀와. 오늘은 오가토르프 저택에서 보자고. 유쾌한 엘드미아의 천방지축 모험담을 들려주지."

"풉. 그래, 나중에 봐."

재판은 며칠간 이어지겠지만 오늘 있을 재판만으로도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고 신변의 보호를 목적으로 구금소를 벗어나는 게 가능할 거 같다고, 새벽에 돌아온 셰릴이 알려 줬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경우 그녀를 모함한 세력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오가토르프 가문이 나설 것이라는 이야기도.

그때 보샤 백작의 자금줄이 추가로 박살 난 이야기를 해주면 라그니스의 기분도 조금은 나아지리라.

들어갈 사람들이 다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모습까지 본 뒤에 몸을 돌리자 어느새 아실리에가 와 있었다.

"이제 가 볼까 엘디?"

"응. 근데 굳이 자리를 피했어야 했어?"

"그럼. 우리가 아무리 합의를 봤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경쟁 상대인걸? 이런 자리에는 좋아하는 남자만 있어 주는 게 나은 거야."

경쟁 상대라고 하면서도 챙길 건 다 챙겨 주는 모습이 너무나도 감격스럽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생에 여자 복은 타고 난 게 분명하다는 확신 속에서 나와 아실리에는 가까운 숲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엘디. 저기 좀 봐."

"오, 지금 들어오나보네."

성문으로 다가가는 우리가 발견한 것은 어제 구해줬던 피해자들이었다. 넝마주이와 다를 바 없던 옷들이 아닌, 어제 죽은 노예 사냥꾼들의 옷과 장비로 갈아입은 그들은 수인들의 경호를 받으며 이제 막 도시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송곳니가 하나 없는 탓에 유독 눈에 띄는 크룰과 눈이 마주쳤다.

대화는 없었다. 그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내가 어제 말했던 걸 염두한 것인지 그저 웃으며 인사하듯 고개만 끄덕일 뿐 아는 척을 하려 들지는 않았다.

"다행이네. 도시에 별다른 문제없이 들어올 수 있어서."

그들을 뒤로하고 성문을 벗어나며 웃어 보이는 아실리에에게 나 역시 마찬가지로 웃어 보였다.

"그러게. 깔끔하게 죽인 보람이 있네."

내가 말하고도 사이코패스 같은 소리였지만 아무렴 어때. 죽어 마땅한 놈들 죽고 살아야 하는 사람 살렸으면 된 거지. 내 행동에 한 점 부끄럼도 없다.

그렇게 숲 언저리에 도착하자 아실리에가 내 손을 잡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숲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해 두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손 놓으면 안 된다? 숲의 정령들은 엘프를 돕는 거지 주변에 있는 엘프의 동료도 같이 돕네 뭐네 하는 개념이 없으니까."

"그 정령님들하고는 말이 안 통하려나?"

"으으음. 정령이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인 정령들과는 좀 다른 존재에 가깝다고 할까... 아마 말은 안 통할 거야. 우리도 대화를 한다기보다 의사를 전달하는 것에 불과하거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딱히 존재감이 느껴지지도 않아. 본능에 가까운 느낌?"

"그건 아쉽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숲에 들어섰지만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거나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열 걸음 정도 나아갔음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서 별생각 없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를 돌아본 나는 아실리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마터면 손을 놓을 뻔했다.

"와, 겨우 열 걸음인데?"

원래대로라면 아직 평원과 수도의 성벽이 보여야 하는 곳에, 오로지 숲만 존재했다.

"엘디. 제대로 앞을 봐야지. 놓치면 고생해."

"너무 신기한데 누나? 진짜 아무것도 안 느껴져."

"후후. 하나로 이어진 숲은 대부분 가능해. 물론 합당한 거래가 성사되어야 하는 거지만."

"숲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 그거?"

"대표적인 게 그런 거고, 가끔은 저들이 무언가 요구하는 걸 들어 주는 경우도 있고 그래."

신성력도 신기하고 마법도 신기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이런 현상은 더 신기하다. 세상에 이런 게 더 있다면 찾아다니면서 보고 싶을 정도로.

심지어 울창한 숲속인데도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아무런 불편함도 없는 여정 끝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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