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닿는 영역 내의 도적들을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간 놈들에게 쌓인 게 많은 건지 뭔지 몰라도 숲의 정령들은 정확 신속을 모토로 하는 택배기사처럼 핀 포인트로 우리들을 이동시켜 주었고, 그렇게 도착한 도적 소굴에서의 전투는 조금도 어려울 게 없었다.
그렇게 정확히 세 집단 정도를 박살 내고나니 돈만 챙겼음에도 주머니는 든든해지고 도적들은 씨가 마른 것처럼 사라졌다.
보샤 백작을 엿 먹일 뿐만 아니라 돈도 벌고 세상도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창조 경제 그 자체라서 매일 하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지."
그게 오늘 하루 만에 나버렸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마지막 도적 집단을 몰살 시키고 놈들의 돈주머니를 깔끔하게 회수한 뒤 은신처를 벗어나자 정령과 교감을 나누고 있던 아실리에가 말을 걸어왔다.
"얘들이 마지막이었나 봐. 지금은 마냥 행복해하기만 하고 다음 위치를 알려주지는 않네."
"그럼 이만 돌아갈 시간이로군."
놈들의 식료품 창고에서 찾은 육포를 뜯어먹으며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니 1시가 조금 안 된 상태였다. 이동 시간들을 제외하면 거의 30분 간격으로 산적 집단 하나를 박살 낸 수준이었다는 게 놀랍기 그지없다.
"정말 정령님들 만세야. 너무 고맙다고 좀 전해 줘 누나."
"말이 안 통할 뿐이지 네가 느끼는 감정 정도는 정령들도 느끼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이미 알고 있거든."
시체 투성이 폐허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간단하게 요기를 때운 우리가 다시금 정령의 도움을 받아 수도 언저리로 귀환한 건 대충 1시간 반 정도가 지난 뒤였다. 훅훅 이동하다 보니 잘 몰랐는데 처음에 갔을 때보다 거리가 상당히 늘어났었나보다.
구체적으로 재판이 언제 끝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없었기에 수도에 도착한 우리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재판소였다. 하지만 기대감 속에서 도착한 재판소는 마지막으로 봤던 것과 다를 바 없이 굳게 닫힌 문을 통해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렸고,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곳을 떠나야 했다.
"결과가 뻔한만큼 재판도 빨리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은가보네."
"인간들의 재판은 나도 잘 몰라서 뭐라 할 말이 없네. 귀족이니 또 이것저것 복잡하지 않을까 싶긴 해."
어중간한 싸구려 육포로 대충 끼니를 때운 터라 뭐라도 든든히 먹고 들어갈까 싶기도 했지만 둘 다 딱히 식욕이 넘치는 상황도 아니라서 일단 오가토르프 저택으로 귀환하기로 했다.
정령들의 도움으로 판타지식 무빙 워커의 힘을 맛본 탓에 얼마 되지도 않는데 하염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를 지나 저택에 당도했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저택에 살면서 딱 한 번 봤던 비룡용 수송 마차였다.
"뭐야? 이게 왜 여깄어?"
"아, 엘드미아. 오늘은 일찍 돌아왔네?"
이제 막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마차에 놀라고 있자 친숙하기 그지없는 얼굴의 경비병이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제벨씨? 저거 비룡 수송 마차 아닙니까?"
"맞아. 나도 정확한 설명을 들은 건 아닌데, 집사장님 말로는 레비엥 변경백님의 지인이라고 하더라. 이번 재판에 도움을 준다던데?"
이런 세상에! 그렇다면 저 마차에 타고 있을 사람은 내 몇 안 되는 정겨운 전우이자 세기의 효자!
"기에스! 얌마! 너 마차 타고 있는 거 맞지!"
"어? 엘드미아 님?"
반가운 마음에 폴짝 폴짝 뛰어서 마차에 다가서자 천막이 내려진 뒤쪽 화물칸에서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뭐야, 반갑긴한데 왜 거기서 나와.
"짜식, 역시 잘 지내고 있었구나!"
그때보다 훨씬 좋아진 얼굴의 기에스였다. 녀석도 나를 확인하고는 크게 기뻐하며 아직 움직이는 마차에서 황급히 뛰어내려 다가왔다.
"세상에 이게 얼마 만입니까! 아직 수도에 계셨... 아실리에 님도 계셨네요?"
라그니스가 상황이 될 때까지 수도 밖에서 숨겨 주고 있었던 기에스는 대우가 나쁘지만은 않았는지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듯했다. 안 그래도 이번 재판과 관련해서 유력한 증인이 될 테니 얼굴을 볼 기회는 있을 거라 여겼지만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이야.
"하하! 이게 또 귀찮은 일이 있었거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나저나 피부 반질거리는 거 봐. 비룡이 너 무겁다고 안 태우는 거 아냐?"
"저보다 이놈이 더 쪘을 겁니다. 그보다 겨우 1년 좀 지난 거 같은데 더 커지신 거 아닙니까? 대체 어디까지 자라실 생각입니까?"
"싸울 땐 일단 덩치만한 게 없는 법이니 크면 클수록 좋은 법이지."
"하하. 한결 같으시군요."
마차에서 튀어나온 기에스와 어깨를 팡팡 쳐 가면서 인사를 나누는 사이 기에스를 따라 비룡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 얜 살이 찐 게 아니라 얼굴이 더 사나워진 거 같은데.
"얘도... 성장기니? 얼굴이 좀 변한 거 같은데."
"아직 어린 비룡이니까요. 겨우 한 번밖에 안 보셨는데도 정확히 파악하시네요."
평생 본 비룡 둘 중 하나는 내 손으로 정수리를 쪼개 놨고 나머지가 얘니까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긴 하지. 비룡이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기에스만큼 반갑기 그지없었다.
"네가 수도로 왔다는 건 이번 재판을 통해 그 고리대금업자도 같이 정리가 된다는 말이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숨어 있던 마을에서 같이 지내시던 호위 분들을 포함해 모든 짐을 싸서 온 거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일찍 왔다고? 대체 언제 출발했길래?"
"저희요? 삼 일 전에 출발했습니다."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기에스와 달리 나는 순간 표정 관리를 못하고 확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아직 제국에 있을 때인데?
"누가 알려 줬길래?"
"왕실에서 직접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내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한 걸 느낀 기에스가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지금 당장 그에게 설명을 해주기엔 감정적으로 좀 많이 격해지려고 하는 중이라 일단 입을 다물었다.
라그니스의 불안과 당황은 진짜였다. 에카프 경도 마찬가지였고 셰릴도 그랬다. 그들의 반응이 날 속이기 위한 연기였다면 세기의 명연기로 기록되어야 한다.
내 머릿속에서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결국 하나 뿐이었다.
지금 왕실이 당사자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자기들 입맛대로 이용해 먹는 중이라는 결론.
"그랬구만! 난 딱히 들은 게 없어서 몰랐네. 아무튼 다행이다 야. 드디어 당당하게 지낼 수 있겠어."
하지만 애꿎은 기에스에게까지 알려가며 불안을 심어 줄 이유는 없었기에 난 일단 표정 관리를 하며 다시 대화로 돌아왔다.
"사실 워낙 대우를 잘해주셔서 거기에서의 삶도 나쁘진 않았습니다만, 역시 비룡과 조종사는 하늘에 있는 게 맞는 거 같더군요. 눈치 보지 않고 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두근 거리긴 합니다."
잠깐 묵는 거라고는 해도 비룡이 적응할 수 있도록 옆에서 보살펴줘야 하다 보니 계속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나와 기에스가 저녁 시간을 기약하며 헤어지자 뒤에서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들고 있던 아실리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바뀌었다.
"엘디. 섣부르게 판단하고 움직이려는 거 아니지?"
"섣부르게 판단하진 않는데 움직일 뻔 하기는 했어."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상당히 지당하고 합당한 이론이며 아주 신중하고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은 한다.
근데 씨발 생각하는 거랑 납득하는 거랑은 항상 별개더라고.
"일말의 언질도 없이 불안해하는 애는 내버려 두고 지들은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즐거워 했을걸 생각하니 좀 짜증은 나네."
어떠한 배려도 없다. 그저 체스판 위에서 이해득실만을 따지며 말을 움직이는 수준의 계획. 정작 그 계획을 수렴하는 본인은 아무런 페널티도 없으면서 그렇게 움직이는 건 좀 많이 뻔뻔한 행동이지. 하다못해 왕가가 라그니스를 지지한다는 확신 하나만 쥐어 줬더라도 이런 기분은 안 들었을 것이다.
새벽까지 사람 모아 두고 재판 준비하는 건 솔직히 좀 급하게 움직인다는 느낌이지 만전을 위해 밤을 샌다는 느낌하고는 거리가 멀잖아?
"짜증만?"
"...일단은. 나중에 하는 거 봐서 결정내려야 하는 부분이긴 하니까."
저질러 놓고 사과하는 건 별로일 지언정 적을 확실히 치기 위한 행동이라는 당위성이 성립되는 만큼 합당한 보상이 사과와 함께 한다면 오히려 좋게 봐줄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하다.
여긴 리얼리티 판타지 세계니까. 뭐든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지.
그래도 못마땅해서 표정을 풀지 못하고 뚱해져 있자 아실리에가 웃으며 팔짱을 껴왔다.
"그래. 감정적인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엘디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순간 화가 치솟을 뻔 한 것도 사실인지라 배가 고파졌다."
"그런 구조였어...?"
그러게. 나도 내가 이런 구조인지 몰랐네. 아무튼 배가 고파진 건 사실이었기에 난 방에 올라가기 전에 주방부터 찾아가서 남은 음식을 좀 얻어내기로 했다.
하지만 주방장은 남는 음식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 상을 제대로 차려 주었고,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니 기분이 풀려 버리는 단세포스러운 모습을 아실리에에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