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식사를 마친 나와 아실리에는 우선 간단하게 장비를 점검한 뒤 다시 저택을 나와 거리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노예 상인들을 처리했으니 이제는 다음 목표물을 찾아야지. 우리는 저녁까지 남는 시간을 이용해 지크멜을 찾아가기로 했다.
"수도에 가게까지 차릴 정도면 정말 엄청 열심히 산 거 아니야? 심지어 원래 있던 도시를 정리하고 온 것도 아닌 뉘앙스였다면서?"
"그땐 대충 넘어가긴 했지만 좀 대단하긴 하더라. 걔는 어디 가서 자수성가했다는 말 당당하게 해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지 않을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정보상은 많이 알고 있을수록 좋은 거라는 주장 하에 아실리에는 동행을 자처했다.
가게로 향하는 동안 아실리에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수도와 달라진 부분들을 비교해가며 이야기를 나눈 덕에 지루하지는 않았다. 나름 추억이 많았던 것인지 아실리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러던 와중에 아주 자연스럽게 속삭였다.
"음, 확실해. 저택에서부터 미행이 붙었어."
"벌써?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른데."
이번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나와 달리 아실리에는 우리가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낌새를 느낀 거 같다. 대체 언제 확인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은밀하게 탐색을 끝마친 아실리에는 내게 팔짱을 끼며 상황을 설명해줬다.
"꽤 실력이 좋아. 아침에 보샤 백작에게 시도한 도발이 제대로 들어간 거 같은 걸?"
"우리만 감시하는 걸까?"
"글쎄? 확실한 건 우리를 따라오는데 있어 저 사람이 아무런 주저도 하지 않았다는 점 뿐이야."
애당초 이런 꼬리가 붙어 주길 바라며 던졌던 도발이긴 했지만서도, 재판소로 들어가는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지시를 내리고 행동에 옮길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조금은 놀랐다.
"하긴, 이 정도 행동력은 있으니 역모도 꾸미는 거겠지."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엄청난 말을 하는구나."
"어차피 실패할 건데 뭐."
이미 나랑 안 좋게 엮인 순간부터 끝이다. 설령 놈의 반역을 못 막는다 하더라도 반역에 성공해 기뻐하는 놈의 대가리 만큼은 내 손으로 떨굴 테니까.
아직 정령산 무빙 워커의 기운이 빠지지 않아 한참을 걸어온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도착한 지크멜의 귀금속 가게 문을 열자 가게의 점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내 얼굴을 기억한 건지 인사를 건넨 종업원이 짧은 순간 경직을 일으켰다가 빠르게 평정을 되찾는다. 기억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한결 편해지지.
"지난번에 사 갔던 장신구가 꽤 마음에 들었거든. 그때와 같은 게 또 없나 싶어서 들렀는데."
"아아. 그러시군요! 마침 점장님도 안에 계시니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예 지크멜에게 나를 대응하기 위한 지시라도 받은 걸까? 직원은 아실리에가 함께 있음에도 거침없이 나를 지크멜이 있던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지크멜도 거침없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엘드미아 님! 안 그래도 오실 거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김없이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지크멜이었지만 오늘은 아실리에가 있다 보니 괜히 부끄럽다.
"올 거 같았다고? 어째서?"
"아침에 이야기가 들어왔거든요. 노예 상단을 완전히 박살 내 놓으셨다면서요?"
한순간 대체 이놈이 날 어떻게 특정 지었나 고민하면서 크룰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정보를 팔았나라는 생각까지 했지만, 추리라고 할 것도 없는 단순한 결론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하긴, 너한테 정보 사서 나가자마자 상단이 터졌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당연히 나라고 생각하겠구나."
"하하하. 그런 거죠. 솔직히 너무 순식간이라서 오히려 우연이 겹친 건가 고민할 정도이긴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권하고 준비된 찻잔과 차까지 꺼낸 지크멜은, 아실리에를 보면서도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게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나에 대한 정보가 자신을 통해 누군가에게 흘러갈 일은 없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처럼 보여서 묘하게 웃겼지만 일단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어차피 다 알고 있으면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지. 어디가 가장 가까워?"
"사실 이젠 가깝다는 말이 좀 어폐가 있는 수준의 거리입니다. 노예 상단과 달리 전투에도 좀 더 능할 거구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지크멜은 지난번과 달리 단번에 문서를 꺼내 내게 보여 주었다.
"신규 고용 사병들을 위한 교정 시설...?"
매우 수상한 냄새가 나는 프레젠테이션 제목 같은 게 떡하니 적혀 있다.
"명목상으로는 귀족들이 고용한 사병들에게 교육적 혜택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급조된 건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흔히 말하는 훈련장 같은 곳입니다. 지속된 전쟁 속에서 숙련된 이들은 계속 전선으로 빠져나가지만 인간들만 하더라도 왕국이 몇 개나 쪼개져 있으니, 뒤를 조심해야 한다. 라는 명목 속에서 만들어졌다더군요."
"굉장히 합법적으로 들리는데?"
"표면상은 합법이죠. 중요한 부분은 다음 장에 적혀 있는 중도에 포기한 인원들입니다."
간단한 손동작으로 종이를 넘겨보라고 재촉하는 지크멜을 따라 다음 장을 살펴보니 꽤나 빽빽하게 적힌 이름들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다 포기한 놈들이라고?"
"네. 그거 요약본으로 정리해 놓은 거라서 이름이랑 적당한 성적만 적혀 있는 거지, 원본은 꽤 상세하게 인적 사항까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한 장 빼곡히 적혀 있는 이름과 마치 성적표마냥 구분되어진 내용들을 가볍게 훑어보고 다음장을 넘기자 이번에는 합격자 명단과 성적표가 나온다.
"...이것 봐라?"
그런데 그 성적이라는 게 떨어진 놈들보다 붙은 놈들이 더 안 좋다. 심지어 분기 별로 1할에서 2할 정도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꼬박꼬박 포기하고 있네.
상위 10퍼센트의 성적을 보여준 애들만 포기한다라.
"합격자 명단이랑 탈락자 명단이 거꾸로 박힌 게 아니니까 이렇게 보여 준 거겠지?"
문서에서 눈을 떼고 바라본 지크멜은 자신만만한 미소와 끄덕임으로 대답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정말 우연하게도 그 탈락자 명단에 있는 이들은 용병단을 꾸려서 함께 다니더군요. 귀족과 귀족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돈을 버는 편인데... 그게 또 귀족파들끼리 싸우네요? 가끔 국왕파라던가 파벌에 속해있지 않은 귀족과의 분쟁에도 참가하는데 항상 귀족파 소속으로 참가하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머리를 썼네. 역시 정치하는 사람들하고는 엮이면 안 된다니까."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보기 드물 정도로 불신 가득한 시선을 쏘아 보내는 아실리에를 이 악물고 무시한 나는 아실리에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지크멜에게 황급히 말을 건넸다.
"수준이라던가 숫자는?"
"간부라고 부를 수 있는 인원이 존재하고 오러 사용자라는 이야기만 있더군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정보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용병단 규모는 평균 40명. 거기서 15명 정도가 몇년째 용병단에 고정적으로 묶여 있고 나머지는 계속 물갈이가 된다고 하더군요."
"그 물갈이 된 놈들은 귀족파놈들의 사병으로 고용되고?"
"바로 눈치채셨군요. 맞습니다."
아마 신 귀족파라고 분류되는 놈들의 사병으로 들어가는 거겠지. 하나같이 나이가 젊은 편에 속하는 건, 보샤 백작의 반역이 굉장히 장기적인 계획이라서 그럴 거 같다. 기껏 큰돈 들여서 키워놨더니 늙어서 못 써먹는 경우는 바라지 않을 테니까.
"가장 최근 물갈이가 언제였는지 혹시 알아?"
"얼추 1년 전입니다. 그 뒤로 세 번 정도 작은 분쟁에 고용됐죠."
머릿수는 많지만 그렇게까지 운이 나쁜 상황은 아니다. 40명 전원이 경험 출중한 베테랑은 아니라는 거잖아?
심지어 용병이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이것들이 모험가 일이라도 했으면 그냥 방치할 수 밖에 없었을 테니까.
"왕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글...쎄요? 이게 또 관심을 안 가진다면 그냥 넘어갈 법한 부분이긴 했습니다. 아무리 왕국이라 하더라도 일개 용병단 하나하나까지 모두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게다가 백인대도 되지 않는 작은 용병단이잖습니까?"
왕국 군단 최소 편제는 60명. 그 미만이 될 경우 전쟁 기능 상실이라 여겨서 병력 없음으로 취급한다. 만약 왕실에서도 지크멜과 같은 생각으로 이들을 바라보았다면 충분히 놓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깽판을 친다 하더라도 부술 수 있는 건 용병단 정도. 보샤 백작의 부트 캠프를 박살내려면 공권력이 필요하다.
"하, 그 어르신은 영 찜찜해서 두 번 보고 싶지 않은데."
"예?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레스롬 공작."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에카프 경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기에스 건으로 인해 왕실에 대한 내 신뢰도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다.
툭 까놓고 말해서 레스롬 공작이랑 비슷비슷하다. 이런 경우 역시 당장 쥐어볼 수 있는 패부터 살피는 게 맞는 거겠지.
"아니, 그런 사람은 대체 왜... 아닙니다. 이번에도 그냥 모르는 게 낫겠네요."
진짜 똑똑해졌네 이거. 낄끼빠빠가 아주 예술적이야.
"근데 얘네 지금 어디에 있냐?"
"마지막으로 확인한 건 서쪽에 있는 관문 도시 리비엘의 남쪽 관문으로 빠져나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디로 향하는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남문으로 빠져나갔다는 걸로 유추해서 예상 지점을 몇 개 추릴 수는 있었죠."
지크멜은 그렇게 말하며 디테일은 없지만 도시들의 위치만큼은 정확하게 찍힌 지도을 펼쳐서 붉은색 잉크로 칠해진 부분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거리가 꽤 됩니다. 말을 타고 달려도 사흘은 가야하죠."
자연스럽게 나와 아실리에는 숲부터 찾아봤지만 안타깝게도 딱히 연결되어 있는 숲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그나마 가까운 거라고 하니 실상 다른 일이 터지지 않는 이상 이게 마지막 깽판이라는 건데, 사흘은 좀 멀단 말이지.
뭔가 타개할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건 기에스였다.
"...비룡은?"
"예?"
"비룡은 얼마나 걸릴까?"
내 덤덤한 질문에 지크멜은 얼빠진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비룡이야 뭐 반나절이면 날아가지 않을까요?"
이젠 계셨군요 씨발놈아도 못하겠다.
신은 존재한다.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