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정해졌으면 즉각 행동해야 하는 법.
지크멜에게 정보 값을 지불한 뒤 서둘러 가게를 벗어난 우리는 그대로 귀족원으로 향했다. 그래도 뒤에 꼬리를 붙인 상태로 가기엔 조금 캥기는 감이 없지 않아 이번에는 아실리에가 나서기로 했다.
"그럼 조심해 누나."
"걱정하지 마렴. 누나 이런 거 잘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와 헤어지며 후드를 뒤집어쓴 아실리에는 정말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백 년을 넘게 산 엘프의 품격과 기술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실리에와 떨어진 뒤 거리를 거닐면서 과연 내가 레스롬 공작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를 두고 다시 한번 고민하기 시작했다.
왕국의 비룡은 전부 왕실의 관리하에 놓여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명으로 지정된 비룡 정거장과 비룡 육성소에서만 비룡을 관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상응하는 값을 지불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용할 수 있는 것. 비룡은 결국 그런 운송수단 중 하나니까.
그 중 일부 고위 귀족들에게는 긴급 상황시 지정된 비룡 정거장 외에도 원하는 장소까지 비룡을 대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물론 맨입으로 되는 게 아니라 가문의 이름을 건다던가, 합당한 사유를 인정받아 왕실 인장이 찍힌 허가서를 지참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아무튼 가능은 하다.
당연히 공작 정도 되면 자기 이름 걸고 비룡을 대여할 짬은 된다. 개인 자가용처럼 쓸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
내가 영 내키지 않음에도 레스롬 공작을 찾아가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왕국을 위하고 반역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다면, 비룡 대여를 비롯해 보샤 백작의 반역 부트 캠프 처리를 떠맡기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당연히 비룡 정거장에 있는 생판 모르는 비룡 조종사에게 용병단 때려 죽이러 간다는 걸 대놓고 알릴 수 없으니 대여 대상은 기에스와 그의 비룡이다.
비룡 조종사와 비룡은 왕국령 안에 있는 이상 왕실의 관할이자 재산이니, 비록 표면적으로 지난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든 어쨌든 간에 앞서 말했던 이야기에 포함된다.
...아마도 포함될 것이다. 안 되면 귀찮아진다.
"정지. 이곳은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은 귀족원입니다. 용무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감탄과 쑥스러움이 공존하는 와중에 도착한 귀족원의 입구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절도 넘치는 동작을 선보이는 경비병이었다. 합을 맞춘 것처럼 양쪽에서 X자로 겹쳐지는 할버드는 마치 의장대의 각 잡힌 칼군무를 연상시켰고, 그것만으로도 이들이 어중간하게 훈련받은 사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라위네라 공작 각하를 뵙고자 방문했습니다."
"미리 약속을 잡고 오신 겁니까?"
"아뇨."
근엄한 얼굴에 의문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당연히 그렇겠지. 겉보기에도 모험가에 불과한데 뜬금없이 공작을 만난다고 하면 미친놈으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경비병은 아무런 내색없이 지극히 타당한 정론을 입에 담으며 예의를 잃지 않음으로써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실례지만 약속된 일정이 아니면 귀하의 용무 혹은 지위에 따른 특이사항이 없을 시 말씀을 전달드리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그간 비정상적인 것만 보다 보니 정상적인 반응만으로도 감격하게 되는군. 그래도 반응을 보아하니 레스롬 공작이 안에 있기는 한가 보다.
"멧돼지 사냥과 관련하여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각하께 직접 말씀드리기 어렵다면 대행자 루세릭 경에게 엘드미아 에가가 용무가 있어서 왔다고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순간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경비병이 흠칫 거렸다. 너무나도 확연하게 움직여서 나도 모르게 시선이 움직였지만 딱히 다른 의도는 없었는지 그저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이 좀 많이 불안정해 보이긴 했는데... 기분 탓이겠지?
"...알겠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잠시 기다려주시길."
그와 달리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경비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쪽에 있는 다른 경비에게 다가가 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임시 구금소의 경비들도 저렇게 격식이 있었다면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났을 텐데 말이야.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루세릭이 지난번과 다를 바 없는 의연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서오십시오. 엘드미아 에가 경. 방문을 환영합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세릭... 경...?"
예법에 맞춰 인사를 건네고 고개를 들자 방금 전까지의 의연함은 온데간데없이 뭔가 세상의 이치에서 어긋난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루세릭이 있었다.
너 왜 눈을 그렇게 떠?
"흠, 흐음. 가시죠. 라위네라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사람이 기껏 예의에 맞춰 행동했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누가 보면 야만인이 궁중 예법에 맞춰 인사라도 한 줄 알겠네.
스스로도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는 자각이 있는지 루세릭은 조금은 서둘러 몸을 돌려 나를 안내했다.
"저 사람이 단두대였어?"
"어떤 괴물인가 했더니 덩치부터가 남다르군."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지난번과 달리 온몸에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 속에서 난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두고 왜 처형기구마냥 취급하지?
내 의아함을 읽어낸 루세릭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설명했다.
"주변의 반응이 지난 방문과 사뭇 다르겠지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임시 구금소에서의 사건이 생각보다 빠르게 입소문을 타서..."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를 걸어오니 억울하게도 할 말이 없군. 루세릭은 평소보다 걸음을 조금 더 서두르는 것으로 주변의 시선에서 내가 빨리 벗어나도록 배려해주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에 들어서자 이번에도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정겨운 태도를 보이며 레스롬 공작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방문해주었구만? 자네도 나와의 환담이 마음에 들었나?"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긴 하다.
그래도 명색에 제국의 황녀를 구하고 용사를 이긴 인재인데 국왕파 귀족 휘하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놓고 척을 지거나, 일면식도 없음에도 당장 등용 의사를 내비치는 건 굉장히 근시안적인 자세 아니겠어?
레스롬 공작처럼 호감도 작업부터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일 것이다. 어째 세상에는 비상식적인 놈들이 더 많은 거 같지만.
"솔직히 두 번은 뵙고 싶지 않았는데 일이 또 이렇게 되었습니다."
물론 난 그런 거에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막 나갔으나, 레스롬 공작은 막강했다.
"하하하. 그럴 수 있지. 세상만사라는 게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네. 허나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필요에 의한 행동을 할 줄 안다는 건 굉장히 좋은 일이지. 앉게나. 이번에는 부디 마음 놓고 차를 마셨으면 하는군."
항상 호의로 나를 대하다 보니 적대 관계라 여겼던 내 입장에서는 정말 유독 불편한 인물이다. 심지어 어김없이 능숙한 동작으로 차를 내오려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거절조차 못 하겠다.
이 어르신은 왜 자꾸 사람 부담스럽게 차를 내주려고 하는 거야. 대체 얼마만큼 차에 진심인 거냐고.
"그래, 멧돼지 사냥에 관하여 할 이야기가 있다고? 이틀 전과 같은 형태로 처리한다면 아무도 자네의 족적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을 텐데... 오늘이 되어서야 방문한 것을 보아하니 그런 문제로 온 건 아닐 거 같구만."
소파가 앉자마자 바늘방석으로 변한 기분이다.
"정말... 소식이 빠르시군요."
"그럼. 빨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생충들이 왕국을 갉아먹는 것에 대처하지 못한다네. 피곤한 일이고, 돈이 많이 드는 일이지."
나나 아실리에가 미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누군가를 고용해서 미행이라도 시킨 것일까? 그보다 그땐 루빌라부터 노예 상단까지 저질러 놨는데, 그걸 다 알고 있는 건가?
내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루빌라 남작 건은 정말 잘 처리해줬어. 자네 또래의 소년들은 신중함이 부족한데 깔끔하게 마무리를 맺었더군. 놈이 왕국 몰래 비룡을 기르고 있었다는 건 혹시 알고 있었나?"
"...아뇨.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요."
"내일 있을 비룡 조종사의 증언을 기반으로 놈의 반역 행위를 추적하는 척하며 급습이 예정되어 있다네. 본디 놈의 주도 하에 은닉에 들어갔겠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대로 압류될 수밖에 없겠지."
"국왕파에게 좋은 이야기 아닙니까?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이시는군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으로 차와 다기들을 들고 온 레스롬 공작은 기품있는 동작으로 맞은편에 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국왕파에게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왕국에 좋은 이야기지."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네. 웃음과 함께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레스롬 공작이 말을 이었다.
"노예 역시 마찬가지야. 왕국민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의도로 보일 수도 있네만, 우리나라는 노예제도가 국가 기반에 크게 관여하고 있는 라단 왕국과 긴 시간 동안 해상 무역을 이어온 관계거든. 대놓고 그들의 제도를 부정할 수 없기에 해외의 노예는 인정한다는 형태로 유지되고 있지. 높으신 분들의 사정이라는 거라네."
젠장. 다 알고 있네. 나도 모르게 뭐 씹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당연히 왕국의 입장에서 국민을 노예로 속여 파는 이들은 엄벌에 처해야 하지만, 강경하게 나서면 의도치 않게 라단 왕국의 노예 상인들에게 불만을 사게 되거든. 그렇다고 미적지근하게 수사를 시작하면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지. 자네 같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인물이 깔끔하게 쓸어 버리고 증거를 가져오는 게 여러모로 편해.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 그러려니 해라. 증거도 있지 않냐.' 라는 식으로 말이지."
아무리 공작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정보를 얻는 게 말이 되나? 공작이 이 정도면 대체 왕실의 정보력은 어느 수준인 거야? 그냥 레스롬 공작이 유능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기분인데.
"저에게 꼬리를 붙여 놓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지난 방문 때 말하지 않았나. 귀족원을 나선 뒤 무슨 일이 생기든 그건 귀족원의 의지와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그런데도 제가 한 일을 다 파악하고 계시는군요."
"국왕 폐하께서 아시는 만큼 나도 아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 차를 따르는 레스롬 공작을 보며 별 생각 없이 그의 말을 되새기는 순간,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왕실 정보부에도 사람을 두고 계신 겁니까?"
그건 반역인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굳어 있는 사이 처음으로 레스롬 공작이 경기를 일으키며 손사래를 쳤다.
"젊은 친구가 참 무서운 상상을 하는구만. 그냥 폐하께 부탁드려 직접 정보를 받는 것에 불과하다네."
"아, 직접...예? 직접?"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귀족파 우두머리가 국왕 폐하한테 직접 정보를 받는다고?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하니 한 차례 차를 음미한 레스롬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말했잖나. 자네가 국왕파인 이상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폭탄 발언을 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하게, 레스롬 공작은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