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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41화 (141/412)

용무를 마친 엘드미아가 집무실을 떠나고, 그에게 받은 문서를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며 의자에 앉은 레스롬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소년의 앞에서 보여줬던 여유로운 태도와는 달리 깊은 피로감이 묻어나는 표정은 그의 진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을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정치판이라는 독사 소굴 속에서 버텨 온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마지막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묘한 대답을 할 때의 엘드미아가 내비친 것은 순전히 자신을 향한 최소한의 존중 뿐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 호의적으로 대한 것이 신의 한 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지만... 이런 경우를 겪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구먼."

왕가에 대한 두려움도, 귀족들의 정치 싸움에 의한 걱정도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에게서 느껴지던 감정은 짜증과 귀찮음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철없는 어린 소년이 세상 물정 모르고 오만할 뿐이라면 평범하게 웃어넘길 일이지만...

"겹치는 거라고는 어린 소년이라는 것뿐이로군."

이제 15살이라고? 아직은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얼굴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그 나이 또래라고 여길 요소가 없다. 눈앞에 맹수 한 마리를 두고 차를 마신다면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리라.

나이 먹고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을 애써 지우며 연락용 수정구를 꺼내 든 레스롬 공작은 통신을 위해 마나를 주입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 어땠는가?-

기다렸다는 듯이 연결된 수정구에 그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자의 얼굴이 비춰졌다. 실제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맞았다. 엘드미아의 방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연락을 취해 지시를 받은 뒤, 이야기가 정리되면 보고하겠다고 이야기까지 마친 뒤였으니까.

수정구 너머의 주군이자 이티스엘의 국왕인 이티스엘 7세에게 가볍게 예를 차린 레스롬 공작은 결과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경과를 지켜볼 정도의 유예는 얻었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적당히 보상만 하는 걸로 그와 관련된 일들이 정리될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정구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을 정도로 서먹한 관계는 아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둘의 사이는 매우 돈독했고, 신분을 떠나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그랬기에 안팎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왕국을 지키고자 의기투합하여 7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7년간 이어진 역경이 둘의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든 게 되어 버렸지만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경계해야 하는 인물인가?-

"시작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과 사고가 다릅니다."

-다르다 함은?-

"누군가... 제 능력과 지위를 이용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손을 써서 제가 거기에 휘둘렸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럴 경우 저는 당연히 그 배후를 찾아내 목적이나 의도를 파악하고 적인지 아군인지를 구분지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득을 챙긴 상대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무언가를 사과의 의미로 쥐어 준다면 일단은 호의적으로 대하겠죠. 장기적으로 뜻만 맞아떨어진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할 것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다. 이해득실을 따지면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솟아난 것인지 알 수 없는 15세 소년은 그 문제를 전혀 다른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엘드미아 에가라는 인물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10의 손해를 주고 20의 이익을 줬다고 해서 10의 이익을 준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10의 손해와 20의 이익을 두고 자신을 멋대로 이용해 먹으려는 적으로 인식하죠."

그로 인해 이득이 생기든 말든 관심이 없다. 그렇게 생긴 이득을 적이 흔드는 먹이 정도로 여기니까. 어쩌면 자신의 이득은 어차피 자신이 알아서 챙긴다는, 상당히 패도覇道적인 발상이 깔려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렇기에 두 번 다시 자신을 이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철저히 박살 낸다. 지극히 감정적이고 물불 안 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자기 나름대로의 계산 끝에 나온 결론이라는 점이 또 골치 아픈 부분이다.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기에 뒤끝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인 수준이다. 그 한 번의 출혈 이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엘드미아 에가라는 인물을 우군으로 둘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어설프게 건드린 대가로 목숨을 지불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번 대화로 조금은 확신이 섰습니다. 그는 레비엥 변경백을 이용해 보샤 백작과 그의 세력들을 뿌리 뽑으려 했던 저희에게 반드시 한 번은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걸."

-그게 설령 국왕이라 하더라도 말인가?-

"제국의 황제 앞에서도 그럴 인물입니다."

-그럼 지금 잠잠한 건...-

"견적...을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 제멋대로 굴고 어디까지 성의를 보일 생각으로 자신을 건드린 것인지.

그게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인지, 적으로 돌릴 수준인지.

객기라고 불러도 문제가 없을 행동이다. 어떻게 한 명의 사람이 국가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어떻게 국가가 작정하고 날뛰는 한 명의 사람을 잡을 수 있겠냐는 식으로 행동 한다.

문제는 지금까지 보여 준 행적만 놓고 보면 그게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상식과 지식이 있는 소년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계산을 기반으로 움직이면서도 이론만 놓고 보면 문제가 없는 식이고, 자잘한 정이 많기도 하죠. 타인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이유없이 먼저 휘두르고 보는 부류의 인간도 아닙니다."

-정이라... 가장 불확실한 인물을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를 열쇠가 가장 불확실한 감정적 요소라니.-

헛웃음을 터트리며 턱수염을 쓰다듬는 이티스엘 7세였지만 레스롬 공작이 느끼고 있는 감정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오가토르프 가문의 여식은 첫 대면에 다짜고짜 폭력을 휘둘렀음에도 지금처럼 아무 문제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잖습니까. 악의적으로 적대하거나, 그를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아니면 생각보다 평범하게 반응하는 인물이라고 여겨집니다."

-오가토르프 가문이 주는 이익이 있어서 참는 게 아니고?-

"그랬다면 정작 오가토르프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이익들을 마다한 채 집사로 일하는 기행을 벌이진 않겠죠."

에카프 경은 충신임과 동시에 정치를 모르는 순수한 기사였다.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보고서에는 장래 유망한 인재이면서 라그니스를 비운의 영웅 레비엥 변경백으로 포장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엘드미아에 대한 내용이 빠지지 않았고, 그 안에는 자신의 재량으로 줄 수 있는 이익을 자꾸만 거절하는 엘드미아에게 왕실에서 공식적인 포상을 내려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희가 인간적으로 다가갈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관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적. 레스롬 공작에게는 참으로 멀고 낯설어진 단어다.

비록 그렇게 해서 완전히 면죄부를 얻게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누군가 죽고 끝나는 것보다는 분명 싸게 먹히리라.

-자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번 기회에 처리해 버리는 게 차라리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드는데.-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하하, 맞아. 하지만 그런 평가가 어울릴 정도로 흉악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인재로 느껴지는 건 사실일세.-

다루기 어렵다는 이유로 없애버리고 봤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마법조차 못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자세는 언제나 퇴보를 불러올 뿐. 이티스엘 7세도, 레스롬 공작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누가 알겠습니까? 이번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그의 목표인 마왕군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그걸 알려 주면 저 친구도 이번 일 정도는 넘어가지 않을까 싶군요."

-......마족 포로를 잡으면 전쟁의 효시를 누가 쏘아 올렸는지 꼭 심문해 보라고 전해야겠군.-

가볍게 꺼낸 의견이었지만 이티스엘 7세의 대답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귀족원을 벗어나면서 나는 제발 저 능구렁이 같은 영감과 세 번은 독대하지 않기를 신께 간절히 기도했다.

전생에서도 특출나게 똑똑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자꾸 저런 사람들하고 엮이다 보니 숨만 내쉬어도 피곤해지는 기분이다.

확실하게 잘잘못을 가려서 검을 휘두른다는 건 결국 확실하지 않으면 이도 저도 못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나보다 머리가 좋은 것들이 엮이고 사건이 꼬일수록 자신 있게 검 한 자루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줄어든다는 소리지. 지식을 얻는데 소홀함은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정치는 별개의 이야기다.

솔직히 살면서 딱히 엮일 일은 없다고 여기기도 했었고.

근데 지금은 나 좋다는 여자 셋 중 두 명이 정치판 한가운데에 서 있네.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지..."

뭔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속에서 스무 걸음 정도 움직였을까? 귀족원에서 멀어질수록 밀도가 높아지는 인파 속에서 아실리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하기 그지없는 모습인지라 마음이 놓인다.

"이야기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으으음. 이래저래 의견이 맞았다고 해야 할까. 일단 도와주기로 했어."

"그런 것치고는 생각할 게 많은 표정인걸?"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길거리에서 나눌 만한 내용은 아니었기에 저택으로 돌아가서 설명해주기로 했다. 일단은 붙어 있던 미행부터 해결해야지.

"꼬리는 어떻게 했어?"

"꼬리가 아니었어. 옌 티에? 그 사람이더라."

"엥? 걔가 왜?"

전혀 생각하지 못 했던 인물이 튀어나와서 반사적으로 되물어 봤더니 아실리에는 후드를 벗고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대답해주었다.

"생각이 비슷했다고 해야 하나? 엘디한테 미행이 붙을 게 분명하니, 그럴 경우 자기가 역으로 추적해서 배후를 알아내고자 했나 봐. 오히려 나를 발견하고는 먼저 다가오더라고."

목숨값만큼은 하겠다고 하더니 빈말은 아니었나보다. 자발적으로 야근하는 신입사원을 보는 사장 놈의 위치라는 게 이런 것일까...?

단 한 번도 사장인 적 없었던 나로서는 심히 찜찜하군.

"걔 나름대로 전문가인 거 같던데."

"누나가 봐도 그래. 애초에 꿈을 섬기는 자들 중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없겠지만."

생소하다고 여겼던 나와 달리 아실리에도 그들에 대해서 익히 들어왔다는 식으로 반응 했었지. 하지만 이번에 내가 신기했던 부분은 몽순이가 전문가라는 것보다 그 전문가의 미행조차 꿰뚫어 보는 아실리에였다.

숲이 아닌 도시에서조차 이렇게 유능한 아실리에를 잡은 엘프 사냥꾼이라는 놈들은 대체 어떤 놈들인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지만, 살면서 눈에 보이는 노예 사냥꾼 놈들을 족족 잡아 죽이다 보면 한 번 정도는 만나겠지 라는 생각에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렇게 좋은 기억도 아닐 테니까.

결국 괜한 걱정이었던 게 확인되었기에 우리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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