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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42화 (142/412)

"아, 그렇습니까? 그럼 필요할 때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와 정리를 마치고 연병장에서 비룡과 놀아주고 있는 기에스에게 앞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돌아온 대답은 실로 간결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고민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물론 저에게 돌격해서 싸우라고 하신다면야 불가능한 일이니 거절했겠지만, 말씀대로라면 불법적인 일도 아니고 왕실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도 아니잖습니까? 돕지 않을 이유가 없죠."

딱히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기에스는 나와 라그니스에게 평생에 걸쳐 갚아야 하는 수준의 은혜를 입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단순히 빚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그대로 얽혀 있었다면 원치 않은 반역에도 몸담게 되었을 거라는 게 이유였다.

"반역이라니, 멸족을 당했을 일 아닙니까? 지금도 가끔 치가 떨릴 정도입니다. 설령 그들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제가 좋은 꼴을 보긴 힘들었겠죠. 저는 이미 엘드미아님께서 왕가에 반하는 일을 부탁하신다 하더라도 안 들킨다는 가정하에서는 도와 드릴 의사가 있습니다."

"이번에 느꼈는데, 왕실의 정보력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더라고.  아마 몰래 부탁해도 다 알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냥 마음만 그렇다고 여겨 주시고 부탁은 하지 말아 주세요. 하하하."

너스레를 떨며 농담을 던질 줄 아는 기에스는 참으로 믿음직스러웠다.

그가 흔쾌히 반응한 덕분에 오늘 남은 일정은 재판이 끝나고 돌아올 라그니스를 맞이하는 일 뿐이었다.

해도 거의 다 저물었기에 머지 않아 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보샤 백작의 끄나풀이들을 박살 낸 이야기로 하하 호호 웃을 수 있을 거라 여긴 나는 아실리에가 묵고 있는 방에서 느긋하게 뒹굴거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음에도 재판에 참여했던 이들은 재판소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대체 재판을 얼마나 길게 하는 거야...?"

"반역 혐의잖니. 서로가 준비한 게 많을 테니 새벽까지도 갈 걸?"

금시초문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언급하는 아실리에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 상식이 부족했었나보다.

"아니, 식사도 안 하고?"

"그래서 보통 장기전이 예상되면 음식하고 음료를 엄청나게 챙겨서 들어가. 누나도 옛날에 한 번 참관해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참 끔찍했지."

"이야기만 들어도 끔찍한데 경험담이었다니 소름이 끼치네."

오히려 그러한 준비가 부족한 탓에 자신의 무죄나 상대의 죄를 미처 입증하지 못하고 체력이 딸려서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땐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정신 나간 길이의 재판에 대해 컬쳐 쇼크를 느낀 것은 나 혼자뿐인 것인지 저택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도 거기에 맞춰 기에스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했다.

재판에 참여했던 이들이 귀환한 것은 그 뒤로도 한참이 더 지나 자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하녀에게 이야기를 듣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게 된 이들의 얼굴은 피로로 인해 잔뜩 수척해져 있었지만, 딱 봐도 좋은 결과를 얻고 만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엘드미아. 한 삼 일 만에 보는 기분이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셰릴과 주변인들에게 축하 받고 있는 라그니스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 동작에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을뿐더러 아침까진 분명 멀쩡했던 얼굴엔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상태다.

"안에서 대체 무슨 싸움을 하고 나온 거니...?"

"내 생에 다시는 재판소에 들어갈 일이 없게 해 달라고 빌게 되는 싸움. 오랜 시간 동안 몸을 숨기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기에스. 내일 있을 재판 이후로는 다시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인사도 못 드리는군요."

퀭한 눈으로 최대한 밝게 웃어 보이는 라그니스를 배려한 것인지 기에스는 가벼운 인사만 취했을 뿐 딱히 대화를 이어 나가려 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그녀가 짧은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건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안에서 오고 간 이야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력적으로 한계에 가까웠기에 저택에 남아 있던 이들은 그들이 쉴 수 있는 환경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움직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짧은 수면 후 다시 재판소에 들어가야 할 테니까.

하지만 라그니스는 그 피곤한 와중에 뭔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건지 머뭇거렸고,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억지로 떠밀리다시피 한 끝에야 휴식을 취하기 위해 저택으로 향했다.

"아버님과 왕실 관계자 분들은 그대로 왕성으로 향했어.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 이런 상태일 거 같다."

그나마 전사이기에 상대적으로 체력에 여유가 있는 셰릴이 남아서 나에게 간략한 설명을 해줬다.

그래 봤자 특별하다고 할 건 없었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면 달랐겠지만, 이미 이번 재판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사방팔방 주워듣고 견적이 나온만큼 셰릴이 말해주는 이야기는 일종의 경과 보고에 가까웠다.

귀족파에서 이러저러한 걸 내세웠지만 국왕파의 변호로 역공이 되어 버렸네 뭐네 등등.

그래도 그 속에서 보샤 백작이 침착성을 조금 잃은 것처럼 보였다는 소식만큼은 반갑지 그지없었다.

"남은 기간 동안 힘내라고. 하루가 멀다 하고 보샤 백작이 초췌해질 수 있으니 잘 살펴보고."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냐?"

"보샤 백작의 불법 사업장들을 터트리고 다녔지. 내일모레엔 숨겨둔 사병들을 처리할 예정이다."

"그거 참 위로가 되는 이야기지만, 너 혼자 재미를 보고 다니는 거 같아 괘씸하군."

내 신명나는 파괴 활동에 동참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적잖게 아쉬운 건지 셰릴은 조금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밤늦게 귀환한 이들을 맞이하느라 한바탕 소란스러워진 끝에 아침이 밝아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사이 특별한 사건이나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달라진 거라고는 라그니스가 잠시나마 오가토르프 저택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점과, 레니사 경이 그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그녀의 안위를 챙기기 시작했다는 점 정도? 다른 사용인들은 적당히 레비엥 저택으로 돌려보냈지만 본인 만큼은 한시도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늘은 제발 재판이 좀 일찍 끝나길 바라며 저택을 출발한 이들을 배웅한 뒤에 아침 식사를 마친 나와 아실리에는 몽순이로 예상되는 미행을 뒤에 붙인 채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자 걸음을 옮겼다.

대부분은 내 개인적인 용무에 불과했다. 여유가 생긴 김에 모험가 길드도 찾아 가서 폐던전 사건을 해결한 뒤 아직 받지 못한 보상에 대한 것도 문의해 보고, 드워프 지구로 가서 발쿤 씨를 만나 다시  한 번 그림자 발에게 감사함을 표하고자 편지를 맡기는 등의 일들.

그 와중에 최근 신경 쓰지 못한 약초 및 도구 파우치의 내용물을 재점검하고 아실리에의 도움을 받아 다시 채워 넣으며 내일 있을 전투 이전에 만전을 기하는 게 내 오늘 일과의 전부였다.

요 며칠 동안 해왔던 활동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여겼지만, 아실리에는 같이 모험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평소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할 일이 그렇게 많았던 것도 아니라서 볼일을 모두 마친 우리가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엘드미아 님. 잠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정문을 넘자마자 느껴지는 안락함을 만끽하면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장비를 점검하며 시간을 보내려던 우리를 찾아온 것은 몽순이었다.

어제도 하루 종일 따라다녔지만 직접 말을 걸어온 적이 없었던 만큼, 그녀의 방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뭐라도 붙었어?"

"네. 하지만 보샤 백작이라던가 그의 패거리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걔들 말고 날 미행할 애들이 누가 있다고?"

"다른 정보상으로 예상됩니다."

정보상이라. 그러고 보니 지크멜이 귀족을 상대로 하는 정보상은 자기 말고도 둘 정도는 더 있다고 했었던 게 기억 난다.

"보샤 백작이 의뢰를 한 걸까?"

문제는 이놈들이 의뢰를 받고 내 뒤를 밟는 건지, 아니면 그냥 뭔가 싶어서 확인차 뒤를 캐는 건지 당장 알 방도가 없다는 거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부분은 몽순이가 해결해줬다.

"백작은 정보상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부하들에게도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도록 주의를 주는 편에 가깝습니다. 아마 자발적으로 뒤를 캐보는 게 아닌 가 싶습니다."

밖에 나가서 특별히 뭔가 한 건 없는 만큼 백작이 직접 개입한 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긴 했다. 그치들도 그걸로 먹고 사는 건데 말이지.

오히려 내가 최근 한 일들을 알게 되면 뭐라 하지 않아도 즉각 떨어져 나갈 게 분명하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정보상이라는 인물을 하나 정도 더 알고 있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을 거 같단 말이지. 뒤를 밟아볼 수 있겠어?"

"네. 어렵지 않습니다."

덤덤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태도로 몽순이가 대답했다. 역시 아실리에의 말대로 전문가이다 보니 자부심이 따라오는 것이려나? 나야 좋지만.

"오늘은 더 이상 밖으로 나갈 계획이 없으니 내일이나 모레 정도에 부탁하게 될 거야. 그때까지는 너도 좀 쉬고 있어."

"알겠습니다."

용무는 그것뿐이었는지 몽순이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바꾸고는 방을 나섰다. 이거... 뭔가 직속 하인을 하나 둔 거 같아 기분이 오묘하다.

"부하 하나 생긴 기분이네."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꿈을 섬기는 자라니. 엘디 졸지에 엄청난 거물이 됐네?"

장난기 넘치는 아실리에의 농담에 평소라면 그저 웃어넘겼겠지만, 제 목숨 값이 금화 100장이라고 말했던 몽순이다 보니 마냥 웃을 수 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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