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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43화 (143/412)

몽순이가 물러나고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나에게 손님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누군가 싶어 마중을 나오게 된 나는 전혀 새로운 얼굴을 보며 짧은 의문을 가지는 상황에 놓였다.

모험가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해서 누군가의 수행원이나 귀족 가문의 하인같은 행색도 아닌 인물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확실히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안녕하십니까 에가 경. 부탁하신 물건이 준비되어 전달드리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나를 보자마자 품 안으로 손을 넣길래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 올리며 기습에 대비하고 말았다. 안면도 없는 누군가가 주문한 적도 없는 물건이 준비되었다며 저렇게 꺼내려고하면 안그래도 긴장할 텐데, 난 최근 저지른 일까지 많다보니 태평하게 반응할 수 없겠더라.

하지만 그의 손이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단번에 상황을 이해하게 된 나는 내 반응을 보고 의아함을 느끼기 시작한 경비원들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최대한 밝게 웃어보이며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이했다.

"예상보다 빨리 준비되었군요. 내일은 되어야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익숙한 것인지 나의 갑작스러운 환영조차 자연스럽게 받아 넘긴 남자는 미소와 함께 품에서 꺼낸 두루마리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일정에 맞춰 전달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딱 봐도 고급 양피지가 분명하지만 아무런 밀봉 조치도 되어있지 않은 두루마리는 레스롬 공작이 약조했던 비행 허가서였다. 하긴 대놓고 귀족원 사람을 보낼 수도 없고, 자신의 이름도 내걸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

사전에 미리 약속한거라고는 하루 이틀 내에 보내주겠다는 어중간한 내용 뿐이었음에도, 최대한 눈에 덜 띄는 형태로 나에게 전달해주기 위해 이런 번거로운 부분까지 신경써줬다는 점에 순수하게 감격스러워하지 못한 건 순전히 상대가 레스롬 공작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지.

간단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남자를 배웅한 뒤 저택으로 돌아오며 확인한 두루마리는 척 보기에도 공문서다운 형태로 빼곡히 글이 써져 있었지만, 정작 내가 진짜 비행 허가서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보니 진위 여부를 가릴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 부분은 기에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될 부분이라 딱히 걱정하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뭔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진 않을까 빛에도 비춰보고 필체도 살펴보며 시간을 때우는 사이 재판을 마치고 라그니스와 일행들이 귀가했다. 이번엔 제대로 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인지 단순히 빨리 끝난 덕인지는 몰라도 돌아온 이들의 얼굴은 어제보다는 한결 살아 있는 사람다웠다.

오늘 있던 재판 역시 긍정적으로 정리된 덕분인지 사람들의 분위기는 밝았고, 그런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들은 간만에 모여 저녁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귀족들의 재판이란... 정말 힘들더군요.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비장한 표정으로 출발했던 기에스였지만 지금은 다크 서클을 질질 끌며 수프를 떠 먹는 난민과도 같은 몰골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오늘 하루 재판에 참석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마쳤다고 한다.

"그가 증인으로 나타났을 때 귀족파 놈들 표정을 엘드미아, 네가 봤어야 하는데."

"솔직히 좀 짜릿하긴 했습니다. 저랑 눈이 마주쳤을 때 에타빌 자작이 보인 표정은 우울할 때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삶에 활기를 가져다줄 것 같더군요."

기에스에게 빚을 씌우고 작업에 들어갔던 인물은 에타빌 자작이 맞았다. 듣기로는 보샤 백작의 측근 중 한 명으로, 대금업에서 꽤나 두각을 드러내던 인물이라고 한다. 이번 재판에서는 라그니스의 극악무도한 반역 행위에 개인 자산을 잃은 불쌍한 피해자인 척 등장한 거 같았지만, 우리가 진짜 피해자를 데리고 있었던 덕에 공격만 당하다가 끝났다고 하니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놈에게 멋모르고 돈을 빌렸다가 목줄이 채워진 길거리 깡패가 한둘이 아닙니다. 모험가 중에서도 빚을 핑계로 부려지는 이들이 있다고 하니까요."

"칼침 놓고 싶은 놈일세."

"...엘드미아, 넌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진짜로 대뜸 찾아가서 찌를까 두렵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을 가득 담아 진중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말하는 셰릴에게 난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셰릴 속의 나라는 놈은 대체 어떤 존재인 것일까? 칼침 놓고 싶다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인간한테 달려가 일단 찌르고 보는 사이코패스라니, 세상에 그런 미친놈이 멀쩡히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면 그게 바로 말세 아닐까?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

"...그럴 리 없는 거 맞지?"

왜 아무도 내 말에 공감을 안 해줘...?

심지어 기에스마저도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기에 배신감을 가득 담아 노려보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돌렸다.

"흠, 흠! 아무튼 오늘은 정말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통쾌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엘드미아님은 내일 갈 곳이 있다고 하셨죠? 어디까지 날아가야 하는 겁니까?"

"그렇게 멀지는 않아. 아, 그리고 이거 비행 허가서라고 받은건데 네가 확인 좀 해줘."

주제 전환은 어설펐지만, 중요한 내용인 만큼 구태여 태클을 거는 대신 품에 넣어두었던 두루마리를 넘기며 말을 맞추자 라그니스가 의문을 드러냈다.

"갈 곳? 비행 허가서?"

"안 그래도 오늘 여유가 있으면 모두의 즐거움을 위해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

좋은 일은 숨길 이유가 없고 착한 일은 칭찬 받아 마땅한데 그 두 개에 교집합으로 포함되는 보샤 백작 뒤통수 치기를 말하지 않을 이유가 어딨겠어?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지루한 내용은 배제하고 유쾌함은 강조해가며 지난 며칠 사이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간결히 정리해 털어놓았다.

적의 고통은 아군의 행복임이 분명한데도 그 이야기를 다 경청한 라그니스는 양쪽 관자놀이를 검지와 중지를 모아 누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일주일 치는 족히 될만한 사건들을 몰고 다니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정말."

라그니스가 그나마 자신의 감상을 입으로 말할 수 있었던 건 제국에서의 일도 그렇고 알게 모르게 내 행동력에 익숙해진 덕일지도 모르겠다. 셰릴조차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상태인데다가 기에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했으니까.

"대체 무슨 삶을 살고 계신겁니까...?"

"자신에게 충실한 삶?"

"두 번 충실했다가는 나라가 사라지겠는데요?"

"에이, 별로 그렇지도 않아."

이번 삶이 두번 째 삶인데 아직 나라가 멀쩡한 거보면 말이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에스는 머리 위로 무수한 물음표만 만들어낼 뿐,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에 한가득 채워진 의문과 별개로 비행 허가서가 진품이라는 사실을 알려줬을 뿐이다.

새벽에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심지어 지금은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기인지라 말 위에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딱 좋은 수준으로 춥다.

비룡을 타고 하늘을 날 경우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저체온증 같은 거로 꼼짝도 못하기 딱 좋은 날씨라는 소리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엘드미아님은 묘하게 하늘을 나는 것에 익숙하신 거 같단 말이죠."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평범하게 움직여도 더울 정도로 외투를 껴입고 망토까지 두른 나를 바라보며 기에스는 새삼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옆에서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아실리에 역시 나와 별반 다를 거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조언도 없었는데 내가 알아서 잘 챙겨입고 온 것을 보고 많이 의아해 하는 눈치다.

"그러게. 이번이 두 번째 비룡 탑승 아니니?"

"뭘 새삼스럽게. 이 정도 날씨에는 말만 타고 달려도 추워서 덜덜 떨잖아. 비룡이니까 더 춥겠거니 했을 뿐이라고."

"보통은 고저차에서 오는 기온의 차이를 굉장히 우습게 보는데 말이죠. 지난번에 공중에서 보여주신 담력도 그렇고 의외로 비룡 조종사가 체질이신 거 아닙니까?"

"체질이면 뭐 하겠어. 왕실의 허가가 없으면 마음대로 날지도 못할 뿐더러 이 큰 놈을 먹이는 것도 다 돈인데."

확실히 엄청나게 매력적인 이동 수단이지만, 국가에서 허가한 직업이 아니면 마음대로 타지 못한다는 단점 때문에 관심도 미련도 없다. 그런 걸리적거리는 제약따위 신경 안 쓰고 기를 수 있다면야 애완동물 겸 이동 수단으로 키울 생각은 있지만.

"각설하고 이번 목표는 이동 중인 용병단이야.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난제가 될 거 같아. 그래도 정보에 의하면 말을 데리고 다니는 놈들은 아니라더라."

간부들 정도는 편한 이동을 위해 말을 타고 있을지도 모르나, 어차피 다같이 움직이는 마당에 딱히 속도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지크멜에게서 얻어 온 약도를 펼쳐 기에스에게 내밀자 잠깐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파악을 끝낸 그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엘 방향이군요. 이 인근은 도로 정비가 잘 되어있는 편이라서 말이 없으면 대부분의 시간을 도로 위에서 보낼 겁니다. 지도에 표시된 장소도 그걸 기반으로 야영지를 예측한 것 같군요."

"그걸 그 약도만 보고 감이 온다고? 혹시 왕국 지형을 다 외우고 다니니?"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겁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다보니 도시에서 길을 잃을 지언정 이런 건 잘 찾아내죠."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기에스의 주장에 마땅히 공감하거나 납득할만한 예시가 떠오르지 않은 터라 그냥 그러려니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둘이서 타는 법은 기억하시죠?"

"물론이지."

기본적으로 2인용을 가정하고 만들어진 비룡 안장 위에 셋이 타기 위해서는 조종사에게 최대한 여유를 주고 뒷좌석에 두 사람이 붙어서 앉아야 한다. 방향 조절을 거의 온몸으로 하거든. 숙련된 조종사라서 안 떨어지는 수준이다 보니 어중간하게 붙어 있으면 금방 균형을 잃고 떨어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빈말로도 익숙하다고는 하기 힘든 동작으로 비룡에 올라타 자리를 잡은 뒤 아실리에를 부축해 앞에 앉히자 살짝 들뜬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조금 두근거릴지도?"

"비룡 타는 게?"

"아니. 엘디랑 같이 타는 게. 어릴 땐 내가 뒤에 탔잖니? 반대가 되어서 말 한 필에 이런 식으로 같이 탄 채 산책을 해 보고 싶었거든. 말보다 비룡을 먼저 타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러면서 즐겁다는 듯 어깨를 흔드는 아실리에의 모습이 너무나도 순진무구해 보여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비룡 조종사 자격증 같은 걸 취득해서 직접 비룡을 태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파급력이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른 새벽이라 아무도 없는 오가토르프 저택의 연병장에서 울려퍼진 기에스의 외침을 신호 삼아 비룡이 날개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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