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단자아앙!!"
악당의 절규는 언제나 듣기 좋다.
"곧 따라갈 텐데 뭘 그리 애타게 부르냐!"
솔직히 별로 듣기 좋지는 않다. 더럽게 시끄러워서 때려 죽이고 싶어질 뿐이다. 조용히 죽어도 모자랄 판에 뭐가 억울하고 애처로워서 악당 새끼들이 절규를 하나?
그래도 내가 베어 죽인 놈이 단장이라는 건 확인할 수 있었으니 그 점은 마음에 드네. 단장까지 합쳐서 10명 정도 죽였나? 꽤나 마력을 뿌리듯이 몰아친 결과인데도 컨디션에 이상은 없었다.
이대로면 포위당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아실리에의 지원사격을 받으면 아무 문제없이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
"엘드미아아!"
"그래! 그게 나... 예카트리나?"
우리가 날아왔던 방향의 숲길에서부터 금발을 흩날리는 익숙한 거구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나가 왜 거기서 나와?
"지원하겠어!"
그녀의 뒤로 마력이 흘러 들어가기에 조금 신경 써서 살펴보니 렐리에 뿐만 아니라 긴과 가엔달마저도 함께 뛰어오는 중이었다. 심지어 예카트리나는 대체 언제부터 뛰어온 것인지 몰라도 이미 지근거리까지 도착해 육중한 거병을 휘둘러 굉음과 함께 두 놈을 말 그대로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그 아찔한 광경에 주변에 있던 간부라는 놈들마저도 턱이 빠져라 경악하는 사이, 난 조금은 냉정해진 상태로 가까이에 있는 놈을 하나 더 베어냈다.
"반가운 얼굴이 보이면 화가 풀리는데 이거 큰일이네."
농담이 아니라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화가 순식간에 확 하고 죽어 버렸다. 적당히 다른 모험가 놈들이었다면 모르겠는데, 내 인생 최고의 드림팀을 보고나니 있던 화도 사라져버리네 이거.
"씨발! 혼자가 아니었어! 후퇴! 후...!"
아니, 혼자가 아닌 건 맞았지만 저렇게 많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일단 명령을 내릴 정도의 정신 머리는 있는 놈인 거 같아서 재빨리 달려들어 죽여 버렸다.
기습과 대가리 치기는 언제나 옳은 법이지. 그것만으로도 40명의 병사들이 40명의 떨거지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당첨이지.
아, 이젠 30명도 안 남았을 테니 30여명의 떨거지들이겠구나.
"정말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가 너무 뛰어난 거 아닌가 엘드미아!"
셋 중 가장 빠른 몸놀림으로 내가 있는 곳까지 치고 들어와 적들에게 일방적으로 포위되는 것을 막아주는 가엔달의 외침에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아니랍니까.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군요!"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라. 불과 의뢰 한 번 같이 했을 뿐인데도 이렇게까지 믿음이 간다는 점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아실리에나 셰릴하고 붙어 싸우는 것과는 느낌이 달라서 생소하면서도 유쾌하네.
무엇보다 이들이 이 명백한 수적 열세에도 나에게 합류했다는 점에서 이미 불쾌감은 싹 사라졌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도 용병단이 여기서 저지른 만행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일 테니까. 선량한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법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이들은 만신전에 마을 사람들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네. 그들을 인질로 잡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해!"
"아주 좋은 정보입니다!"
다른 때였으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그럼 비열한 놈들을 상대하기 위한 아주 완벽한 방법을 알고 있지.
"누나!! 만신전으로 가는 놈 다 쏴버려! 인질 있어!!"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가엔달과 달리 아실리에는 확실하게 내 말을 듣고 말 대신 화살을 쏘아 올렸다.
마나가 실린 화살이 아직은 어둑어둑한 새벽의 하늘을 가로 지르며 날아가는 건 나만 볼 수 있는 광경이겠지. 하지만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가엔달은 눈치 빠르게 만신전을 돌아보았고, 투구를 벗어 던진 채 그곳으로 달려가던 놈의 뒤통수에 정확히 화살이 박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혼자 온 게 아니었군?"
"보호자 동반하에 나온 산책이죠."
다행히 풀 플레이트 아머로 꽁꽁 둘러싼 녀석은 한 명도 없으니 아실리에 혼자서도 만신전으로 향하는 놈들 정도는 처리가 가능할 것이다. 눈앞의 적들을 베고 걷어차며 예카트리나와 긴 쪽으로 합류하자 피범벅이 되었음에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카트리나가 호쾌하게 내 등을 두드렸다.
"하하하! 안 그래도 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마법이라도 부릴 줄 아는 거야?"
"으컥. 말을, 못, 하겠으니, 좀, 살, 살!"
가죽 갑옷이 아니라 철판 갑옷이었으면 그녀의 손바닥 모양대로 우그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성대한 환영 인사를 받는 사이 달려드는 적의 정수리를 도끼로 쪼개버린 긴이 외쳤다.
"곧 있으면 렐리에가 주문을 완성할걸세! 무리하지 말고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이 난전에서 주문을?"
"하하! 보면 알 거야! 제약이 많아서 우리끼리 있을 땐 시도할 수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충분히 가능해!"
대체 무슨 주문을 시전하려는 지는 몰라도 저렇게 자신만만하니 딱히 의심이 되지는 않는군. 처음에 달려들어 헤집어 놓은 것을 배려해서 잠깐 뒤로 빠지도록 도와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잠깐 쉬는 사이 고개를 돌려 렐리에를 바라보자, 내 이세계 평생동안 가장 마법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력이 렐리에의 주변에서 요동칠 뿐 만 아니라 그녀의 두 눈과 연결되어 파랗게 빛을 발하고 있는 광경은, 제국 아카데미에서 마법사들끼리 싸우던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마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렐리에의 두눈에서의 빛이 진해질수록 세상이 밝아졌다.
"저, 저게 뭐야...?"
적들 사이에서 두려움 섞인 중얼거림이 튀어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였더라도 한창 싸우는 도중에 갑자기 머리 위에 태양 하나가 뜨기 시작하면 당장 주변에 마법 쓰는 거 같은 놈부터 찾아 대가리를 따고 봤을 테니까.
차이가 있다면 지금 그 대가리를 따고 싶어지는 마법사가 우리 편이라는 거였고, 적들이 우리 마법사의 대가리를 따려면 나를 제치고 지나가야 한다는 극악의 상황이라는 점이지.
"마, 마법사다! 마법사부..."
정말 고맙기 그지없어라.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녀석이 혼란을 수습하려고 하네. 원래부터 쉴 필요도 없었기에 난 바로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방해가 있지만 의미가 없다. 느리고, 어설프고, 어중간할 뿐이다. 이미 내 안에서 이 전투는 끝난 전투였다.
떠오르는 생각이라고는 예상보다 내륙은 강함의 기준이 이상하다는 것뿐. 제국에서 마주했던 마족놈들도 그렇지만 강함의 격차가 너무 심하다. 정말 모든 강자들이 국경으로 차출되어 잘해봤자 이류에 불과한 이들만 남아 있는 걸까? 이런 환경 속에서 이득을 취하려고 남은 일류들도 있을 텐데?
답은 명확했다. 그놈의 방랑 기사 타이틀.
그거만 얻고 나면 바로 국경으로 달려가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직접 경험해 봐야 했다.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탄과 고민 사이에서 두어 놈 정도 더 베고 나니 예카트리나가 우렁차게 경고했다.
"엘드미아! 놈들과 붙지 마라!"
그런데, 그 경고가 좀 이상했다. 붙지 말라고? 그거로 충분한 건가? 뭐가 됐든 나에게 경고한 건 맞으니 일단 거리를 두자마자 마나로 인해 평소보다 엄청나게 증폭된 렐리에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타올라라!"
그런 내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를 두고 견제하던 두 놈이 그대로 발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살아 있던 모든 용병들이 순차적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흐아아아악!"
씨발.
세상에.
씨발 세상에.
◈
매의 발톱단 부단장 궨스는 감이 뛰어났다.
주변에는 일부러 구체적으로 알리지 않았으나 그 감은 거의 마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났고, 평생 감에 의존해서 목숨을 부지하며 삶을 이어올 정도였다. 그런 감을 가지고도 반역자 집단에 머문 이유는 실제로 그게 조금도 위험한 일이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성도 있어 보였고, 설령 위험해지더라도 그전에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그게 오만함에 불과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지만, 궨스는 그래도 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위기감에 토악질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가며 어떻게든 살 길을 찾던 와중에 폐허 위로 작은 태양이 생기는 것을 바라본 그가 떠올린 것은 과거에 겪었던 전장이었다.
용병단을 따라다니는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나, 우연찮게 마법사가 참전한 전장을 멀리서 구경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도 저런 불덩이가 전장 위에 떠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마법사의 적 진영 병사들만. 적대 진영에 속한 용병들은 멀쩡했지만, 그 광경은 충분히 사람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당시엔 알 수 없었던 그 원리를 이제는 알고 있었기에 궨스는 검도 내던지고 망토를 벗어던진 뒤 당장 벗을 수 있는 갑옷까지 벗어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지만 저 마법은 술자가 인식한 장비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에게 동시에 발동된다.
마법사가 대체 무엇으로 집단을 특정지었는지 알 수 없으니 용병단원들끼리 공유하고 있는 모든 장비는 벗고 봐야 했다. 주변에 알릴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저 형상화 된 죽음과도 다를 바 없는 검사가 당장 달려와 목을 칠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게 주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발작적으로 모든 장비를 벗어던지며 마지막으로 신고 있던 그리브마저 벗어던졌을 때 마나가 담긴 외침이 울려 퍼졌다.
"타올라라!"
둥골이 서늘해지는 외침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으나, 궨스는 살아남았다. 사방팔방 불붙은 과거의 동료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그렇게 안도하며 빨리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던 궨스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친구는 눈치가 빠르네?"
방금까지 미친 듯이 경고하던 감이 침묵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처럼.
"내가 예전에 만난 친구 중에 가드웨리라는 친구가 있었어. 수다쟁이 웨리라고 별명을 지어줬지. 그 친구와 나눈 대화가 매우 매우 도움이 돼서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엔 죽을 위기를 아주 잘 넘겼단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천천히 고개와 눈만 움직여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자.
"우리 눈치 빠른 친구도 웨리랑 성향이 맞을라나 모르겠네?"
대체 언제 다가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형상화 된 죽음이 끔찍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